정해진 밤을 끝낸 후 만난 새벽의 모습을 그리다.
밤은 정해졌다. 자기 규범 속 몇 가지 일을 꼭 치른 후 잠자리에 든다. 무엇인가 야속한 일이라도 있던 날이면 마구잡이로 저녁 식사를 한다. 어제저녁도 그랬다. 퇴근 후 끓여둔 시각으로부터 하루 지난 김치찌개를 데워 냄비 채 들고 조리대 옆에 서서 식사했다. 겨울 소 팔자 편한 모양새로 배를 채웠다. 종일 일터에서 시달린, 배고픈 소 정신없이 꼴 먹는 풍경이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탄수화물을 멀리하겠다는 신념을 마련한 후 대여섯 숟가락을 떠먹으면 사라질 흰밥을 먹는다. 돼지고기 전지 세 조각을 크게 썰어 끓인 찌개는 1년이 다 되어가는 지난해 김장김치 맛이 더해져 한껏 무르익었다.
적당히 익은 김치의 신맛은 식욕을 자극했다. 평소 식사량을 떠올리면 두 끼 양은 되는 찌개를 어기적거리면서 모두 취했다. 보통 사람들이 먹는 크기의 세 배나 되는 커다란 전지를 입 안에 쑤셔 넣을 때의 포만감을 즐긴다. 오늘은 세 조각을 먹었다. 일반적으로 취하는 크기로는 아홉 조각은 되리라. 보다 크게 벌려야 하는 입이 1단계의 풍족함을 미리 즐긴다. 혓바닥 전체를 점령한 고기의 너비 또한 혓바닥에 드넓게 퍼져있는 미각 세포를 자극할 것이다. 폭넓은 너비를 채우는 충만함이 감각 세포를 빠르게 움직인다. 미감은 온몸의 세포에 들어앉아 있는 감각을 두들긴다. 전신이 깊이를 지닌 파고를 즐긴다. 감각의 파고가 생산하는 힘은 마력으로 발효된다. 순수 절정의 즐거움이다.
곧이어 이빨의 힘이 가세한다. 야무지게 이빨질을 한다. 천천히 먹으라는 말은 잔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소화불량 증세가 폭발하던 날 실감했다. 공포였다. 이후 의도적으로 늘인, 음식물을 씹는 횟수는 제아무리 쓴 음식이라도 결국 달착지근한 맛으로 화한다는 것을 체득하였다. 오래 파고들 때의 진득함이 지닌 묘미는 신비스럽다. 신비의 경험은 더 많은 만족감을 얻을 기회를 확보하게 한다. 음식이 음식을 부르게 한다. 역효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미감 증세의 발현 기회가 폭증하였고 탄수화물 대신 지방이 근육을 살찌웠다. 뼈도 튼튼하게 했다. 마침내 혈액도 점령하였다.
혈액은 순수를 지향한다. 침범한 지방은 혈액 성분의 옹고집인 순수를 오염시켰다. 혈액은 오염의 정도가 깊어지자 지쳤다. 나자빠지고 말았다. 혈액은 자기 성분을 정화시킬 수 있는 자화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길이 어두컴컴해지고 말았다. 혈액의 길 밖을 흐르는 기운은 아무 도움도 될 수 없었다. 온몸의 중심이라 자체 진단한 혈액의 길은 쓰디쓴 피의 보복이 무서웠다. 보강의 방도를 찾지 못했다. 이미 거를 수 없는 불순이었다.
천천히 씹기를 그만두기로 했다. 음식을 축소하자고 했다. 타성에 젖은 지 오래된 세월은 제대로 일상을 조절하는 능력마저 잃었다. 양 입술 끝까지 점령한 단내를 잊을 수 없었다. 야무지게 의도한 계획은 그 실천 의지를 쉽게 꺾이고 말았다. 불어 터진 혈액이 흐르는 길은 뒤로도 앞으로도 제대로 뚫고 나아갈 길을 잃고 말았다. 길 표면을 장식한 쓰레기 더미는 퇴치할 수 없는 상태로 굳어 있었다. 아무리 괭이질을 해도 사방팔방으로 도끼질을 해도 퍼낼 수 없었다. 최강도의 접착제가 되어 길을 막고 있었다.
어느 곳으로도 호흡이 불가능이었다. 우선 콧구멍을 뚫어 길을 내기로 했다. 달팽이관이 이미 질척거리는 진액을 굴려 진을 치고 있었다. 혈액은 사방으로 흐른다. 오염이 관을 막고 있었다. 문밖을 내다볼 수 없었다. 바깥 풍경을 진단할 수 없었다. 후각 신경은 이미 잠을 자고 있었다.
귀로 통하는 길도 뚫어보고자 했다. 후각 신경이 다녀간 후였다. 불량 상태의 후각세포가 달팽이관을 물들였고 달팽이는 미리 겁을 먹은 채 퇴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달팽이 너머 청각신경은 안을 가는 길을 찾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앞뒤가 콱 막힌 상황을 포착할 생각을 이미 버린 뒤였다.
혹 열리지 않을까 기도를 두드려 보기로 했다. 반응이 없었다. 컥컥거리는 고양이의 작은 소동도 흉내 낼 수 없었다. 기도로 통하는 길은 몇 해 전 밀가루를 사랑한 죄로 도넛을 닮은 혹의 탄생으로 한쪽이 막혀 있었다. 기도는 그 혹의 생에 의해 좌우될 자기 목숨이 불안하여 숨죽이고 있었다.
문 찾아 열기를 포기하려던 찰나 눈이 말했다. 나도 당신의 한 부분이지요. 나는 두 개의 문을 지니고 있어요. 하긴 귀도 그러하지요. 귀는 호흡으로부터 너무 가까운 근경을 차지하고 있어 저 혼자 생을 꾸려나가기가 힘들지요. 나는 그렇지 않아요. 어서 내가 지닌 문을 두드려요. 열어드리지요. 어서 와요. 아직 당신이 당신의 육신 아래 사죄할 기회를 드리지요. 어리석은 입맛 위에 놀아난 흔적을 상쇄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요. 지켜보겠어요.
미명의 새벽이었다. 그녀는 재빨리 일어나 맹 물세수를 하고 밤새 힘이 빠진 채 널브러져 있는 머리카락을 다듬었다. 뒤에서 앞으로 득득 득득 빗질한다. 수세미 더미 같은 머리터럭을 한꺼번에 잡고서 고개를 휙 세운 후 왼쪽 가르마를 유지하면 끝이다. 얼굴을 씻어낸 물이 아직 마르기 전 남은 손의 물기로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몇 달이나 지난 파마의 흔적이 되살아난다. 소란스러운 밤이 끝을 맺었다.
사나운 것은 꿈자리의 무서움이라고 말씀하시곤 하던 소녀 시절 할머니의 단정함을 기억해냈다. 먹고 바로 자면 마녀가 뱃속으로 뛰어들어 밤새 속을 깎는다고 하셨다. 둥개 둥개. 저녁 식사 후 온몸으로 춤을 춘 후에 잠자리를 드는 것이라고 하셨다. 다음 날 아침 할머니는 길게 몇 가닥 되지 않은 흰머리를 아침마다 감으셨다. 아직 덜 마른 머리카락을 한 가닥으로 모아 위로 올리고는 은비녀를 꽂으셨다. 할머니가 하루를 시작하는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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