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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하루 공개

그녀가 또 상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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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또 상경한다.

 

 

 

오늘 아침 출근길 1

 

 

 

평소 하던 대로 살겠다고 어제와 같은 시각에 집을 떠나왔다. 손님 와 있으니 말동무 좀 해주렴. 꼭두새벽에 웬 출근이냐. 오늘은 좀 늦게 나가면 안 되냐고 한사코 길을 막는 사람이 있다. 나는 옹고집을 부렸다. 가야 한다, 지금 나가야 한다. 내 출근 시각은 일곱 시 이전에 집을 나서는 것이다. 심중에 도사리고 있는 사람살이 복잡함을 어서 세상으로 나가 세상 속에 몸을 던져야만 풀어진다. 나 가겠노라. 어서 가겠노라. 나의 길을 막지 마시라. 어서 길을 내어주시라. 어제 손님이 있던 날 그렇게 출근을 했고 오늘 그 손님 그대로이니 더더욱 어서 나가리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일터의 이른 아침을 오늘도 지키고 있다.

 

 

그러하리라.

'가시내, 어찌 저리 변함없을까.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댔지, 이제는 순간 모든 것이 변한다는데, 아무리 세상 변하는 것과 인간 변하는 것 사이 아무 관련 없다지만, 사람이라면 저 나이 되었으니 적어도 인정은 좀 불려놨어야 하지 않나? 징허다, 징해. 똑같네. 저 가시내, 어릴 적 모습 그대로네.'

입 밖으로는 내놓지만 않았지, 속내 빤하다. '징허다'를 대여섯 번은 삼켰을 것이다. 그러고도 남을 일이다. 나는 손님에게 늘 이기적이었다. 늘 싸나웠다. 늘 제멋대로였다. 늘 지 잘났다고 뻣뻣이 고개 쳐들고 살아왔다.

 

 

오늘 아침 출근길 2 - 오, 까마귀의 아침 식사!

 

 

우리 부모의 교육열은 세상천지에 보도 듣지도 못할 정도로 그 열정이 대단했다(에구머니나, 이 내용 남발하는구먼!). 구구절절이 내놓을 일이 아니어서 멈추지만 이일 저일 해보지 않은 것이 없을 만큼 굉장했다. 요 근래 몇 년, 세상 휘어잡았던 뉴스들의 이분 저분 할 것 없는, 고위층 수준의 짓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일이었지만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 수준에서는 굉장한 일들을 골고루 하셨다. 자식 교육을 위해서.

 

 

돈벌이를 해야 할 곳이 농촌이기에 망정이지 '맹모삼천지교'에 버금가는 유학을 형제자매에게 하게 하셨다. 그 핏줄들 중, 3분의 2는 초등학교부터 유학이었다. 나도 3분의 2에 속한다. 지금 같으면 도무지 있을 수 없는 과밀학급에 구겨 넣어지던 내 초등학교 유학 시절 출발일이 떠오른다. 

 

 

아하, 3분의 2에 속하지 않은 한 사람, 초등 유학생 아니 중학교 때도 유학 생활에서 빠진 한 사람이 있는데 지금 내려와 있는, 오늘 또 한양 땅으로, 상경할 언니이다. 나의 언니들 중 끝 언니이다. 나와 초등 몇 년까지 시골 생활을 함께 했던 사람이다. 같은 시골 학교를 몇 년 함께 다녔던 핏줄이다. 제법 미운 정 고운 정 돈독히 나눈 자매이다.

 

 

오늘 내 집 손님으로 와 있는 언니는 나와 달랐다. 그녀는 어린 동생이 초등 유학을 떠나는 뒷모습을 향해 말했다.

"우리 엄마 아부지 저렇게 힘들게 사는디 어찌 내가 떠난다냐? 나는 안 떠날 거다. 여기서 중학교까징 다닐 거여."

어린 나는 당연하다 생각했다.

'저 언니는, 공부를 나 보다도 훨씬 못하는 저 언니는, 그래, 엄마하고 함께 지내면서 살림을 배워야 할 사람이야. 나는 공부할 팔자고.'

어머니와 아버지, 심지어 할머니도 그러셨다. '

"저것은 지 팔자가 저렇게 살 팔자여야. 그냥 지 어미 옆에서 살림이나 배우다가 나이 되면 시집가면 될 것이여."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이 되어서야 대도시의 여고에 컴퓨터 뺑뺑이로 입학하였다. 우리는 다시 만났다. 다시 시작된 나와의 유학 시절, 그녀는 대도시에 올라와서도 열심히 자취방 살림을 했다. 마땅한 일이었다. 나는 공부만 하는 영리한 동생이었고 그녀는 공부에는 별 관심 없는, 촌티 나는 무명 소녀였다.

 

 

그녀가 여학교 교복을 입고 있던 모습이 내게는 별로 없다. 왜 그럴까. 분명 3년의 여고 생활이었다. 허리를 꽉 쪼이는 상의에 잘못 입으면 엉덩이의 팬티 자국이 선명한 치마를 입었을 텐데. 아침마다 공부 생각만으로 머릿속이 꽉 찬, 이기적인 여동생에게 엉덩이 팬티 자국을 확인해야 하는 여고생이었을 텐데 말이다. 멋진 라인의 상, 하의 차림이었던 교복을 분명 입었을 텐데. 그녀는 늘 논밭 일로 바쁜 엄마 대신 부엌에 상주하던 집안 살림꾼의 모습이다. 

 

 

이제, 대한민국의 수도 한양, 서울이 그녀의 서식처 아니, 거주지이다. 서. 식. 처. 인간인 것을, 어찌 서식처라고 할 수 있냐고? 그녀는 몸만 서울에 있다. 그녀는 늘 이곳, 내가 사는 이곳, 그녀가 요 몇 년 전까지 살아내던 이곳에 몸과 마음 모두 두고 산다. 

 

 

아직 장가가지 못한(혹은 안 한) 마흔 가까이(?) 된 아들이 있다. 대학 1년 차 때 아비 잃는 설움을 맛봐야 했던 아들에게 어미는 늘 미안해한다. 죽은 남편이 미안해해야지 그게 뭐냐고 하면 이렇게 말한다.

"죽은 이가 다시 깨어나 말 못 할 테니 그 마누라인 내가 해야겠지. 어미가 해야겠지. 불쌍한 내 새끼!"

그 아들은 고교 시절을 줄곧 어떤 보살핌도 없이 혼자서 입시 공부를 해야 했다. 가끔, 점심 도시락을 싸는 일에 내가 동참할 때면,

"이모, 고마워요."

가는 소리 한마디 살짝 흘리고는 돌아서던 녀석이다.

 

 

이젠 다휘어져버린 우리 언니 열 손각락!

 

 

그녀, 이제는 아들 장가가기를 기다리면서 아들의 아침, 저녁 식사 준비로 세월 한다. 어서 아들 혼인시키면 맘껏 자유의 세월을 보내겠다는 꿈으로 사는 그녀. 그녀가 금요일 오후부터 우리 집 손님으로 와 있다가 다시 또 아들 사는 한양 땅으로, 밥 해주러 상경한다. 형제자매보다 더한 정 보내주던 옛 일터 관련된 사람들과 서너 날 거의 모든 끼니를 나누었다. 내 몸뚱이만큼이나 큰 아귀를 사 와서 손질하던 그녀의 양손 열 손가락이 떠오른다. 마디마디 휘어진 채 구부정, 허리 숙여 소리 없이 울음 하는 그녀의 호흡이 늘 안쓰럽다. 자식 잘 길러낸 것과는 별개로 그녀의 생이 늘 안쓰럽더라.  

 

 

기어코 이른 출근길을 나서는 내 등 뒤로 손님이 말했다.

"아이고, 나이 들어가는디 그 가는 허리 어찌할 거나. 잘 좀 먹고살아라. 사는 것 별것 아니어야. 건강이 최고여야. 그래야 니 아들 돈 벌어서 효도하는 것 볼 수 있어야."

 

 


 

오랜만에 제법 양이라는 단위를 대입할 수 있을 비가 내린다. 늦가을, 가을비일까, 초겨울 겨울비일까. 퇴근길 빗방울과 걸음 함께 하면서 손님 떠난 자리, 빈 곳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바쁘게 걸었다. 

 


월드컵이 시작되었다. 메시의 한숨이 슬프다. 그에게는 마지막 월드컵일 텐데. 나는 메시 덕후이다. 

 


무기력증에 걸린 듯 온몸이 무디다. 열 손가락, 열 발가락에 무거운 추를 달고 있는 느낌이다. 코로나19로 얻은 이명이 이런 저녁이면 드센 가락으로 활약한다. 마치 내가 이상한 세계와 무전을 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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