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으로 살아가는 세월
가을 하늘 속으로 온 정신이 빨려간다. 정신을 동반한 마음을 따르지 못하는 육신이 흐느적거린다. 바쁘게 일어나 출근하였다. 가을 하늘 파랑 원색이 나를 초대했다. 파랑의 여러 의미 중 나는 신비로움과 냉정함을 좇는다. 파랑 하늘 속에 내 청각을 찾아와 있는 어떤 아이의 고운 노랫소리가 맑은 춤을 동선을 긋는다. 어떤 어른이 아이의 동선을 따를 수 있으랴. 어린아이의 맑은 소리는 내 덜 깬 잠을 부순다. '다시 새날이란다. 어서 일어나 저기 떠오르는 햇빛의 볼에 안녕을 보내렴.' 동요 속 어린이에게는 노래를 지도하는 어른들의 억지 춘향 격인 삽입도 바로 느낄 수 있다. 그마저도 듣는 재미를 더한다.
일터로 오던 길에서 만난 가을꽃, 코스모스도 함께 왔다. 빈터 일년생 화초들 모임 속에서 코스모스를 찾은 것은 제법 시간이 필요했다. 세상이 최첨단으로 가면서 내가 만나게 된 색상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다. 셀 수 없을 만큼의 세분화는 수의 개수가 많아지게 했다. 우주를 사는 생명체들이 발하는 색깔도 다양해졌다. 한가지 또 특이한 것은 유난히 화려한, 짙은 농도의 색감을 지닌 물체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유혹으로 일상을 버텨야 하는 꽃의 세계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만물은 너 나 없이 서로를 앞질러 너무 무거워 곧 가라앉을 것처럼 짙은 농도의 색을 만든다. 각자 최고의 표상을 탄생시켰음을 자랑한다. 나는 선글라스를 쓰고 색의 유혹에서 벗어나고자 애쓴다. 그중 코스모스의 색은 소소한 집안 잔지에 머무는 수준이었다. 그런 코스모스가 마음에 쏙 들어 일터로 오는 내내 시야 속 한 곳에 동숙의 자리를 마련해줬다.
집을 나서면서 처음 들은 유튜브 강의는 순 토종을 자랑하시는 이근철 선생님의 영어 공부 방법이었다. 발음에 신경 쓰지 말라, 대화의 장을 어려워하지 말라 등 수없이 들어왔던 방법이다. 2배 속도로 들은 것이 문제일까. 그다지 가슴에 와닿지 않은 것은 현 시점 내가 영어 회화를 하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것이 확정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들은 강의인 것을 알면서도 왜 들었을까. 1분 1초가 아깝다고 생각하는 소중한 출근길에서.
언젠가부터 포기가 참 쉬워진 내가 안쓰러웠을까. 재빨리 내 몸의 중심점이라 여겨지는 깊은 그곳에서 솟구치는 쓰라림을 달랬다. 전환이 필요하다 싶어 동요에 집착하자 한다. 맑고 투명한 아이의 노랫소리가 서서히 아직 내게 머물러 있는 밤의 기운을 내쫓게 한다. 티끌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의 선명함이 참 고맙다. 선글라스 아래 두 눈의 수정체도 한결 투명해진다. 이 세상 모든 빛을 모아 색상이 없는 물의 맑음을 내 안에 담고 싶어지는 아침이다.
일터에 들어서면 대문 가까이 작은 꽃밭이 있다. 대문은 일터 출입구를 일컫는다. 그저 대문이라고 부를 따름이다. 꽃밭은 건물로 오르는 계단 한쪽 빈 터다. 남은 터의 흙을 살려 시멘트로 담을 쌓아 만든 사각형이다. 가로와 세로 각 50 센티미터 정도 정사각형이다. 그곳은 올 일년내내 푸르다. 침엽수일까? 아니다. 어린 소나무나 다 자란 굵은 소나무도 어울리지 않은 크기이자 자리이다. 올해 들어 쓰기 시작한 아침 일기 덕분에 내게 선택된 선물 같은 공간이다.
올여름 어느 지점이었을까. 푸르름 속에 어느 날 꽃이 있었다. 사진을 찍어 이곳 블로그에 올린 기억도 있다. 오늘 더더욱 짙은 초록 모음이다 싶어 가만 들여다보니 또 꽃이다. 꽃들이다. 며칠, 아침 찬 기운에 몸을 단련하여 실한 꽃으로 피어날 몽우리들을 달고 있었다. 무더위를 견딘 힘 때문인지 초여름을 피웠던 꽃의 수보다 훨씬 많다. 활짝 제 모습을 드러낸 꽃이 발견되면 꼭 필름에 담아 이곳에 올리리라. 기왕이면 내가 좋아하는 보라, 자줏빛, 남색 조의 꽃이었으면 좋겠다.
내가 기다리는 꽃은 국화류이다. 이는 분명하다. 올가을은 소국의 개화를 기다리면서 맞이할 것 같다.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너무 당연하고 세속적이며 구태의연한가. 세속은 세속일 때 세속의 건강한 힘을 지닌다. 물건을 기다리고 사람을 기다리고 자연을 기다리면서 세월은 간다. 기다림은 생의 고리가 엮여 진행되는 기본 규칙이다. 무너뜨릴 수 없으며 파괴시킬 수 없다. 삶을 일궈내게 하는 저항의 힘, 그 근원은 기다림이다. 사람살이는 기다림으로 살아가는 세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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