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을 필름에 담았다.
'낙엽을 필름에 담았다.'가 어울릴까, '필름에 낙엽을 담았다.'가 어울릴까. 문법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어느 쪽일까. 감성을 지향하는 쪽은 또 어느 쪽 문장을 택할까. 나는 앞쪽 문장을 택한다. 낙엽을 필름에 담았다. 오늘의 주인공은 '낙엽'이다. 오늘 아침 만난 기운을 똑바로 표현할 수 있는 쪽을 택한다. 앞이든, 뒤이든 무슨 차이가 얼마나 있으랴마는 꼬박꼬박 문법의 옳고 그름을 야멸차게 주장하는 이들도 있어 눈에 걸린다.
아파트를 나서는 순간 육신이 자기 안에 담은 영혼을 향해 급한 소리로 외친다.
"놀랍습니다. 부디 너무 놀라 균형을 잃지는 마십시오. 갈등은 일 것입니다.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오늘 하루도 모쪼록 곳곳에서 세밀하게, 귀한 순간 콕 찍어 내시길 바랄 뿐~"
깜짝 놀랐다. 요즈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입고 나온 최적의 여름 옷차림이 외쳤다.
"아, 오늘 우리를 취한 것은 세월을, 우주 순환을 평소 염두에 두고 살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할 것입니다. 한 겹 더해진 피복이 필요한 날입니다."
정말로 깜짝 놀랐다. 올 들어 우리 땅의 온대기후을 확실하게 느낀 것이 바로 오늘 아침이었다. 대기의 기운이 어제와는 판이하다. 180도까지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이다. 어제, 그제와 너무 달랐다는 것이 확실하다. 돌변해있었다. 민낯을 내놓은 내 양쪽 팔의 피부가 사뭇 최고속의 속도로 온몸을 움츠렸다. 달려드는 외부 기운들로부터 강력한 위압감을 받은 촉각들은 겁에 질리고 기가 꺾인 채 이내 풀이 죽었다.
모세혈관을 노닐던 혈액들이 척추를 건너 뛰어 중추세포 본부를 재빨리 노크했다.
"돌아가요. 옷 한 겹을 더 들고나와요. 우리는 아직 준비하지 못했어요. '예비'라는 낱말이 있잖아요. '미리'라는 낱말이 있지요. '사전 조사'라는 말이 있어요. '예방'이라는 단어도 있지 않나요? 뭘 하셨나요? 살아온 세월이 얼마인데 '예감'이라는 것도 없었나요? 이런~, 오늘 같은 날에는 가벼운 긴 팔 외투를 준비했어야 하지 않나요? 기운이 스산해요. '선선하다', 혹은 '서늘하다'를 거쳐서 와야 할 기운이 차례를 무찌르고 3단계를 건너뛰어 바로 달려왔네요. '스산해요.' 온몸의 뼈는 물론 내장까지 놀랐을 것입니다."
가는 혈액은 문 두드림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쌩하게 달려와서, 앞뒤 가리지 않고 마구 퍼부었다. 굵은 혈관들을 향해 오돌돌돌 살 떨리는 추임새와 함께 내쏟더니 치켜 뜬 눈동자에 담은 비틀어진 눈빛으로 대화의 끝을 마무리하였다. 나는 이미 아파트 정문을 지나고 있었다. 이렇게 올가을을 만났다.
아, 가을이구나. 올해도 꼭짓점을 지나 1년 포물선의 하향길로 들어서는구나. 밤새 돌변한 대기에 힘을 빼앗긴 물상들이 담고 있던 습도의 양을 낮춰 푸석푸석 건조 상태로 돌아서 있었다. 마른 길 위로 으스스한 분위기가 삶의 현장, 일상의 귀퉁이를 마모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냥 으스대던 여름은 나름 곧게 세워 치덕치덕 달라붙었던 힘을 다음 타자에게 건네고 있었다. 고개 숙여 우주 순환의 한 점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하늘은 파랑과 흰색의 둥글둥글하고 동글동글한 조화로 아기자기한 가을 꿈을 그리고 있었다. 대여섯 꼬마 아이들이 크레파스로 동그라미를 마구 그려댄 듯싶었다. 재잘재잘 이야기들을 쏟고 있었다. 2년 출근길을 가슴 들뜨게 하는 어느 빈 땅 한해살이 화초들의 모음 속에서 마른 꽃잎들은 도도함을 분출하고 있었다. 땅 주인이 심어 가꾼 듯 동화 속에 마련된 작은 정원을 연상시킨다. 동안 보는 것으로 족했으나 오늘은 몇 컷 사진을 찍었다. 이곳 블로그 가을걷이 글을 쓰려고 할 때 꼭 삽입시키고 싶다.
일터는 고요했다. 실외를 두 바퀴 돌았다. 공간은 여름 기운을 공기 중으로 이미 뱉어내고 곧고 반듯한 모양새로 고쳐 앉아 있었다. 늘 바라보고 있다 싶었는데 어느 순간 변신을 실행한 것일까. 몇 발자국을 옮기다가 오늘 아침 두 번째의 놀라움을 경험하였다.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실외 공간 둘레를 빙 돌아 서 있는 나무들의 몸체에 초록을 숨긴 단풍들 몇을 볼 수 있었다. 바닥에는 낙엽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녀석들은 참 천연덕스러웠다. 떨어짐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듯 의연했다. 그다지 목이 메는 성토의 흔적도 없었다. 운명이라 여기고 있었다. 재빨리 떨어진 낙엽의 광경을 필름에 담았다. 가는 세월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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