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새벽 장대비가 내렸네
새벽 장대비 내리는 소리가 나를 깨웠네. 마음 한쪽 포근해지는 기분, 무엇인가 조금씩 쌓이고 채워지는 기분에 짧은 잠, 덜 풀린 피로도 녹아내렸네. 왜 이렇게 하늘에서 무엇인가 내리기만 하면 좋은 것인가. 이름하여 ‘애정 결핍증’이라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최근 있었던 폭우로 인한 사건들을 생각하면 한편 살 내리는 소리 끊이질 않아 귀를 막아야 하는데 오늘 아침 쏟아지는 비에 내 안에 쌓여있던 모든 분노를 씻겨 내려보냈다네.
장대비는 다 헤진 여름 거죽을 뒤집어쓰고 일 년의 생 하류로 떠났네. 지루한 일상에 이골이 난 생명체는 신선한 바람을 맞이하느라 이른 아침 출발한 달음박질의 리듬을 멈추질 않았네. 내 낡아빠진 육신을 걸어놓은 채 함께 걷던 장 우산은 주인이 지닌 가는 살집이 안쓰러워 애써 보디가드 노릇에 집중했네. 남은 희망마저 폐기물이라는 낙인이 찍힌 몸짓으로 쓰레기가 쌓인 곳을 뒤적이는 어느 늙은이의 손끝에서 짙은 설움이 통곡을 하고 있었네. 쏟아지는 늦여름 비에 감격해했던 새벽녘의 나를 질타했네.
아침 일기를 다시 시작하려던 마음을 마구 채울 수 없어 짧게 아침 시를 읽었네. 도종환 시인의 시 ‘오늘 밤 비는 내리고’. 오늘 밤 비 내리고 몸 어디엔가 소리 없이 아프다. 빗물은 꽃잎을 싣고 여울로 가고 세월은 육신을 싣고 서천으로 기운다. 꽃지고 세월 지면 또 무엇이 남으리. 비 내리는 밤에는 마음 기댈 곳 없어라
시인의 시를 모방하려던 욕심은 ‘새벽’ 앞에서 무너졌고 신기 들려야 시인일 수 있다는 확신으로 사는 여자는 일찍 포기하는 것에 익숙해 있어 몇 번 시 구절들을 오독오독 씹으면서 읽었네. 새벽녘 내린 비이기에 내 몸은 아프지 않았구나. 오늘 내 빗물은 차마 여린 꽃잎을 싣고 가기에는 너무 거칠었네. 하여, 내 영육은 서천 못 가 갈림길에서 멈춰 돌아섰네. 추스른 몸 우거진 수풀 위에 싣고 아직 살아남으리라 여전히 걷네. 아직 내 생의 서식처에 의지해 있으리라.
최근 들어 캘리그래피도 놓은 상태여서 시 ‘오늘 밤 비는 내리고’는 화지에 빗물도, 눈물도 흘리지 못했고 조용히 내 일상의 뒤꼍으로 지워졌네. 어제 미처 처리하지 못한 문서들을 꺼내어 처리하느라 황금보다 더한 귀중한 시간, 아침은 조각조각 썰어진 채 분해되었고 순간접착제라도 구해 붙여보려고 했던 시간 티끌들은 소리 소문 없이 안녕도 고하지 않은 채 지워졌네.
사람은 제도의 사각형 안에 우리를 틀어 적재적소에 정해진 글자, 정해진 기호들을 심었네. 글자와 기호의 합법화를 구획한 자들은 아래에서도 충분히 올려다볼 수 있는 판옵티콘을 자랑하며 태양을 비켜 하늘을 보고 있었고 발바닥 밑이 소란하다는 것은 인지한 사람은 못 박힌 성인의 몸체를 떠올리면서 송곳을 찾았네. 불행히도 구식 철물점만 상주해 있었고 현대와 미래를 연결할 구멍은 만들어지지 못했네.
앙상해진 한쪽 귀가 균형을 소원하여 들은 유튜브 강의에서는 인간에게 문명은 모순을 즐기는 것이며 양가감정을 견디는 것이며 마침내 억압을 뚫고 나아가는 것이라 하네. 그 과정에 드러내는 각자의 언행과 강박관념, 금지와 노이로제, 불만을 꿰뚫어 무너지면서도 다시 일어나서 나아가기 위하여 종교를 찾게 되었다고 하네
.
내게 와 있는, 내가 살아내고 있는 문명의 이름은 어떤 것인가. 문명을 체화하기 위하여 즐긴 모순은 무엇이었을까. 내게 이것이며 저것이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채 양가감정을 지니게 했던 것이 있었던가.
나는 그저 엎드려 지냈다. 늘 시선은 지하로 가라앉았고 발걸음은 푸석푸석 가는 먼지 일으켰네. 송곳은커녕 가늘디가는 실핀도 스스로 마련한 적이 없었네. 내 앞에 와 있는 인간들이 공포였으며 내 앞에 놓여있는 사각문서는 내게 짐 지워진 업에 불과했네. 꿰뚫고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각성한 적도 없으며 종교를 찾아보지도 않았네.
내가 종교의 문을 밀고 들어가면 나는 교주가 되어 날뛸 것이 뻔해 두려웠네. 성부며, 성자며, 성모며, 예수며, 부처를 불러 팔짱을 끼고 가게 된다면 나는 미리 앞선 채 그들을 내가 인도해야 할 것 같았네.
이런 제기랄! 정해진 관 속에 누워있는 것이 훨씬 편했네. 나는 줄곧 내 안에서만 숨을 쉬었다. 나는 늘 어중간한 지점에 서서 앞으로도 뒤로도 옆으로도 전진할 수 없는 석상이었네.
어느 세월에 최첨단의 인공지능이라도 개발되어 석상에 영혼을 불어넣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내 생은 이미 질퍽해졌네. 흐물흐물 비정상적인 형태의 암세포처럼, 영혼의 직립이 다시 온다 한들 얼마나 감내해낼 수 있을까. 기다림의 인내를 발휘할 수 있는 세월도 그 너비가 이제는 너무 짧다.
오늘 새벽 장대비가 사람을 깨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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