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아침 일기를 시작한다.
다시 아침 일기를 시작한다. 여섯 시 삼십 분을 조금 넘은 시각에 집을 나섰다. 아파트 입구에서 오늘 아침 걸어갈 길을 조율했다. 조율(調律). 원뜻은 악기의 음을 표준음에 맞추는 것이다. 부차적 의미로 문제를 어떤 대상에 알맞거나 마땅하도록 조절하는 것이다. 여기에 이 낱말이 어울리는가? 이런저런 글을 읽고 쓴다는 책임감(?)으로 처한 상황에 맞게 낱말이며 구절을 쓰는가에 대하여 집착하는 자의 알량한 사고(思考)다.
옳고 그름을 가를 새도 없이 어제 아침 걷던 길을 제법 비틀어 걸었다. 옆 동네 다른 아파트의 둘레길 일부까지 삽입하여 걸었다. 나와 내 이웃이 걷는 일상의 터전에 내 작은 발자국을 남겼다. 그대들이여, 내 발자국을 뒤 이어 걸으라. 내 몇 발자국 앞서 걸으면서 그대들의 길을 미리 다져놓으리. 튼튼한 바닥, 듬쑥한 바탕을 마련해놓으리니 깊은 믿음 믿어 의심치 말고 내 흔적 위로 건너가 오늘 하루 알뜰한 세상을 일구시라. 오랜만에 입은 연보랏빛 긴 원피스와 함께 만든 나의 그늘이 나에 앞서 걸으면서 발걸음의 빠른 속도를 주문해 왔다. 예언자 혹은 선구자의 입김을 길 위에 쌓으면서 30분 남짓 걸었다.
오랜만에 하늘 모습 몇을 필름에 담았다. 걷기, 유튜브 강의 듣기, 사진 찍기, 교통 살피기. 넷 이상의 일을 동시에 운행하는 내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새삼 상기하는 것은 '나'의 심장 박동을 부드러이 쓰다듬고 싶었기 때문이다. 부디 오늘 하루는 마른 힘을 꺼내어서라도 지치지 말자고 다짐하고자 함이다. 어젯밤 이곳 블로그에 쏟아낸 내 일상의 꾸깃꾸깃한 푸념들을 상기하면서 이불속에서 얼마나 후회했는지. 감히 판옵티콘까지 들먹여서 얼룩덜룩했던 내 하루를 비판했던, 비난에 가까웠던 푸념의 어두운 향에 둘러싸인 내가 얼마나 가여웠는지. 판옵티콘을 읊은, 현대 철학의 완성자라 칭해지는 '푸코'가 웃을 일이었다. 나 스스로 비난하는 힘으로 내 불면을 억누르려 했던 안일함을 후회하면서 수면에 들다니. 그러나 제법 잤다.
인간의 의식이 만년 2등이라는 철학은 칸트 이후 벗어나기 시작했다고, 그리하여 철학사 상 '을'에 해당하는 인간의 위치를 이미 벗어난 것이라고 유튜브에서 강의한다. 예전에는 대상을 중요시했으며, 우리네는 우리와 상관없이 이미 있는 정답에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모사의 삶이었단다. 물체, 실체, 대상을, 태양을 늘 뱅뱅 도는 삶이었단다. 칸트는 아니라고 주장했다는데. 우리가 대상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세상은 바뀐다고. 즉 '인식 주관의 삶'을 우리는 살아내자고. 나를 이끈다고 생각했던 실체들은 이제 단지 대상이며, 실체에 의해 끌려다니던 사람이, 대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주체가 되고 우리의 힘, 인식 주체의 힘이 세졌다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대상은 단지 내 인식의 대상일 뿐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우리가 곧 주체임을 말한다. 실체 아래, 감히 다가갈 수 없는 인간이 아니다. 전체를 바로 볼 수 있는 우리는 대상보다 위에 있다. 대상은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불러줘야 생명이 시작된다. 우리 인간은 지성과 감성과 이성에 의한 인식으로 살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너로', '나로', 살아라. 너 자신, 나 자신의 의식으로 살아가라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라고 강의자가 설파한다. 그의 강의는 처음은 있었으되 끝이 없는 무한 지식이며 지혜이다. 나는 그의 '지혜'가 온전히 부럽다. 유튜브 '일당백'의 정박 선생님을 말한다.
유식. 불교에서 이 세상은 오로지 상징만 있을 뿐이다. 실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름을 붙여 불렀기에 대상이 거기 있을 수 있다. 불교에서도 그렇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우리 마음 안에 있단다. 심지어 AI를 불러온다. 인공지능(AI)이 곧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을 수용한 것이란다. 마음은 거울이었다. 깨끗해야 대상을 정확하게 볼 수 있다고 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능과 인식의 핵심은 우리 안에 있다. 우리 이성의 능력이 대상을 규정한다.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에 우리가 주체로 작용한다. AI 이론의 시작이 칸트 철학이며 불교사상이라는데 사방팔방으로 깊은 공부가 필요할 듯싶다. 깊은 공부를 어느 세월에나 할 수 있을까.
경비 할아버지를 제외하고 아직 아무도 찾지 않은 일터 공간에 스며들어 화단과 꽃들을 살핀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김춘수의 시 '꽃'을 떠올리면서, 오늘 유튜브 강의로 들은 칸트 철학을 생각한다. 꽃님네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본다. 채송화, 페퍼민트, 백일홍, 수련, 베고니아, 누드베키아, 칸나, 설국화, 흰꽃 나도 샤프란 등등. 철학으로 부르짖는 주장이어서 그렇지 내 일터 화단의 꽃들은 내가 불러 주지 않아도 각자의 자리에서 항상 꽃이다. 칸트며, 이어진 구조주의자들의 주장은 단지 '철학을 위한 철학'이라는 위험에 빠질 수 있지 않은지 조심스레 진단한다. 인류사 속에서 탄생한 철학이 꼭 드러내야 할 마땅치 않은 상황들을 들춰본들 단지 철학의 영역이다. 사상의 바탕을 단단하게 깔고 있는 역사 위의 궤적들을 뒤져보면 이처럼 단정적인 주장으로 어정쩡하게 부여잡고 있어야 하는 철학자들의 비애도 충분히 이해된다. 어쨌든 '무명 씨'로도 충분히 아름다울 내 일터의 꽃들. 가꾸는 자의 고귀한 손길을 철학자들은 우선 들먹여야 하지 않을까. 좁은 공간에서 들쑤시는 나의 건방진 논조에 칸트며 롤랑 바르트, 푸코, 자크 라캉, 그리고 <슬픈 열대>의 레비스트로스여 버럭 화들 내지 말라. 나는 우주 속 티끌의 '티'도 되지 못하는 존재이거늘~
철학의 향연 속에서 오만한 인식 주체가 되어 황송해진 마음 찌꺼기를 그러담으며 현실로 돌아왔다. 꽃들의 이름을 불러 준 것이 그들의 미감을 더욱 풍부하게 상징화하지 못하였음을 인식한 주체는 감히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나의 이름을 불러 달라고 우기기에 머쓱했다. 그에게로 가서 그의 꽃이 되고 싶다고 읊조리는 것도 영 어색하여 조용히, 옆으로 걷는 게의 걸음을 흉내 내어 실내로 진입하였다. 고요하였다. 내 공간으로 나와 함께 스며드는 음력 칠월 말의 기운이 한결 맑아져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습한 기운에 푹 젖은 채 발휘하곤 하던 여름 취기를 팔월 맞이를 위해 튼튼한 빨랫대에 온몸을 걸어 말린 듯했다.
이른 출근에, 철학을 듣는 아침이 참 행복하다. 순수이성비판 위에 서서 하루를 살아내자고 적어본다. 내 마음으로 세상을 인식한다. 좋은 일이다. 다만 오늘 하루를 함께 직조할 내 고운 사람들을 '대상'이자 '주체'가 동시에 되게 하겠다. 오늘을 함께 할 나의 사람들이 모인다. 나를 살게 하는 힘이다. 철학 반 현실 반의 버무림은 곧 '중용'이자 '제대로 된 생명체의 삶'을 살게 한다.
고운 아침이다.
갑자기 든 의문이다. 지금 내가 글을 쓰면서 마시고 있는 쌍화차는 간헐적 단식에 위반되는 것이 아닐까. 1일 2식에 결례인 것이 아닐까. 오랜만에 쓰는 아침 일기 쓰기의 시간, 이 시간이 참 소중하다. 오후에 퇴근하여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시간은 얼추 두세 시간을 가져올 수 있다.
오늘도 그림은 시작하지 못했다.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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