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통장의 1회 이체 가능 금액도 모른 채 살고 있었네.
바빴다. 나는 일터에서 좀처럼 조퇴를 하지 않는다. 오늘은 꼭 조퇴를 해야 했다. 잊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조퇴 신청을 대기시켰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컴퓨터 앞에 기록하는 '오늘의 할 일'에 '세 시 삼십 분 조퇴 신청'을 적어놓았을 정도이다. 오늘 할 일의 기록에 앞서 조퇴 신청을 했으면 될 일을 점심 이후에야 신청했다. 내게는 조퇴 신청을 하는 일이 영 낯설다.
충신이냐고? 충성이냐고? 아니다. 그렇다면 천성이 그렇고 그럼? 그것도 아니다. 습관이다. 단지 살아온 이력에 붙은 껌같은 타성일 뿐이다. 그렇게 살아왔다. 가끔, 나와 같은 종의 일터에 근무하는 조카의 근무 상황 신청 내용을 들을 때면 나는 화들짝 놀라곤 한다.
"오늘 쉬었어요."
"왜?"
"아픈데 쉬어야지요."
당연하다. 한데 나는 그렇지를 못했다. 현재도 그렇게 하질 못한다. 나는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
은 것은 아니다. 다행이다. 현실을 직시하고 나 자신을 진정 되돌아다 볼 줄은 알고 있으므로.
어쨌든 오늘 일 년에 다섯 번을 넘지 않은 '근무 신청' 중 한 번을 했다. 컴퓨터로 문서상 신청만 하면 됐다. 새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관(?)은 첫날 '근무 상황'에 대한 자기 방식을 쪽지로 날렸다. 아니 사람의 입을 통해서 전했던가?
"문서로만 제출하시오. 결재가 난 것만 확인되면 일을 보러 나가시오. 다만 아직 결재가 나지 않았으면 내게 와서 말을 하시오. 그럼 바로 결재를 해 드리리다."
'괜찮은 사람이군.'
나의 혼잣말 평이었다.
비 속을 뚫고 편하게 일터 정문을 나섰다. 반짝반짝 빛나는 흰 운동화가 젖을 것이 무서워 조심, 또 조심을 하면서 길을 걸었다. 오늘 내가 일찍이 일터를 나선 이유는 인터넷 뱅킹 1회 가능액의 상향 조정 신청을 위한 것. 내 거래 은행은 멀지 않은 곳이어서 철벅철벅이 되지 않도록 사뿐사뿐 가볍게 길을 걸었다. 다른 이들보다 먼저 세속으로 나선 기분이 '쏴'했다. 괜찮았다.
일을 치르는 시간은 일이십 분이면 될 터인데 남은 오후 시간을 어떻게 쓸까. 지나는 길에 보이는 수많은 음식들을 지나치는 나의 모습이 참 안쓰러웠다. 내게 그것들은 눈요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소화기 질병, 이름하여 '역류성 식도염'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을 안고 살면서부터 나는 휘황하게 차린 음식물들을 봐도 그저 그렇다. 침이 샘솟지 않는다. 무심코 지나친다. 아마 배 속에 집어넣고 난 후 겪어야 할 부작용이 우선 무섭기 때문이리라.
은행에 입실하였다. 다행히 손님은 나 혼자였다. 아마 문 닫을 시간이 다 되어가는 시각이었기 때문이리라.
"어떻게 오셨어요?"
"인터넷 뱅킹 1회 이체액을 좀 늘리려고요."
"저리 가십시오."
은행원은 나에게 바로 본인 인증을 원했고 주민등록증이 어디 있는지도 잘 모르는 나는 운전면허증을 꺼내 들이밀었다. 띠띠띠 따각 따각 따각. 아날로그를 입증하는 의성어 뒤로 은행원의 웃음이 가볍게 흘러내렸다. 나를 바라보는 그이의 눈빛에 장난기까지 느껴졌다.
"얼마나 크게 늘리시려고 그러세요?"
"어, 블라블라요."
"이미 되어 있는데요?"
"어? 언제 그렇게 되었지요?"
"삼 년 전에 이미 늘려놓으셨네요."
"삼 년 전이요?"
아. 생각났다. 조카가 한양에 집을 마련한다면서 부탁해 왔던 대출을 대신해 줬던 것. 하여 그 금액에 맞게 인터넷 뱅킹 1회 이동 가능 금액을 늘려놓았던 것.
은행원은 참 순진한 장년의 아줌마를 보는 방식으로 웃어줬다. 고마웠다.
새삼 내가 사는 방식에 대해 되짚어봤다. 경제를 진중하게 사는 사람들은 내게 이렇게 말하리라.
"당신 그리 사는 것이 아니오. 적어도 그 나이라면 자기가 행하고 있는 경제의 운용 방식은 샅샅이 알고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그리 살아서 어찌 윤택함을 살 수 있겠소. 어떻게 자본의 야리꾸리한 상황을 견뎌낼 수 있겠소. 딱하기 이루 말할 수 없소."
어떡하랴. 방법이 없다. 타고난 것을. 이상하게 나는 돈을 만지는 것이 싫다. 그저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돈이 있어 거기에 맞춰서 산다. 그냥저냥 산다. 가끔 내 눈에 확 들어오는 재미있는 그림 있으면 한 점씩 사는 재미로 산다.
문득 내 곁을 지나가면서 자기 친구에게 자기 재산 자랑을 하던 어느 초등학생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야, 나 주식하는데 말야. 어떤 종목인지 가르쳐 줄까?"
"주식? 너 주식해?"
"어, 우리 아빠가 해 줘. 근데 무슨 종목이냐면 2차 전지야."
"2차 전지가 뭐야?"
"나도 몰라. 그런 것이 있대."
아마 올해 4월 무렵이었을 거다. 그 아이 지금쯤 파이어족이 되지 않았을까?
파이어족은 ‘경제적 자립’(Financial Independence)과 ‘조기 은퇴’(Retire Early)의 준말. 경제적 자립을 실현하여 빠른 시기에 은퇴하려는 사람이다. 30대 끝 혹은 40대 초반 안에 조기 은퇴하겠다는 목표로, 회사 생활을 하는 20대 때 꽁꽁 동여맨 소비를 하면서 조기 은퇴 자금을 마련하는 이들. 모두 다 아시겠지만 새상 여기에 정리하는 이유는? 이것도 습관성. 언어를 붙잡고 늘어지는 궁여지책.
자, 모두 잘 자자. 오늘 일기는 맞춤법도 챙기지 않고 글을 올리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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