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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하루 공개

우체국에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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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만날 수 있다. 숨겨놓은 사랑? 혹은 잠시 보류해둔 사랑. 아니면 잠시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는 사랑. 그것도 아니면 곧 대형 폭포가 지닌 힘의 양으로 치솟아 오를 사랑. 그 어떤 것인들 어떤가!

 

그야말로 집과 일터만 왕복하는 삶이다. 일어나 일터에 가서 이것저것, 꼼지락꼼지락 아침을 꽉 채우고 그날그날 해야 할 일에 정신 바짝 엎드려 하루를 지낸다. A4 한쪽 가득 담긴 할 일을 거의 매일, 날카로운 직선을 좌악좌악 그어가면서 하루를 정리하면 하늘로 날아 가버린 시간은 내게 어서 집으로 가라 한다. 

 

전혀 태가 나지 않은 일들을 꼬박꼬박 해내고 가까스로 정리한 하루. 그 어떤 특별한 감정을 느끼는 날도 몇 날 되지 않는다. 나의 일상은 반성의 뒤틀림을 앓을 틈도 없이 반복과 반복의 순환 구조를 지닌 채 굴러간다. 아침 출근길, 아니 어젯밤 공책 일기에 펜으로 쓰면서 다짐했던 오늘 하루를 얼마나 실천에 옮겼을까. 어제보다는 좀 더 나은 하루를 살리라 다짐했는데 말이다. 하루를 뒤돌아보면서 걷는 퇴근길에는 듬성듬성 사람 사는 냄새를 포획하면서 오늘 블로그 일기를 생각하곤 한다.

 

오늘은 여느 때와 달랐다. 어제 일터로 지난주 토요일 급히 주문한 책이 도착했다. 민태기 박사의 <판타 레이>이다. 박사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느꼈던 과학의 즐거움과 유익함은 최근 상당 기간 내 삶의 활력소이다. 강의를 듣고 또 듣는다. 강의 내용이 담뿍 책에 담겼다는 사실을 접하고 시립도서관에서 책을 대여해 읽었다. 최근 삼사 년 내에 이렇게 숨가쁜 속도로 책을 읽은 적이 없었다. 상당 부분 강의로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인데도 너무 재미있었다. 

 

독서를 신나게 했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삼사 년 전까지는 적어도 일 년에 일백 권 정도의 책을 읽었다. 특히 반신욕을 하면서 책을 읽어대던 시간이 얼마나 마음 뿌듯했던지. 얼마나 나 스스로 만족감이 컸던지. 나는 독서에 흠뻑 적셔진 내 영혼을 한때나마 사랑했다. 이 일 저 일 일터 일이며 이것저것 개인사가 겹치면서 일상은 부정으로만 치닫게 되고 독서마저 손을 놓았지만 가끔, 아주 가끔, 나는 그 시절이 그리워서 책을 들고 나를 쑤욱 올려 앉힌다.

'너, 괜찮은 여자였어. 어쩌다가 조그마한 일들에 매달리게 되었느냐. 어서 벗어나거라. 눈을 줄 일과 눈 감을 일을 구분해서 대응하면서 살라는 거야.'

매번 나는 달래면서 살아댔더니 요즈음 생활은 또 조금씩 옛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그 절정에 이 책이 있었다. 민태기 박사님이 쓰신 <판타 레이>

 

군에 있는 아들에게 읽게 하고파서 주문했다. 느닷없이 이영도의 판타지를 사서 읽겠다는 톡의 내용이 얼마나 반가웠던지. 나는 시리즈를 몇 권을 구매하는 데에 돈을 지불했다. 이젠 다 자랐으니 아무 말도 하지 말자를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대쪽같이 자기 생각이며 그에 따른 행동이 강하여 어미인들 뭐라고 할 말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특히 군에 간 뒤로는 모든 일에 일체 관여하지 않는다. 면회 한 번 가지 않았다.

"이젠 나이가 얼만데요. 오지 마세요. 너무 멀잖아요."

강원도 깊숙한 곳이었던 첫 군부대에는 멀어도 너무 머니 오지 말래서 안 갔고 내가 사는 곳과 조금 거리를 단축한 곳으로 내려왔지만 역시 가지 않았다. 엄마가 담은 김치가 그립다는 말에 김치를 두 번 담아 보냈던가. 가족 톡방에 자기 아버지가 사자성어며 어떤 문장이나 글에 해당되는 내용을 소개해주면 제법 반가워하는 정도. 나는 혹 잔소리로 들릴 것 같아 말을 내놓기 전에 여러 번의 고민을 거친다. 

 

이번에는 큰 용기를 냈다. 용기보다도 어미로서 꼭 이 책을 읽게 하고 싶었다. 대학 이후, 아니 고등학교 입학 이후 내사랑에게 꼭 읽기를 전했던 책이 채 열 권을 넘지 않는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이던가 박경리의 소설 <토지>를 어른용 판 그대로 읽혔던 기억을 떠올리면 늘 미안했다. 이후 내 육아의 방식은 어미의 탐욕을 완성하기 위해 저지르는 탐욕이라는 생각이 들어 얼마나 이와 같은 생각을 무찌르느라 얼마나 힘들었던지. 이후 중, 고등학교와 대학 내내 아이에게 책을 권한다는 것이 참 조심스러웠다. 

 

군에 가면서 짐을 내려보냈는데 짐 속에 내가 읽을 것을 희망하는 마음으로 사 보낸 책이 몇 눈에 띄었다. 어린 왕자. 문태준의 시집 '가재미', 그 외 소설 몇 권. 물론 간절히 읽을 것을 권유한다는 등의 덧붙인 말은 단 한 마디도 없었다. 그냥 아무 말 없이 청소를 위해 아이의 원룸을 방문했을 때 가볍게 책장에 꽂아두고 온 것이었다. 대학 때의 전공이 익히고 배워야 할 내용이 엄청나다는 것을 책의 두께로 확인하여 잘 알기에 일반적인 문학 관련 글은 꿈도 못 꾸고 있는 듯싶었다. 나의 독서 권유는 멈췄다. 

 

민태기의 책 <판타 레이> 인터넷 24에서 가져옴

 

이 책은 꼭 읽었으면 좋겠다. 내가 이 책을 읽었던 것처럼 신나게, 즐겁게, 잔뜩 몰입하여 단 며칠 잠 안 자고 거뜬히 읽어냈으면 좋겠다. 물론 욕심이다. 오늘, 퇴근 후 급히 우체국으로 달렸다. 몇 줄 글을 넣어 보낼까, 기억에 남도록 편지라도 써넣을까 싶어 일단 예스24에서 내게 오게 한 후 보내려니 했다가 받아서는 온 그대로 보냈다. 박스 위 입구를 잘랐다가 글쓰기를 멈췄다. 마음으로 전하는 나의 이 책 독서 권유를 이해하기를. 

 

내가 다니는 우체국은 퇴근길의 반대에 있다. 열심히 걸어 우체국에 도착하니 오늘 보낼 수는 없다고 한다. 흔쾌히 괜찮다고 했다. 참 친절한 우체국 직원에게 나는 연신 '수고하세요, 감사합니다'를 외치면서 문을 나섰다. 새삼 온 힘 기울여 아이에게 내놓았던 나의 시간들이 떠올랐다. 오랜만에 내 아이에게 주고싶은 사랑 가득한 마음을 느꼈다. 나를 당당하게 살게 해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아이가 이 책을 읽고 그토록 열심히 공부했던 중고등학교 시절의 기쁨을 되살릴 수 있기를 바랐다. 꿈은 이루어질 것이다. 내 아이도 곧 내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쪽지를 가족 톡방에 올려주기를 기대한다.

"엄마, 민태기 박사님의 책이며 생각이 너무 재미있어요."

특히 어미와 달리 완전 이과생이었던 아이에게는 꽤 멋진 선물이 되리라 기대한다.

 

내사랑이 받고 크게 기뻐했으면 좋겠다. 우체국 택배.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화요일 오후, 퇴근길과 반대되는 길을 퇴근길의 길이만큼 걸어가서 들르게 된 우체국. 우체국에 가서 내사랑을 위한 책을 보내고 나니 아득히 먼 그날 읽었던 아름다운 시구도 생각났다. 우체국에 가면~ 제목은 '우울한 샹송'이지만 결코 우울한 시간이 아니었다. 우체국에 가니 시라는 것까지 떠올릴 수 있어 나는 가슴 끓게 하는 기분, 즉 내가 다시 태어나 새롭게 만들어낸 젊음을 사는 것이 아닌까 느껴지는 꿈까지 꿀 수 있었다. 

 

우울한 샹송

              - 이수익 -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풀잎되어 젖어 있는

비애를

지금은 혼미하여 내가 찾는다면

사랑은 또 처음의 의상으로

돌아올까

 

중략-

 

그리고 이기철의 <가을 우체국>도 떠올랐다.

 

가을 우체국

                  - 이기철 -

외롭지 않으려고

길들은 우체국을 세워놓았다

 

누군가가 배달해 놓은

가을이 우체국 앞에 머물 때

 

사람들은 저마다 수신인이 되어

가을을 받는다

 

우체국에 쌓이는 가을 엽서

머묾이 아름다운 발목들

 

중략-

 

정호승의 시 <장승포 우체국>까지 떠올리고 보니 갑자기 바다에도 나가고 싶어졌다. 애써 내게 오늘은 화요일임을 새기게 하면서 집으로 발걸음의 방향을 돌렸다.

 

사람들이여. 그리고 내사랑이여. 민태기의 판타 레이>를 읽자. 읽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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