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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하루 공개

많은 옷 중 오늘 아침을 입을 옷이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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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옷 중 오늘 아침을 입을 옷이 없더라.

 

나의 전생이 이렇지 않았을까. 블랙으로 사는 인생.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사방팔방으로 나 있는 문은 모두 닫고 잠든 것이 분명했다. 어제 하루 지낸 것으로는 그제 하루와 별 기온 차가 없었는데 그제 밤과 똑같은 여름 이불 두 장으로 잠들었는데 새벽녘 찬 기운이 상당히 느껴졌다. 기상 알람의 사나움이 울리기 전에 이미 의식의 눈이 떠졌다. '오슬오슬'에 가까운 차가움이 어수선하게 양 더수기에 느껴졌다. 아직 '으슬으슬'까지는 아니었지만 '차다'를 넘어선 '춥다'의 기운이 제법 스며 있었다.

 

온몸에 젖어 드는 찬 기운이 제법 힘이 있더라는 것이다. 일주일만 더 덮고 교체하려던 여름 이불 두 장을 어서 교체해야 하는가. 비몽사몽 중에도 고민했다. 6시 기상 알람을 끄고도 십여 분 더 누워있고 싶은 생각으로 이불 속을 지키려 들었으나 점점 더 크게 느껴지는 찬 기운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일어나야만 했다.

 

그래, 이유가 있지. 있고말고. 분명히 문단속을 철저히 했는데 하룻밤 새 이렇게나 강력하게 추위가 모아질 리 없다. 재빨리 일어나 앉아 커다란 머플러를 목에 두르고 일어나 살펴보니 분명 닫아뒀던 뒤 베란다 쪽의 문이 열려있다. 그 너머 실외로 향하는 유리창은 완전 누드 상태. 드넓은 거실을 자는 내게 찬 기운이 이길 수밖에 없었다. 자정 넘도록 술을 드시고(?) 오신 남자가 술 기운으로 문을 열어두고 주무신 것이다. 그 시각 이미 이불 속에 있던 나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 

 

이런 종류의 의상이 지금 필요하지 않을까, 나와는 영 거리가 먼,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그건 그렇고, 찬 기운과 싸우면서 이불 속에서 고민한 것이 오늘 입을 의상이었다. 블랙, 블랙, 블랙...... . 닥치는 대로 입으면 되는데 아침저녁으로 가을이  쑥 밀고 들어오는 간절기이고 보니 건강도 걱정되었다. 이쯤 되는 시기에 꼭 독감에 걸렸던 기억. 서늘한 기운을 막아줄 의상이 걱정되었다. 어제 아침과 달리 오늘 아침은 유난히 기온 강하가 느껴졌다.

'이를 어쩐담. 일주일은 더 여름 옷 그대로 살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당분간 반팔의 옷을 고수하려고 했는데. 오늘은 분명 긴팔로 옷을 입어야 될 것 같은데 어떤 옷이 있지?'

 

생각을 뚫고 머리 속에 들어와 앉은 긴 팔 의상이 없었다. 간절기를 살아낼 가디건이나 가벼운 긴 팔 코트를 떠올렸으나 오늘 같은 날에 입을 수 있는 의상의 형태가 아니었다. 세상에나, '미니멀리즘'을 꿈꾸면서 거의 매일 고민하는 것이 '많은' 옷의 처리이다. 언니들로부터, 나와 함께 늙어가는 조카로부터 물려받은 무지막지한 의상들이 엄청나다. 지 지난 주였던가. 조카 결혼식으로 한양을 다니러 갔던 길에도 천사표 둘째 언니로부터 한 짐 옷을 가져왔다. 미인 인데다 미적 감각이 대단한 언니가 싸 준 옷이 열 벌을 넘는다. 하나 옷이라는 것이야말로 '안성맞춤'이어야 한다.

 

한양에 가니, 더군다나 결혼식에 가려니 내 의상이 문제였다. 둘째 언니는 자꾸 맘에 들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기우뚱하더니 체념한 듯했다. 결혼식장에 다 가서 언니는 차에서 내리려다 말고 값비싼(?) 가방에서 값비싼(?) 머플러를 선뜻 내줬다.

"애, 이것 두르렴."

내 눈에 쏙 들었다. 위아래로 입은 옷, 검은 요가 티에 둘러쓴 멜빵 원피스. 합해서 채 5만원도 되지 않은 의상이 몇백만 원은 된 듯 싶게 고가의 옷으로 변신하였다. 식장에 들어서니 신랑 어머니로 서 있던 손위 언니의 눈에도 내 의상은 별 문제로 보이지 않은 듯싶었다.

결혼식이  끝난 후 손위 언니의 말이 그랬다.

"애, 너, 머플러 언니 것이지? 머플러가 옷이며 니 얼굴이며 전체 모습을 확 살리더라야."

 

나는 여름이면 이런 형태의 블랙 원피스들을 잘 입는다. 물론 상의 티를 입고서! 참 편하다.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제 눈에 안경'이며 '마맛자국도 보조개'라고 했던가. 아무리 고가의 멋진 옷이라고 해도 내 눈에, 내 체형에, 내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그와 반대로 저가의 옷일지언정 내 눈에 들면 멋진 테를 두르지 않아도 눈에 맞는 안경이 되고 내 웃음의 가치를 천만 배로 살릴 보조개가 되는 법. 물론 내 온몸을 고가의 값이 되게 한 머플러는 결국 얻어오지 못했다. 알고 보니 프랑스 '루이뷔똥'이라던가 뭐라던가. 머플러를 욕심내는 내게 손위 언니가 그랬다.

"너도 양심이 좀 있어라. 그것, ◯◯이(둘째 언니의 딸)가 프랑스인가 어딘가 출장가서 자기 엄마 선물로 사 온 것이라더라. 선물받은 지 해도 넘기지 않았는데 벌써 니 것으로 만들려고 하면 되겄냐?"

갖고 싶다는 간절함을 표시하여 '마맛자국도 보조개'가 아닌 제대로 된 물건의 가치를 내가 판단했으므로 천사표 우리 둘째 언니는 다음 해에는 내게 그 머플러를 넘겨줄 것이다. 오늘 반팔 의상에 그 머플러 좀 있었으면 참 좋았으련만.

 

어쨌든, 이 많은 의상들 중 갑자기 서늘해진 기운을 함께할 의상이 없다니 이것이 뭔 부조화인가. 아무리 둘러봐도 찾을 수 없었다. 대체 이게 뭐람. 적절한 의상 찾기를 포기하고, 어제, 일요일을 반 팔로 외부활동을 한 남자로부터 여름 반 팔 옷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말을 듣고서는 안심했다. 재빨리 지난 주에 입었던, 간편한 여름 의상으로 출근했다. 일만 오천 원짜리 블랙 요가용 티에 강남고속터미널 지하상가에서 구매한 단돈 삼천 원짜리 블랙 통 바지.

 

활기차게 걸었다. 걸리는 것이 없었다. 거침없이 걸었고 씩씩하게 걸었다. 요 며칠 달걀판 위아래로 일백 개씩 걷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후 내 육신의 강도가 상당한 수준으로 향상되었다. '향상'이라니. 영 멋쩍게 느껴지는 이 불편한 언어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쨌든 더 나아진 내 허벅지의 강인함을 무기 삼아 빠른 걸음으로 출근길을 정리했다. 온몸 가득 열기가 차올랐다. 일터에 도착해서는 결국 에어컨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였다. 아직 여름 기운이 드센 날이었다. 자꾸 거금을 들여서 사 왔다는 둘째 언니의 머플러에 대한 소유욕이 내가 지닌 탐욕의 경계선을 뚫고 일어서려 한다. 기다리자.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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