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시 5분 기상.
장맛비인지 우기의 비인지 새벽녘 빗소리는 내 청신경까지 덮쳤다. 의식이 인지했는지 아니면 인지하고자 하는 세포의 경련이 먼저 인 것인지, 어쨌든 재빨리 눈을 떴다. 휴대폰으로 시각을 확인했다. 5시 5분. 요즘 심해진 건망증은 돌아서는 순간 잊히는 사태가 되어버린 것을 아는 바 5라는 숫자가 둘이서 나란히 찍힌 폰이 참 고마웠다. 그래, 오늘 아침 일기에는 정확하게 내 기상 시각을 쓸 수 있겠구나 싶어 기뻤다. 상황을 정확히 전달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가를 며칠 전 정통으로 새삼 깨달은 적이 있어 기뻤다. 내 앞으로 펼쳐질 생은 '5가 둘 나란히' 같은 형식으로 진행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5'가 문제가 아니었다. 어젯밤 잠에 들기 전 뒷베란다 창을 닫았는지, 앞 베란다 양쪽 문을 닫았는지 한참 동안 내 지나간 행위를 되돌려보니 다행이었다. 어제 오후 우리 지역과 이웃 지역에 많은 비가 내린다는 것을 확인했고 나는 차분하게 큰 비에 대한 준비를 한 후 잠들었다. 마음이 편안하게 눕자 순간 갈등이 거듭되었고 결국 6시가 다 될 때까지 인터넷 뉴스를 이것저것 검색하고 말았다. 내 좋아하는 록 가수의 영상을 보면서 뉴스 검색이 시작되었다. 그 영상은 결국 몇 연예인들 관련 뉴스로 알고리즘이 형성되어 나아갔고 지금 이 순간 단 한 가지도 떠오르지 않은 연예인 몇 뉴스를 읽었던 듯싶다. 읽었던가. 그래, 천하에 불필요한 것은 연예인 걱정이다. 맞다. 맞아. 그러나 아무튼 오늘 새벽 잘한 일은 오랜만에 내 가수 노래를 들은 것이라 치자.
장대비 속을 걷기 위해 정해진 옷차림, 가장 쉽게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옷차림이면 되었다. 너무 편해서 고맙기 그지없다. 오늘 아침 출근을 위한 준비는 그러므로 거침없이 진행되었다. 6시 20분을 조금 넘은 시각에 집을 나섰을까. 아침을 길게 걸었다. 일터 100미터쯤에서 폰을 보니 6시 42분. 일기에 그대로 옮기기 위해 '6 곱하기 4는 24'로 외웠다. 왜? 24가 돌리면 42이다. 24분에 도착할 리는 없으니까 돌리면 42. 길게 뺑 돌아서 일터로 가는 길을 걸었다. 평소 가는 코스의 세 배 정도의 길이었다. 그 길 끝, 아마 기타 연습 중이실 것이라고 예감했던 경비 할아버지는 손수 부지런히 가꾸고 계시는 화초의 전잎들을 쓸어 담고 계셨다. 새벽녘 강하게 그러나 형태도 없이 화초를 치고 간 바람이 할아버지는 얼마나 싫으셨을까. 묵묵히 전잎 혹은 쌩쌩하더라도 그만 찢겨버리고 만 잎이며 스러진 꽃들을 쓰레받기에 담으면서 할아버지는 혹 자기 생을 담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 나의 지나침도 눈에 담지 못하시는 듯싶어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일부러 두 발을 차례로 소리 내어 부리면서 사람 흉내를 냈다.
기타 연주 연습을 하셔야 할 텐데 이놈의 비 때문에 못하시는 것이 안타깝다는 내용의 머리 굽실형(?) 인사였다. 계단을 오르는데 자꾸 부실함이 여실한 할아버지의 어깨가 떠올랐다. 이내 '육체노동'으로 생각의 고리가 이어졌다. 알고리즘도 제 딴에는 지능을 재주 부리는 것인지 이어 뇌세포로 하여금 코엔 형제를 모셔왔다. 주인이 영화를 얼마나 좋아하는가를 인식하고 있다는 듯 거침없이 코엔 형제의 영화 한 편도 영상 돌리기로 시도하고 있었다. 연이어 토미 리 존스, 하비에르 바르뎀의 얼굴이 눈앞에 서 있다. 토미 리 존스를 좋아하게 된 이유가 이 영화였고 하비에르 바르뎀을 기록상 내 '연인 리스트'에 올린 것도 이 영화였다. 나는 언젠가 이에 대한 글도 꼭 써 보고 싶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떡 하니 내 앞에 서 있다. 내가 본 영화 리스트 10위 안에 굳건히 그리고 영원히 서 있을 이 영화. 이번 주에 이 영화를 꼭 다시 한번 봐야지 싶은데 과연 될는지. 아마 적어도 다섯 번째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어제 그림 한 장을 끝내고 누구를 그릴 것인가를 고민하던 차인데 바르뎀을 그려야 되겠다는 생각을 동시에 하게 했다.
경비 할아버지 덕분에 이 아침에 나는 내 생을 위한 영화 한 편을 구상하고 제목을 만든다.
<노인을 위한 나라를 꾸리겠다>
경비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연유한 것이며 어제 본 영화 <행복의 속도>가 내게 명령한 내 임무이기도 하다. 노동. 영화 속 두 젊은이들의 일은 '봇카'이다. 우리 식으로는 지게꾼. 몇십 킬로그램의 무게를 등에 지고 해발 1500 미터 상공에 있는 산장(등반객들을 위한 휴게시설)에 도보로 짐을 운반하는 직업. 몇 젊은이들이 진 짐은 끔찍할 정도이다. 어찌 저 무거움을 지고 산을 오른단 말인가. 젊은이들은 지게에 짐을 쌓아 올린 후 등에 지고 일어서는 것조차 무지 힘들다. 어찌 저찌하여 가까스로 일어선다. 그리고 한 발짝을 내디딘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들은 지면에 수직으로 서서 산을 오른다. 어떻게 저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한 젊은이는 힘이라고 했고 또 한 젊은이는 균형이라고 했다. 둘의 화합이리라. '힘'과 '균형'의 융합.
영화를 보는 내내 내 생을 돌아봤다. 느린 사진으로 지나가는 내 생은 그야말로 아무 일도 아니었다. 내 알량한 지적 재산을 파는 것이다. 얄팍하기 짝이 없다. 어설프게 쌓아 올린 지식의 탑은 아기 발로 한 발 툭 쳐도 우수수수 스러질 상태라는 것을 잘 안다. 이 평생을 읽고 쓰고 경험한 것들인데 왜 이렇게 얇고 여리고 무기력할까.
노동이 없어서이다. 육체노동의 부재 때문이다. 쓸고 닦고, 못을 박고 못질하고, 싸매는 등을 일을 한편 병행했어야 했다. 무릎에 시멘트 바닥이나 거친 흙에 씻겨나가는 상처를 꽃피우게 해야 했다. 상처 위에 얼굴을 내민 붉은 핏기를 눈에 심어야 했다. 그 붉은 핏기에 서린 노동의 진미를 맛봐야 했다. 노동의 아픈 두께와 아픈 추상의 부피를 내 읽고 보고 느끼고 쓴 것들에 더해야 했다. 하여 창조의 힘을 만들고 그에 따른 혼과 육의 혼합물을 생성해야 했다. 요즈음 학계에서 시대 조류로 내세우는 '융합'의 길을 영과 육의 조합으로 만들어냈어야 했다.
지나온 내 생을 떠올려 보니 한없이 초라하다. 한없이 부끄럽다. 하여, 늘 해 오던 생각을 철저하게 굳힌다. '노인을 위한 일자리는 있다'를 만들 생각이다. 퇴직을 한 후 나는 꼭 온몸을 움직여서 소득을 얻고 내 육신의 단단한 힘으로 육체노동을 할 것이다. 꼭! 이를 위해 건강을 철저하게 키우고 지킬 것이다. 열심히 근육을 만들고 든든한 힘으로 생을 움직이는 시간을 단 몇 년이라도 살아볼 생각이다. 마침내 건강한 삶을 나는 정년 후에 꼭 살아내고 싶다. 참 인간다운 생을 살아볼 생각이다.
글이 강을 만들어 흘렀다. 마구마구 흘러내려갔다. 대체 무슨 글이지? 그야말로 중구난방이다. 주제가 뭐지 싶다. 위 글은 거의 아침에 써 뒀다. 이제 집에 돌아와서 아침 글을 돌본다. 자상함으로 글을 다시 살피기에는 내 영이 맑지 못하다, 지금.
5인조 동료들 회식이 있었다. 식도는 노쇠해가는데 그곳을 흐르는 알코올의 기운만 새삼 싱싱했다. 둘의 균형을 맞춰야 해서 '느림의 미학'을 철저하게 실행했다. 자칫 서두르다가 밀란 쿤테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행하고 마는 것인지 두려웠다. 사실 알코올에 의지하지 않을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마구 쏟아내 버리기에는 내 살아온 삶의 무게가 결코 얄팍하지는 않은데 나는 늘 무엇이 이리 두려울까. 어서 힘차게 머리를 말리고 자자. 하루가 마감되어 간다. 현재 밤 11시 42분! 인간이라면 대부분 잠들어 있어야 될 시각이다. 그대, 진정 인간이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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