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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내 어머니의 언어

뉘가 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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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가 난다고여야. 니가 난다고가 아니어야. 뉘가 난다고 뉘가 나.'

 

저 흰 쌀 사이 뉘가 섞여 있다고 해 보자. 그것도 한둘이 아닌~, 옛날에는 그랬노라고 우리 엄마가 말씀하셨네. 흰 쌀알 사이 섞여있는 뉘가 징그러워 일상에서 징헌 일이 생기면 '뉘가 난다'고 하게 되었단다.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가끔 아주 가끔, 엄마는 혼잣말처럼 몇 마디 말을 늘어놓으셨다. 단 몇 마디였다. 늘 천장을 보고 계셨다. 무엇을 생각하고 계셨을까. 바다 건너 친정 부모님을 떠올리고 계셨을까. 

'아이고. 삭신이야. 비가 올랑갑다야. 온몸이  찌뿌두웅허니 애린다야.'

나는 조금 전, 오후에 봤던 하늘빛을 떠올리면서 내일 하늘의 밝기를 예견하고 있었다.

'내일은 하늘이 거무튀튀하겠구나. 우리 엄마 삭신이 쑤시는 날은 거의 그렇지. 내일은 밖에 나가려면 우산이라도 준비해야 할까."

 

각자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딸과 어미는 각자의 하늘, 각자의 땅을 쳐다보고 살고 있었다.

"엄마, 적당히 해요. 큰 오빠며 큰 딸 잘 살고 있는데 왜 그리 고생을 사서 하는 거예요? 이제 그만 좀 하세요. 일!"

"아이, 니 오빠, 니 언니 이제 제집 살림 났는디 우리가 덕 볼라고 덤비면  쓰겄냐? 즈그 잘 살먼 되지."

"뭐, 좀 어때? 엄마가 고생해서 저리 잘 되게 키웠으니 이제는 엄마가 좀 받고 살아야지. 안 그래?"

"어이쿠. 속이 없다야, 속이 없어. 어서 공부해서 니 앞길이라 잘 열어라. 큰 오빠나 큰 언니 바라볼 일 아니다야. 아직 덜 큰 니들 아직 있는디 어찌 내가 쉬겄냐? 더 좀 해야제."

 

밴댕이 속처럼 좁았던 나는 왜 우리 큰 언니와 큰 오빠는 한양 땅에서 저리 잘 사는데 우리 엄마와 아부지와, 나와 동생의 삶은 여전히 박박 기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일찍이 한양 땅에 자리 잡은 내 위 사람들은 참 고급스럽게 잘 살고 있는데 우리는 왜 이리도 일상이 험한지 모를 일이구나 싶었다.

"엄마, 근디 니가 난다는 것이 뭐야?"

"니가 아니고 '뉘'여야. '뉘'가 난다고."

"나는 니 난다고로 들었는데 뉘가 난다고요? 그럼 뉘가 뭐래요?"

"방앗간에서 나락 도정할 때 말이다. 옛날에는 요즘 같지 않아서 '뉘'가 많이 섞여 있었어야. 껍질 벗겨지지 않은 쌀, '등겨'말이다. 그런 쌀로 밥을 해 먹어봐라. 까딱하믄 까시락한 것이 입에 씹혀."

"그냥 뱉어내면 되지. 뭘, 뉘가 난다고 그런다요?"

" 좋은 밥 먹는디 그래사 쓰겄냐? 영 아니지야. 옛날에는 또 많이도 그랬어야. 징허지야. 그래서 생긴 말이어야. 살아감스로도 닥친 일이 징하면 뉘가 난다고, 뉘 난다고 말하지야."

 

가만 생각해 보니 우리 엄마는 밥 먹다가 시어머니며 시동생들과 남편, 자식들이 징헌 상황을 맞이할 것에 대비해서 늘 뉘를 가려내는 잔손질을 하셨을 거다. 눈만 뜨면 태산인 것이 일더미인데 매 끼니 작은 벼 알갱이까지 걸러내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오늘은 나도 만사(萬事)가 귀찮았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터졌다. 두 손 꽉 쥐어 싸서 패대기를 친 인간이 있었는가 하면 패대기를 당하여 꼬라 박은 인간이 있었다. 나는 이를 해결해야 했다.

'전생에 내가 뭔 죄를 지었을까!"

한탄하면서 떠올린 낱말이 이것이었다. 문장이 다음이었다.

'아이고 뉘가 난다, 뉘가 나."

단발성 일이 한 번 터졌다고 이를 못 이기고 넌더리를 치는 나를 내려다보시면서 우리 엄마가 혹 덧붙이지 않으실까.

"아이, 너 그리 쬐그만 일에도 물린다고 지긋지긋해 하는디 내 생은 어쨌겄냐? 참고 살아라. 잘 견뎌 봐. 사람 사는 것이 다 그렇고 그렇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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