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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음악

동요 '아빠의 얼굴'을 듣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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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요 '아빠의 얼굴'을 듣는 아침.

 

 

동요로 검색하여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악보로는 어려운 노래인 듯싶다. 무슨 노래일까.

 

 

 

 

아침 출근길을 동요 '아빠의 얼굴'로 걸었다. 나는 모든 음악을 가리지 않고 듣는다. 때로 많은 일에 부대끼면서 정신 산란한 나날이 진행될 때면 동요를 듣곤 한다. 요즈음 그렇다. 정신없이 바쁘다. 나이 들고 디지털의 미친 속도와 나란한 걸음을 걸을 수 없어 날로 첨단으로 내닫는 시기를 허우적거려야 하는 나는 참 세상이 슬프다.

 

오늘 아침은 호흡이 가빴다. 물리적인 호흡이 문제라면 가슴 가볍게 두드리면서 다독거리면 잠시 후 해결될 일인데 영혼의 호흡이 고되다며 혀를 내두르는데 눈앞이 흐릿해졌다. 이를 어쩐담. 어서 일어나 준비하고 집을 나서야 하는데. 그래야만 퇴근 시각에서 한 시간 안에 일터를 나설 수 있을 텐데. 기술의 발전 리듬에 발맞출 수 없으므로 남보다 빨리 일터의 일을 시작해야 한다.

 

 

 

출근으로 검색해서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내 출근길을 이렇게 화려하지 않다.

 

 

 

지난해까지는 남보다 열대여섯 걸음쯤 어서 출근하면 아침 일기를 쓰느라 내심 뿌듯했다. 의식적으로 스스로 든든함을 매만지면서 걷는 걸음이 그렇게나 가벼울 수 없었다. 아침이면 매일을 새롭게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그것들을 아침 일기 소재로 초안을 써서 임시저장을 해뒀다가 자정 가까울 무렵 가볍게 편집하여 수정하고 추가하고 맞춤법 절차를 거쳐 이곳 블로그 글을 올리면서 많이 행복했는데.

 

한 해 숫자가 더해지면서 나의 뇌세포는 급한 노쇠의 길 위에 오른 것일까. 요즘 아침이면 아직 덜 깬 뇌세포들을 일일이 머리 쓰다듬어가면서 일으켜 세워야 할 만큼 정신이 축 늘어져 있다. 더군다나 매일 급박하게 나를 조여 오는 일들이 내 일터 근본적인 일, 즉 내가 진짜로 해야 할 전문적인 일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즉 거의 불필요한 일이며 허울 좋은 둘레를 치장하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이다.

 

무엇보다 이 불필요한 일들을 일터 내내 진행된 생을 계속해 왔다는 것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을 할까? 아니다. 비겁한 이유이다. 이 긴 날을 하라는 대로 해 왔다는 것으로 봐서 내 안의 나는 남 앞에 정의로운 나를 드러내는 것을 진즉에 포기했다는 거다. 생사를 걸고 해 왔다는 생각에 미치면 이런 내가 얼마나 초라하고 한편 불쌍하고, 그리고 무능함인지.

 

 

 

출근길로 검색하여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내 출근길은 이렇게 사람 많고 드넓은 길도 아니다.

 

 

사실은, 나름 하느라고 해왔다. 나는 당신들이 내게 요구하는 것들의 기본만 하리라고 다짐하면서 살았다. 이를 실체화하면서 살기 위해 애는 썼다. 그러나 월급을 타면서 살아야만 되는 이 요사스러운 낱말, '전문직'이라는 것이 결국은 저 윗선이라는 자들이 요구하는 길을 열심히 닦지 않으면 아니 되더라. 해야만 했다고 구실을 댄다. 욕먹을 각오를 하고. 고작 그 정도의 용기를 어디에 쓰겠느냐고 내게 삿대질한대도 나는 흐뭇함을 절대로 표시하지 않는다는 범위 내에서 고개를 주억거려 동의해야 한다.

 

아침, 아직 덜 오염된 기운을 어서 만나기 위해 동요를 들려줘서 일어나게 했다. 아직 앞으로 걸어가는 것을 기준으로, 나의 뇌 저 뒤쪽 오른쪽의 어느 뇌세포 몇 녀석은 아직 일어나기 싫다고 잉잉거리고 있다. 나는 애써 몸을 뒤집어 시선을 회피한다. 어서 따라오기를, 어서 자기 집을 좇아 열심히 내 몸뚱이를 쫓아오기를. 어떤 녀석은 자기 혼자 몸으로, 자주적으로 생활하고자 하니 아침부터 귀찮게 하지 말라고 위아래 두 입술 위에 붙어 퉁퉁 불려 저항한다. 그리고 또 어떤 녀석은 간섭받지 않은 생을 좀 살고 싶노라고 아우성을 친다.

 

 

 

출근으로 검색하여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이 어린이에게는 출근길일 수도 있겠다. 평온함이 깃든 어린이의 학교에 가는 길이 참 이쁘다.

 

 

그래그래, 너희들도 어쩜 한 생명일 텐데 내가 억지를 부리는 것은 옳지 않다 싶어 듣고 있던 동요의 볼륨을 낮춘다. 한낱 비루한 내 몸뚱이에 사는 그대들에게 내가 기생하는 것이지 않나 싶어 미안스럽다. '아빠의 얼굴'이라. 한때 세상을 멋지게 수놓던 음악이 동요이기도 했다. '창작동요제'라는 것이 생기면서 일어난 대한민국의 음악 시장에 '동요'가 제대로 리듬을 타고 세력을 일으켰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어른이 되기 위해 몸 바쁘던 나는 그 시류에 적극 올라탔다. 내가 동요에 올라탔기보다는 동요가 나를 이끌었다. 여러 동요가 마구마구 나를 끌고 다녔다. 동요 속에서 빛바래져 가는 내 생을 다시 보곤 하게 했다. 대중매체가 있질 않아서 학교에서 배우는 음악 말고는 노래라는 것을 자주 들을 수 없는 세상을 살았던 어린 시절의 나를 음악이 들춰보게 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런 세월을 얼마쯤 지나 결혼을 하고 나의 아이가 태어났다. 제 어미와는 전혀 닮지 않은 내 아이의 운동 기능은 씩씩하게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나는 퇴근 후 틈만 있으면 늘 아이의 손을 잡고 길을 걷곤 했다. 그때 유독 많이 내 목소리로 내 아이에게 불러주었던 동요가 '아빠의 얼굴'이었다. '화가', '노을', '아기 염소', '섬집 아기', '우산', '하늘나라 동화', '겨울밤'이라는 동요들의 제목이 함께 떠오른다. 내 아이는 그 시절을 기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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