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섣달 기나긴 밤을 앞두고 당신을 모셔왔습니다.
동지섣달 기나긴 밤을 앞두고 당신을 모셔왔습니다. 어찌 지내시는지요? 펑펑 펑펑 함박눈이 내렸습니다. 멀거니 함박눈을 바라보고 있으니 아련히, 어린 시절의 겨울날들이 떠올랐습니다. 함박눈 한 주먹 입에 넣으면 배부르겠다던 당신. 나는 당신 앞에서 당신의 주신 언어 한 줄로 이미 부른 배 두드렸던가요.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왔습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 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윤동주의 <누나> 1936.12. (추정).
하필 오늘 아침에 읽은 시가 윤동주의 <편지>였습니다. 시 속 화자의 상대인 '누나'의 자리에 '엄마'를 넣어 시를 읽었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 뽀독뽀독, 말끔해지도록 닦아가면서, 천천히 여러 번을 읽었습니다. 당신 가신 그곳에도 눈이 아니 오는지요? 그곳 소식 아는 이, 혹 다녀온 이, 누구 있는지 찾아봐도 만나볼 수 없고 나 당신의 지금 거주지 정확한 주소를 알 수 없으니, 수신처를 적을 수 없어 편지를 쓰는 것도 망설여집니다.
부실하던 연필, 흑연 심지 진하게 써내느라 고군분투하던 당신의 막내딸이 글씨를 쓸 때면 당신은 늘 그러셨지요.
"서당 훈장 우리 아부지가 나를 얼마나 이뻐했는지 모른단다. 영리하다고~"
끝맺지 못하는 문장이 안쓰러워 얼른 고개 돌리시고 하시던 일에 몰두하시던 당신. 그곳에서는 마음껏 글씨라도 좀 쓰실 수 있었으면.
당신과 내가 나누는 편지는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이 세상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될 비밀이 오가게 될 것이기도 할 텐데요. 혹 잘못 전달되면 아니되기에, 쉽사리 연필 들어 글 몇 줄 쓰는 것도 머뭇거려집니다. 어찌 편지라도 한줄 써서 붙이면 오늘 먹은 팥죽 붉은빛을 보고 솟구쳐 오르던 울컥함을 달랠 수 있을 텐데요. 그 편지 당신이 읽으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늘 점심 식사에 일터 급식으로 팥죽이 나왔습니다. 우선 반가워 한 그릇 가득 달래서 먹었습니다. 당신이 손수 만들어주시던 그 맛을 떠올린 것이 문제였나 봅니다. 이곳 식당에서도 온 정성을 들여 요리했을 텐데, 당신의 맛이 내 혀 안에서 아직 이울지 않아 그저 밍밍했습니다. 무슨 맛인지 모르겠노라는 말을 내뱉게 될까 봐 함박웃음 늘 활짝 피어있는 영양사 선생님을 얼른 피해 나왔습니다.
내리는 눈을 멀거니 쳐다보면서 한 겨울 기나긴 밤을 말짱하게 지새우던 동지섣달 새하얀 밤이 생각났습니다. 자식들 생각으로 늘 한숨 보따리 머리 위에 지고 사시던 당신, 당신이 쒀 주시던 찹쌀 하얀 새알심이 떠올라 당신의 너절하게 헐어있던, 겨우살이를 살아낸 손 두덩을 떠올렸습니다. 그 큰 농사일 살림에도 어느 절기 어느 명절 단 한 번도 소홀하지 않으셨던 당신. 대체 어떤 신의 보조가 있었기에 그 사납고 가파른 길을 살아내셨는지요.
오늘 새벽 당신은 분명 부엌 살강 위며 장독대며 대문 안팎이며, 뒷간, 외양간 등 집안 이곳저곳에 붉은빛 팥앙금을 뿌리고 손 비비셨겠지요. 신령님이시여, 신령님들이시여. 내 새끼들, 내 서방님, 살펴주소서, 살펴주소서. 장독대 항아리 쓰다듬는 신이시여, 우물가 표주박 신이시여, 대들보 성주신, 안방 조상신, 집마당 터주신, 우물 용왕신, 광에 업신이, 뒷간에 측간 신이시여, 외양간에 외양간 신, 뒤꼍 관장 천룡 신, 부뚜막신 조왕신이시여, 그리고 이 모든 신을 총대 메고 관리하는 가택신이시여. 내 새끼들 좀 잘 봐주소서. 잘 좀 봐주시오. 목욕재계하시고 하연 소복에 엄동설한이 뼈까지 사무치셨겠지요.
무엇이 이리도 바쁜지 당신 막내딸은 아들내미 하나 키우면서도 팥죽 한번 쒀서 먹게 하지를 못했네요. 군대 밥에, 밀키드를 시켜 삼시 세끼 채운다는데요. 오늘 같은 날 당신이라면 만사 제쳐두고 아들 동지죽 먹이겠다고 길 나섰겠지요. 바리바리 싸서 들고 아들 곁으로 달리셨겠지요.
그곳 생은 어떠신지요. 당신이며 우리들의 수장으로 군림하셨던 당신의 남편은 어찌 계시는지요. 여전히 당신이 해서 바치는 삼시 세끼를 소화하고 계시는지요. 아니면 가신 날은 같으나 가신 해가 달라 멀리 먼 곳에서 전해오는 소식만 전해 듣고 계시는지요. 하늘처럼 받들어 모셨던 당신의 남자, 그곳에서는 꼭 당신을 만나면 얼레 설레 업고 다니시길 간절히 비옵니다. 물론 등에 업히라고 하면 당신은 그러시겠지요. 여자가 남정네 등에 올라가면 뭔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오른다요. 그런 파행은 내 생전에는 없을 것이오.
며칠 전 텔레비전에서 소설가 김영하 님이 말씀하시더군요. 통계학적으로 알려진 평균수명이요. 이를 듣고 또 당신을 떠올렸다지요. 평균수명이 가장 긴 직종은 종교인이라더군요. 아내 걱정, 남편 걱정, 자식 걱정할 일이 없어, 가족 챙길 필요 없어 그런다더군요. 당신은 그렇다면 제법 많이 사신 셈이 되겠지요. 일흔여덟 생을 사셨으니까요. 당신이 간수해야 했던 인간들을 숫자로 헤아리자면 한참 걸릴 테니까요.
당신의 죽음을 떠올릴 때면 당신과 동년배이신 시어머니가 함께 떠오릅니다. 나 상견례 때 이미 허리 굽으셨던 시어머니에 비해 허리 꼿꼿한 옥색 한복 저고리 치마의 당신은 처녀처럼 고왔지요. 굽은 허리, 쭉 펴진 허리가 무슨 소용이겠어요. 그런 당신은 벌써 오래전에 그 나라로 가셨는데 시어머니는 아직 살아계십니다. 아마 키워내야 했던 자식 사람 수 때문이겠지요.
찹쌀 경단 새알심을 꼭꼭 씹으면서 먹으라던 당신. 살살 녹을 것처럼 부드럽지만 이게 그만 간사스러워서 막내딸 작은 몸이 소화해내지 못할까 봐 노심초사 꼭꼭 꼭 씹어서 삼키라던 당신. 오늘도 당신 간절한 눈빛으로 하시던 말씀 생각나 찬찬히 씹어 야무지게 먹었습니다.
동지섣달 긴긴밤. 당신이 들려주시는 당신의 옛날 옛적. 고릿적 이야기를 밤새워 듣고 싶습니다. 그곳에서는 부디 아프지 마시고요. 일 좀 내려놓으시고요. 오직 당신 자신만을 위해 사시길.
2022년 12월 22일 당신의 막내딸 드림
- 오늘은 저녁에 쓴 일기이다. 아침에는 너무 먹먹하여 글을 쓸 수 없었다. 윤동주의 시는 현재 맞춤법으로 고쳐 썼다. 그것이 결코 옳은 일이 아니지만.
'라이프 > 하루 공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얼 먹고 사나 (34) | 2022.12.24 |
---|---|
늙은 소녀의 겨울 이야기 (40) | 2022.12.23 |
아가씨, 아가씨! (44) | 2022.12.21 |
리오넬 메시 그리고 킬리안 음바페. 둘이서 춘 더블 댄싱 무대는 황홀했다 (15) | 2022.12.19 |
모처럼 여유로웠던 일요일이었다. 왤까? (13) | 2022.1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