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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하루 공개

늙은 소녀의 겨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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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소녀의 겨울 이야기

 

 

 

 

 

 

눈이 내리네 1

 

 

눈이 내렸다. 밤 열 시 앞뒤 일터 카톡이 분주했다. 내일 어떻게 할까요? 몇 시까지 나갈까요? 아무래도 출근 시간이 문제일 것 같습니다. 어서 정리를 좀 해주십시오. 밤새 쌓이면 엄청날 것 같습니다. 내일 00에 사는 사람들은 정상 출근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럼 내일 10시까지 출근하기로 합니다. 00에 사시는 분들은 사고 나지 않게 하십시오. 조심조심 건너오십시오. '조심조심 또 조심'을 알리는 문구와 그에 맞대응하는 메시지가 한 시간여 오갔다.

 

 

동안 나는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상관, 말하자면 내 윗사람일 수 있는 이로부터 온 전화를 받았다.

"카톡 보고 계시지요?"

"아니~"

늘 조용한 남자다. 그는 아무리 급한 소식을 전해야 할 경우라도 흔들리지 않는다. 굳센 자존심이 그의 주 무기이고 매력 포인트이다. 평소 말하던 투의 수준을 틀림없이 유지한다. 그가 말을 건네온다. 내가 미처 '아니오'라는 말을 내놓을 겨를도 없이 그이가 말한다.

 

 

"내일 10시까지요."

"예? 지금 볼게요. 아, 내일 10시요?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제 쪽은 제가 알리겠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조용한 남자가 지금 카톡을 보고 계시냐고 물었다는 것은 카톡 번개팅이 한참 전에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다음 문장을 굳이 엮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바쁘게 내 쪽 라인에 연락을 넣었다. 내일 10시입니다. 

 

 

아하, 반신욕을 하는 동안 핸드폰을 들고 들어가지 않겠노라고 굳게 다짐한 것이 이틀째이다. 덕분에 책을 육십여 쪽 읽었다. 뿌듯하다는 생각을 만끽할 여유가 없이 그의 전화를 받았다. 카톡을 열었다. 반신욕의 시작 즈음하여 저 윗선에서 톡 명령이 내려와 있었다. 이러, 이러하고 저러, 저러하니 내일 10시요. 전달해야 할 곳에 어서, 확실히 알리시오. 그래, 어제 오전에 눈이 쏟아진다는 예보를 읽었다는 본부 윗사람의 알림과는 달리 오전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

 

 

점심 즈음부터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꼭 따지자면 위 안내는 전부 틀린 것은 아니었다. 윗 상관이라는, 그분도 그랬다. 아침에 쏟아진다는데 오후에나 올 것 같습니다. 퇴근길에 느꼈다. 틀림없이 많은 눈이 내릴 것을 거무튀튀한 먹색 하늘이 예고하고 있었다. 그렇담 나는 어찌했어야 하겠는가.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고 있었어야지. 아무 생각도 없이 으레 하는 습관 그대로 반신욕을 시행했다. 이렇듯 나의 불찰은 곳곳에서 불거진다.

 

 

이곳저곳 소위 비상 연락망으로 '내일 10시'를 알리고는 밖을 내다보았다. 무서웠다. 하늘은 독기를 가득 품고 있음을 베란다 바깥문을 여는 순간 정확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새로 산 하얀 도화지의 얄팍한 세로 변이 내 얼굴에 달려들어 직선을 그려버릴 것 같았다. 줄줄 붉은 액체가 볼을 타고 흐를 것 같았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사람처럼 재빨리 바깥 기운과 담을 쌓았다. 쾅, 문을 닫았다. 그러나 곧 다시 열었다. 내가 사는 이곳, 이곳에서는 쉽사리 볼 수 없는 진풍경을 필름에 담아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얼굴에 달려드는 바람이 지닌, 날 선 연장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역사의 현장에 선 목격자처럼 대기를 향해 폰을 열었다. 역사는 실시간에 완성된다. 찍어야 한다. 눈이 내리는 밤을 영상으로 담았다. 눈 깜짝할 새의 십만 분의 1 정도를 소비한 듯, 빠르게, 초 가속도의 열기를 더하여 바깥 몇 풍경도 폰에 담았다. 진풍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역사적인 새날의 퇴적이 진행되고 있었다.

 

 

뒤늦게 쓴 일기를 정리하여 올리고는 자정이 되었다. 이불 속으로 들어가려니 어릴 적 비닐 장판이 노릿해질 정도로 뜨거웠던 겨울 아랫목이 떠올랐다. 그래, 이런 날은 난방을 최고조로 움직이게 하자. 노곤노곤하게 온몸을 지져야 한다. 한 시간 정도 운행했더니 실내에 열기가 차오른다. 아니다. 난방을 껐다. 이쯤에서 멈추는 것이 녹록하다. 현대를 사는 몸은 어느 것 하나 예민하지 않은 것이 없다. 내 살덩이는 난방의 미세한 정도에도 예민하다. 나는 늘 예민하다. 적당한 온기여야지 조금만 지나쳐도 불면이다. 크림을 얼굴에 바르는데 어느 날 문득 눈에 띄어 젤을 발랐더니 잠 한숨을 못 잤던 날이 있다. 실내 기운이 너무 후끈 달아오르면 신체가 들떠 눈을 편히 못 부친다. 이런. 오만가지, 걸리지 않은 것이 없다. 물론 방 안 사람 아무리 난장을 치른다 해도 눈은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나 보다.

 

 

눈이 내리네 2

 

 

새날이 되었다. 밤새 눈밭에 대한 기대는 잠을 안 잤나 보다. 비몽사몽 오늘은 금요일이구나 생각하는데 아하, 눈이 쌓였겠으리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더해졌다. 활짝 눈이 떠지고 부지런히 준비하여 집을 나섰다. 10시 출근에 어느 정도 분위기는 맞춰야 하지 않나 싶어 여덟 시가 다 되어 집을 나섰다. 평소 7시 앞뒤 십 분 출근이니 이 정도면 충분히 경비 할아버지들께 미안해할 필요가 없을 듯싶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은 차라리 쉬울 수도 있다. 눈길은 특히 그렇다. 덜 미끄럽다. 여전히 순수이다. 사람 때가 묻지 않았다. 뽀드득, 뽀드득은 옛 의태어이다. 오늘 내게 들리는 순결무구, 나의 눈 밟는 소리는 사드득 사드득이었다. 저 연약한 눈, 차마 억세게 밟아댈 수 없어서, 나, 눈길 위에 내딛는 발자국의 첫 디딤을 정말로 사랑스럽게 걸음하였다네. 나, 부드러운 여자라네. 조심스레 걸었다는 것이다. 나는 겁이 많다. 바닥이 환히 보이는 길도 무서운데 멋모른 채 하얀 눈이 무작정 쌓인 길이라니. 길바닥과 흰눈 사이 묻힌 소리가 얼마나 두려운가 혹 아스라한가. 혹은 얼나마 안쓰러운가.

 

 

걷는 내내 눈이 함께 내렸다. 오늘은 가방을 짊어지지 않았다. 눈 쏟아지는 길을 패딩 코트, 즉 5단계, 두께며 부피 최고 레벨의 코트를 입었다. 어찌나 덩치가 큰지 온몸이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패딩 코트 앞서 걸으면 뻘쭘하게 나 추워죽겠다고 코트가 마련한 공간을 찾아 더듬어 내 몸뚱이가 따라 걷는 기분이었다. 셜록 홈즈의 추리극에나 등장할 법한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닌가.

 

 

내 몸뚱이가 본래의 내 영혼 위에 또 다른 영혼, 겨울에만 사는 내 영혼 한 가닥을 모셔와서 덧붙여 숨 쉬는 느낌이었다. 코트 패딩은 그다지 무거운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커다랗게 느껴지는지. 가방도 버리고 휴대폰만 들어 귀에 꽂아 유튜브를 들으면서 길을 걸었는데도 말이다. 아, 검은 우산도 들었구나. 모자를 써서 머리카락을 눌릴 수는 없었다. 내 최대의 약점이었다. 눌린 머리는 너무 싫다. 말하자면 치렁치렁 아래로 쭉 뻗어 내린 처녀 적 굵고 곧은 머리카락이 아니라는 것이다.

 

 

몇 걸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유튜브의 '삼 프로 오늘 아침'을 들었던가. 강의 내용이 슬펐다. 내가, 이 나이에, 기초도 없는 경제 공부를 해서, 뭔 돈을, 그 얼마나 부풀리겠다고, 이런 날, 이렇게 새하얗게 예쁜 날에, 무디고 건조한 채 빳빳한 내용을 들어야 하는가. 채널을 돌렸다. 정프로 정영진이 아무리 어리광조로 부드럽게 진행한 들, 내 사랑하는 이프로 이진우가 최선을 다해 자기 속내 억누른 채 부드러운 질문을 내던진들, 김프로 김동환 선생님이 우직하고 듬직하게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한들, 오늘 이 날씨에 어찌 시며 음악을 앞서겠는가.

 

 

<눈이 내리네>. 무려 열 가수가 부른 '눈이 내리네'가 담긴 영상임을 썸네일로 알 수 있었다. 그 누가 부른들 오늘 이 날씨에 어울리지 않은 '눈이 내리네'가 있겠는가. 원곡 가수인 이탈리아의 Salvatore Adamo의 목소리부터 시작되었다. <Tombe La Neige>. 그리고 이선희, 김추자 등에 심지어 나훈아와 윤수일도 목록에 있었다. 처음 듣는 목소리도 있었다. 평소 내가 즐겨듣는 가수와는 거의 거리가 멀었지만 모두 아름다웠다. 가는 길, 오늘 뿌리내려지는 역사의 뒤안길을 책임져야 했으므로 출근길 뒷골목의 눈이 내리는 모습도 영상으로 담았다.(나중에 살펴보니 쓸만한 영상이며 사진은 반도 되지 않았다.)

 

 

눈이 내리네 3

 

 

일터 큰 대문 경비 할아버지가 바로 도착하신 것 같았다. 큰 소리로 인사를 드렸다. 안녕하세요. 어, 어찌 이리 빨리 나오시나요? 눈이 내려서요. 허허, 어서 올라가세요, 춥습니다. 몇 발자국 걸으니 본관 담당 경비 할아버지도 계신다. 늘 나를 보면, '이상하지 아니한가, 저 여자?'의 눈빛을 숨기지 못하시는 할아버지. 오늘 몇 시까지 오기로 했나요? 10시요. 10시까지요? 그런디 어째 이렇게 빨리 나오셨습니까? 눈이 내려서요. 목적지에는 도착했겠다 긴장감이 풀린 나는 현관 앞에서 롱부츠를 쿵쿵 뛰게 하면서 신나는 모습을 지레 연출하였다.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소녀네요. 여전히 소녀 같네요. 언제나 소녀 같아요."

 

 

진심이시겠지요, 할아버지? 그래요. 저, 여전히 소녀랍니다. 늙은 소녀요. 저는 늙은 소녀랍니다. 눈이 내리네. 눈이 내리네. 당신이 가버린 지금, 눈이 내리네 외로워지는 내 마음, 꿈에 그리던 따뜻한 미소가 흰 눈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네. 눈이 내리네, 눈이 내리네.

 

 

늙은 소녀는 무려 스무 컷이 넘는 장면을 폰 필름에 담았다. 눈 내리는 모습이 최대한 정확하게 드러내는 곳을 골라 영상도 셋이나 찍었다. 소녀. 나는 작은 여자 소녀도 아니고 어린 여자 소녀도 이미 아니었지만, 마음껏 나를 누렸다. 충분히 늙어버린 소녀. 하기는, 몸집이 작으니 '작은 소녀'였다. 영원히 성숙하지 못할 것이니 여전히 '어린 소녀'였다. 눈이 내리네, 눈이 내리네. 눈이 내렸네. 늙은 소녀 있었네. 늙은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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