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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하루 공개

아가씨,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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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아가씨!

 

 

 

 

거짓말 조금 보태서 오늘 아침 나의 어둠은 이쯤 되리라. -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눈을 떠서 폰 날씨예보를 확인해 보니 영상으로 기온이 상승했단다. 플러스라는 것만으로도 내가 입고 나갈 코트의 레벨이 바뀔 수 있어 한결 몸뚱이가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내 코트의 레벨은 두터움의 정도이다. 이미 이곳에 쓴 것처럼 나의 겨울 코트의 레벨은 5단계로 나뉘어 있다. 맞나? 내가 어제 입었던 레벨은 점점 두터워지는 추세를 기준으로, 레벨 3이다. 이것도 맞나? 레벨 4 아닌가? 어쨌든 오늘은 레벨 3이나 2로 내려도 될 만큼 기온이 급상승했다. 급강하에서 느껴지는 야멸찬 기운이 급상승이라는 낱말로 자리를 옮기니 솜털이불이 주는 무게처럼 부드러움으로 바뀐다.

 

 

오늘 출근길 1

 

 

우선 상승 기온이 반가워 평소에 하던 버릇은 생략하고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니 머리 뒤로 빗소리가 내린다. 동지로 길을 가는 한겨울인데 빗소리가 상냥하다. 우산을 펼쳐 들고 길을 걸었다. 하얀 빛깔 섬섬옥수, 내 부드러운 손으로 빚은 내 운동화에 흙탕물이 튀길까 싶어 조심, 또 조심해서 발을 내디뎠다. 어제의 출근길 속도의 두 배로 풀어헤친 리듬이었다. 겨울비 내리는 새벽은 음산하다. 상승한 기온이 음산의 밀도를 늦췄겠지만 평소 일출 시각 이전이므로 새벽어둠은 촘촘하게 대기를 점령하고 있었다. 그런 길을 혼자서 걷는 묘한 기분은 맛보는 자만이 알 수 있다. 공포 혹은 두려움과 곧 다가올 낮은 밀도의 밝음에 대한 희망 혹은 안도감이 혼합하여 가슴을 헤집는다. 묵묵히 걷는 수밖에 없다. 운명처럼. 

 

 

"아가씨!"

아파트 큰 문을 나선 지 열댓 걸음에서였을 것이다. 미세한 어둠을 뚫고 진동하는 소리의 파동이 있었다. 몇 데시벨이나 될까. 제법 컸다. 

"......."

"아가씨, 아가씨!"

"아가씨, 아가씨!"

나, 내 오른쪽 뒤로 사선을 그어 2미터쯤 떨어진 곳으로부터 시작된 소리를 향해 이미 가 있는 귀를 포함하여 두 눈과 몸까지 몽땅 돌렸다.

 

 

내가 지나온 거리에는 사람이 없었다. 앞을 봐도 사람의 그림자는 눈에 잡히지 않는다. 그렇다면 저 목소리, 굵은 남성성은 지니고 있으나 한창 때는 지나 조금은 쇠퇴했다고 생각되는 소리를 향해 원통 굴리듯 온몸을 돌렸다.

"아가씨, ㅁㅁ ㅁㅁㅁ아파트 102동이 어디인지 아세요?"

"아, 잘 모르는데요. ㅁㅁ ㅁㅁㅁ아파트는 저기 아래 있어요. 이리 쭉 내려가시면 그 아파트 경비실이 보여요. 그곳에 가서 물으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비가 내리지 않더라도 아직 해를 볼 수 없는 이 시각에 분명 아주 급한 일이 있으시나 보다. 

 

 

할아버지가 확실했다. 키가 말쑥하게 크신 노인이셨다. 물론 미명의 어둠 속이었고 내 눈의 시력은 평균 저 아래에 걸쳐 있으므로 정확하진 않다. 확실하다더니 정확하지 않다? 이 애매한 판단도 아마 지금 이 날씨에 기인할 것이다. 때로 사람일은 이런 것도 같고 저런 것도 같다. 뭐, 때로에 한정되지 않는다. 사실 인간사 매양 벌어지는 일이 그럴 것이다. 이러기도 하고, 저러기도 하고.

 

 

일터 냉장고의 냉동실에 넣어둔 첫눈 눈덩이 - 이 짓을 누가 했느냐고 물어온다면? 왜 했느냐고 물어온다면?

 

 

 

푸후 후후 후훗.......

한참 웃었다. 조용한 웃음. 영화 제목 같은 웃음을 나는 풀풀 거리에 흘렸다. 오늘은 비가 내려서인지 지나치는 작은 공원의 운동기구에도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마냥 나만 활보하는 거리의 주인이 되어 있었다. 내 웃음은 길어지면서 마귀할멈의 노래가 되었다. 길흉화복을 다 지닌 노래였다. 마귀할멈은 자고로 제 영 안에 인간의 길흉화복을 지니고서 인간에게 하사할 준비를 하고 계시지 않나.

 

 

"아가씨!"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 몇 장면이 슬로비디오로 내 눈앞을 다녀갔다. 나 비록 김민희와 김태리는 아니었지만 몇 걸음은 김민희처럼 도도하게, 또 이어지는 몇 걸음은 김태리처럼 좁쌀 밟고 벌을 서는 기분으로 조심스레 걸음 하였다.

 

 

겨울비가 어린 시절 마을에서 면 소재지에 있는 학교로 가던 가운데 길을 갈 때처럼, 조심스레 징검다리를 걷는 보폭으로 땅에 내려앉았다. 조용히 사람들을 세상으로 나오게 하고 있었다. 매일 아침 같은 시각에 자기 집 대문 앞을 쓰시는 푸른 기와집, 허리 구부정할 할머니도 오늘은 조금 늦게 나오셨나 보다. 가는 비를 기꺼이 머리에 적시면서 대문 앞 낙엽을 줍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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