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하늘이 공허하다
잠을 설쳐야 맞다. 내 성격과 내 구차스러운 수면 패턴에 의하면 말이다. 새벽 서너 시 경이었을 것이다. 바깥 세상에서 일고 있던 현란한 바람 춤의 냄새가 내 잠든 코를 자극하였다. 후각 신경은 시신경을 깨웠고 눈을 뜨고 일어나 앉았다. 자세가 고정되었다. 세상이 뒤집어 버릴듯하였다. 광풍이 그린 회오리의 중심에 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숨을 죽이고 내 묵힌 죄를 사해 받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데 순간 정적이 일었다. 미친 바람이 기운 드러내기를 멈췄다.
아득하였다. 시작되었던 순간, 끝나던 찰나. 어느 것이 먼저였는지 판단하기조차 어려웠다. 제트기류로 이동하는 바람이었다. 일어나 거실문을 열고 베란다 문을 열었다. 길지 않은 두 팔 가득 허공에 띄워 대기의 운세를 짚어보았다. 눈에 잡히는 것은 조금 전 상황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만큼 평범함이었다. 조금 전 광풍은 현실이었을까, 현상이었을까. 지각 가능한 것이었을까, 존재하는 것이었을까. 대기 중에 얼굴을 내밀어 맞대면하자 두 눈이 더욱 총총해졌다.
내 육신은 발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은 상태였다. 강도가 아니라 순간이 문제였다. 태풍이 왔음을 인지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에 그만 어리둥절했다. 내가 눈을 뜬 순간에 감지한 것이 전부인 듯싶지만 진즉 와 머물렀을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눈을 뜬 순간 마지막 회오리를 그리고 사라졌으리라. 우주의 운동을 미심쩍어하는 자를 진정시켰다. 물론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었다. 필시 잠들었다가 깨어나면 새로운 세상을 통과하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잠은 이어지지 못했다. 현실과 다른 상황 속에 내던져지는 것을 나는 평소에도 두려워한다. 얼마나 거창하게 온다고 했던가. 온 세상을 뒤흔들 듯 기운이랬다. 여미고 싸매고 닫고, 고리 걸고 틈을 막으면서 기다렸다. 가는 길에서 만나게 되는 신묘한 기분. 새로움은 감당하지 못하리라. 이어 진행되는 일상이 차라리 편하다. 이 묘한 기분을 떨쳐내기로 했다. 서너 시간 수면의 여신을 달래느라 쟁쟁거렸을 유튜브 '수면 명상'을 껐다. 어젯밤 잠들기 전에 진중하지 못한 태도로 들었던 강의가 떠올랐다. 오스만제국의 이야기였다. 이 상황에 적합하다 싶었다. 날카로운 현실 속에서 눅눅한 고대나 중세사회를 모셔오는 것이 혼돈의 상황을 이겨내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싶었다. 바람은, 태풍은 이미 기가 죽은 상태였다. 차라리 일어나자 결정짓고 이불 속을 벗어났다. 여섯 시 아침 기상 알람이 울렸다.
간소한 차림새로 외출복을 정해 입고 베란다에 나가 바깥 풍경을 내다보았다. 숨죽인 것일지라도 태풍은 태풍이라고 했다. 쉽사리 현관문을 나설 수 없었다. 나는 선지자가 되기에는 너무 작다. 바깥 일상으로 떠나는 사람의 움직임을 기다렸다. 여섯 시 삼십 분쯤 집을 나서려고 밖을 내다보니 움직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어느 한 사람 집 밖에 서 있는 사람이 없었다. 베란다에 세워 둔 독서대 대용의 악보 보면대에 펼쳐둔 책이 니체였다. '차라투스트라~'를 읽으면서 내 앞서 길을 떠날 사람을 기다렸다.
마흔에 세상으로 나온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십 년을 잠수했다가 태양 앞에 나선다. 목적과 의도를 계획적으로 깔고 나선 속세의 길이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어떤 의도로 길을 나섰던가. 그가 내게 온 목적은 무엇이었던가. 그와 첫 대면 이후 어느 한순간도 그를 내보내지 못하고 있는 나를 돌아보았다. 밋밋함이 너무 강해서 진 자리, 마른자리 찾을 수 없는 나. 나는 무엇을 위해 세상을 살아왔을까. 서너 페이지를 읽다 보니 앞 아파트 건물 뒤편으로 한 사람의 검은 걸음이 보였다.
자, 가자. 밖으로 나가자. 차라투스트라가 태양 앞으로 나서듯이 나도 저 태양 앞으로 걸음 하자. 가죽이며 속내며 자기 소유의 모든 것을 한바탕 소독제를 풀어 목욕한 듯한 태양이, 선명한 선과 빛의 모음으로 하늘 바다에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아파트 건물 밖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가 순간 멈췄다. 휘이이잉~ 환영 인사라도 하듯, 딱 한 바퀴 몸을 굴리던 바람이었다. 새벽녘처럼 이내 바람은 자기 자신을 진정시켰다. 이후 크고 작은 자지러짐도 없었다. 출발점에서 원을 그렸다가 다시 출발점으로 복귀한 바람. 당신이 있어 차마 당신의 구역은 덤비지 못했다는 듯 멈칫. 내 앞에서 기세를 낮췄다. 출근길 바람은 수평의 수직선을 그렸다. 잠시 잠깐 미동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몇 미동마저 대체로 가지런히 뜬 눈이었다. 나는 승자인 양 뻔뻔하게 고개를 들고 걸었다. 바람 신은 이미 몸을 숨긴 상태였다.
거의 같을 길을 걷는데도 폰에 입력되지 않은 풍경들이 몇 있다. 타인의 공간(집)이 포함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내 사진 찍기의 기본 규칙이다. 오늘은 달랐다. 몇 걸음을 걷다가 규칙을 무시하고 폰을 움직였다. 우주 공간을 꽉 채운 기운의 맑고 깨끗하기가 어떠한 낱말과 구절, 문장으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고요 그리고 정갈함이었다. 번듯하게 치솟던 내 턱의 높이를 낮췄다. 닳은 광대뼈 위 겹으로 쌓아둔 경계를 흐트러뜨렸다. 눈썹 위 철벅철벅 저며 둔 사욕을 훌훌 털어버렸다. 가늘게 뻗은 감탄사가 연사 촬영한 것은 물(物)이자 경(景)이었으며 무(無)이자 유(無)였다. 오늘은 모르는 이의 공간이 내 폰에 들어오는 것을 용납하기로 했다. 편집으로 사각형 속에 들어오는 타인의 영역을 최대한 축소하기로 했다.
사람 사는 세상이 이렇게 투명할 수가 있을까. 내가 가는 길, 가득 물을 가득 채우면 일등 청정수에서만 살 수 있는 물고기들이 헤엄칠 것 같았다. 형이며, 색, 양감, 질감 그리고 그들의 각자 몸이 지닌 경건함까지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여린 가슴 갓 태어나 숨 쉬고 있을 섬모도 내 흐린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늘도 투명했다. 대기에 내 몸을 전부 맡기고 싶었다. 내 몸 눕히면 내 안에 서식하는 모든 균이 사라질 것 같았다. 이기와 탐욕으로 찌든 내 영혼의 오염 부위들을 말끔하게 제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제와 다른 형태의 오늘이었다. 어제 아침 이른 출근에, 나 혼자의 힘으로 해결한 것이 있어 오늘 대체재를 통한 생활은 말끔했다. 느린 여백 속에 태풍이 남긴 공허가 온순한 발길질을 하면서 세상 속으로 달아났다.
'라이프 > 하루 공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헤어드라이어로 옷을 말려 입고 출근하였다 (78) | 2022.09.08 |
---|---|
서늘하다 (47) | 2022.09.07 |
태풍 전야 - 진짜로! (79) | 2022.09.05 |
쏜살같이 날아가 버린 일요일이여! 그러나~ (42) | 2022.09.04 |
기울어짐의 미학 (49) | 2022.09.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