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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하루 공개

태풍 전야 -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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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세를 넓혀 내일 당장 내가 사는 곳까지 덮쳐 온다면~.' 어젯밤, 직립 상태의 일상을 종료한 후 이불 속으로 몸을 들어앉히면서 떠올린 생각이다. 두 손에는 아날로그식 일기를 쓰기 위해 다이어리와 연필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어떡하지? 지난 주,  언론에서 그토록 태풍 '힌남노'를 외쳤는데도 점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금요일 혼돈의 일정이 진짜 중요한 것을 잊게 했다. 태풍이 오면 내 일터는 대체 방법을 택해 일을 한다. 생각해 보니 대체 방법의 원활한 실행을 위한 준비를 하지 못한 채 퇴근한 것이다.

 

녀석. 율마를 잘 지키고 있는~

 

 

일기를 마치고 수면 명상을 켰지만 잠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명상 영상 속 반복되는 가락은 볼륨을 낮춰도 힘찬 율동으로 내 의식을 귀찮게 했다.  달콤함을 화려한 면류관에 담아 와서 내 머리  꽁지에 얹어두는 듯하다가는 휙 비웃음 조의 악성을 날리고는 떠날 것만 같은, 몹시 기분 나쁜 모순을 배태하고 있는 듯하였다. 철럭철럭 남아도는 힘을, 달작지근하게 후끈거리는 찐득찐득한  액체로 만들어서, '쏴아' 뿌리고는 떠나버릴 것 같은.

 

준비가 안 된 상황을 어찌하나. 이런 특이한 날의 아침은 정신없을 텐데. 내일 아침 당장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내가 처리하여 원만하게 해낼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인터넷을 검색하였다. 정확한 판단이 서지 않았다. 새벽 두 시가 넘어서자 내 안의 나를 우선 달랬다. 일단 조금이라도 잠을 자 두는 것이 현명하다며 수면 명상에 집중하자고, 마음 가라앉혀 평정심을 되찾자고, 뾰로퉁해 있는 영의 숨결을 달랬다.

 

건조로 인한 사망 직전에야 물을 공급받은 녀석. 살아나리라~

 

 

여섯 시 알람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부리나케 출근 준비를 하여 집을 나섰다. 의외로 비는 내린 듯 만 듯, 자기 존재 확인을 내세우기 위한 시늉만 하고 있었다. 흰 운동화에 방수제를 듬뿍 뿌리고 일터를 향해 냅다 달렸다. 거리는 한산했다. 삼류 공포 영화의 시발점을 막 열어제친 듯 무대는 황량하였다. 진초록 여름 기운이 무더기로 하늘에 빨려 들어갔을까. 그만 땅의 여신 데메테르에게 붙잡혔을까. 제 육신의 대부분을 형성하는 수분을 몽땅 빼앗긴 것일까. 마치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가 초록잎 몇을 몸에 달고 서 있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로 대기는 고요와 정적이 세를 잡고 있었다. 초록잎이 초록잎으로 보이지 않았다.

 

새 생명체로 태어난 다육이인데~ 이름을 모른다. 미안! 일단 잘 자라주렴.

 

 

5분 여 앞당긴 출근길이었다.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 싶던 상황은 다행히 코드 하나만 꽂으면 되는 상황이었다. 떫은 감을 입 안 가득 씹고 있다가 제대로 내뱉은 기분이었다. 최신식 기계들도 이젠 나 혼자서 해결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얼마나 내 조그마한 손가락들이 사랑스러웠는지. 여유를 찾은 것은 아침을 산뜻하게 보내는 데에 커다란 힘이 되었다. 월요일 아침인데도 목요일 아침인 듯 느끼게 했다. 오늘 하루만 잘 지내면 더없이 좋은 날이 바로 이어질 듯한 날의 아침같은. 가루약을 털어 마시듯 원두커피의 가루 한 스푼에 차 숟가락 서너 스푼 정도의 뜨거운 물을 섞어 마시면서 되바라진 접시 숨기듯 펄럭거리는 내 심사를 잠재웠다. 고요하자.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듣고 있다. 오늘 일터는 오전만 움직이기로 했다. 거나한 점심 이후 두세 시간은 참 기분이 언짢다. 꽉 찬 내장을 덮은 근육이 피로를 호소한다. 형태를 지탱하는 것이 생의 과제인 내 몸 뼈들도 구석구석 버티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하소연한다. 제발 적당히, 식탐을 행사하라고. 점심과 저녁으로 진행하는 간헐적 단식을 하는 것이 옳지 않다 생각되는데 쉽게 결론이 내려지지 않는다. 어쨌든 간헐적 단식에서 음식을 섭취하게 되는 여덟 시간은 어떤 음식을 먹어도 되는 것이 맞지만 과하게 먹어도 된다는 것은 구색 맞추기 위한 것이라 여겨진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봐야 세상 사는 것이 뭔지 안다. 입 짧아서 어찌 살꼬' 하시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늘에서도 여전히, 단 한 올 흐트러짐 없이 빗은 머리 올려 단정하게 비녀 꽂고 앉아 계실까. 

 

카라얀의 레퀴엠 <삶과 죽음의 경계>가 이어 흐른다.  태풍이 미리 보낸 우리 지방의 비는 오늘 간헐적으로 내린다. 폭우였다가 몇 점씩 뿌리는 점점이였다가. 다만 그 간격이 매우 좁다.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들으면서- 잠시 소강 상태의 태풍.

 


 

 

 애드핏을 살렸더니 내드센스 광고가 사라졌다. 이런~ 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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