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덜 자란 것일까?
"엄마, 나는 저곳에 좀 다녀올게요."
"어디? 어딜 말하는 거야?"
"저기 안 보이세요? 스노보드를 타고 있잖아요, 아이들이."
"그래, 그러렴."
요즘 젊은 사람들은 하고자 하는 일을 만나면 주위 살피지 않고 바로 그 일에 집중한다더라. 이해하자.
세상에나, 가족들과 함께 온 해외여행이었다. 이렇게 모여지기도 하는구나. 대한민국에서도 함께 모이는 것이 하늘에서 별을 따기인데 이렇게 먼 곳까지 떠나온 여행에 온 가족이 모였구나. 가까운 가족 먼 가족 할 것 없이 함께 한 여행이었다. 이 사람 저 사람 여러 사람이 모였다. 가족은 친정 식구들이었다.
미지의 섬이었다. 이름 모를 섬인지, 이름이 있는 섬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도착한 곳은 섬이었다. 큰 섬. 세계지도에 나올 법한 크기를 지녔다. 우리나라 땅을 떠나 홍콩을 거치고 한 블록의 바다를 더 이동해서 도착한 곳이었다.
가족들은 각자 놀이와 구경에 바빴다. 평소 관심 있어 하던 곳을 찾아 떠났다. 나 혼자 남았다. 아무도 곁에 있지 않았다. 도무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지 못한 채 나는 본부 같지도 않은 본부에서 그냥저냥 숨을 쉬고 있었다. 요즘 가족여행은 이렇구나.
이상한 것은 가족여행이라는데 내 곁에 남자가 있지 않았다. 왜일까. 그는 마라톤 경기라도 나간 것일까. 그는 지리산 천왕봉으로 떠난 것일까. 그는 지리산 노고단에 드라이브라도 간 것일까. 그는 길고 긴 한강이나 낙동강이나, 금강 혹은 섬진강에 수영 일주를 나선 것일까. 아니면 제주도 한라산 백록담을 보기 위해서 저 혼자 떠난 것일까. 그는 동해안 해안선 일주라도 나선 것일까. 왜 그는 함께 오지 않았을까.
언니들도 보이지 않았다. 언니들을 분명 여행을 함께 떠나왔는데 여행지에서는 거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어디로 간 것일까. 자기들만의 꿍꿍이속이 있었던 것일까. 해외 여행지에 와서는 언니들이 나를 왕따를 시키는 것이로구나. 현실에서는 늘 내가 내 할 일에만 집중하여 언니들의 일을 나 몰라라 했더니 이곳에 와 언니들이 나를 나 몰라라 하는구나 싶었다.
인내하기로 했다. 사실 마음속으로는 은근히 기뻤다. 해외여행이라고 왔는데 꼭 붙어 다녀야 되겠다고 우격다짐을 하면 나는 많이 곤란할 것 같았다. 나는 늘 혼자 놀고 싶다. 혼자 살고 싶다. 혼자 숨 쉬고 싶다. 태생에 무슨 옴이 붙었는지 내 생은 차라리 혼자일 것을 늘 소망한다. 그러니 언니들이 나를 소외시킨 것이 참 다행스러웠다.
나도 나만의 여행을 하기로 했다. 해외 여행지에서 또 다른 곳을 다녀오기였다. 대한민국에서 홍콩으로 홍콩에서 한 블록의 바다를 건너뛴 섬으로 왔으니 다시 한 블록의 바다를 건너 다른 섬으로 가보는 것이었다. 주위 눈치를 볼 일이 없었다. 친척들은 모두 제 나름의 여행을 즐기기에 바빴다.
우리나라, 우리 집 베란다에서 보는 노을처럼, 내가 서 있는 곳 건너편 섬의 한쪽이 농익은 복숭아 속살처럼 붉게 물들면서 점차 수면으로 빛을 숨길 때 나도 내 해외여행을 즐기기로 했다. 두고 보라지. 내가 가장 멋진 여행을 할 거야. 나만의 개성이 톡톡 불거질 수 있는 기상천외한 여행을 해내고 말 거다. 아들아, 그래, 열심히 스노보드를 즐기렴. 요술처럼 하얀 눈밭 위에서 펼칠 너의 기기묘묘한 재주는 영상으로 볼 수 있겠지. 다녀올게. 동안 즐거이.
배를 탔다. 아직 노을은 온전히 잠기지 않은 상태였다. 내 새끼손가락만 한 띠의 붉음이 수평선 위에 머물러 있었다. 남은 노을을 바라보면서 해외여행 본거지를 떠났다. 배는 쏜살같이 달렸다. 가능하면 오늘 가서 간단히 섬을 돌아본 다음 오늘 돌아올 생각이었다. 어쩌다가 일정에 문제가 생기면 하룻밤만 자고 내일 아침에 복귀할 예정이었다. 새로운 섬은 어두웠다. 노을 끝이니 당연할 수 있겠다고 여겼다.
문명이 생성되지 않은 땅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빛이 없었다. 의식주를 발견할 수 없었다. 집도 없고 절도 없었다. 돼지 막 같은 낮은 움막이 군데군데 펼쳐 있었다. 사람들은 움막 앞에 몇씩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구체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지 않았다. 말하자면 언어가 없었다. 옹알옹알 아기들의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쌍방에 필요한 소통이 없었다. 그저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면서 뚝뚝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당황하여 돌아보니 함께 배를 타고 왔고 배에서 내렸던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어디로 숨어든 것일까. 이리저리 살펴봤지만 그들의 흔적은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뒤돌아보니 배만 덩그러니 좁은 항구에 묶여 있었다. 아찔한 흐릿함으로 빈집이라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면서 배는 가라앉아가는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선장님과 선원들이 대여섯은 됐는데 어디에 있을까. 배로 돌아가 볼까 싶었으나 빈 배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었기에 참았다. 기괴한 요물이 나오는 3급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같았다. 온몸을 뒤로 돌려 걸어가서 확인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정면으로 눈을 돌리자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줄줄줄줄 온몸을 덥고 있는 실타래들이 그 사람의 얼굴보다 먼저 눈에 들어왔다. 빨주노초파남보의 일곱 색깔 무지개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실타래들은 모두 똑같은 색이었다. 잿빛, 무거운 잿빛이었다. 등뒤 실타래도 똑같다는 것을 너무 길어서 발 뒤꿈치를 덮고서 땅바닥을 질질 끌고 있는 모습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람은 사람이었다. 사람이 사람 모양이면 모두 사람일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림자가 없는 내 몸뚱이의 내 다리만큼 길이가 벌어진 거리에서 눈, 코, 귀가 있으면 모두 사람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사람이 멈췄다. 소리했다. 음파는 있는 소리였다.
내가 읽었다. 음파만 존재하는 소리에 의미를 붙인 사람은 나였다.
"어디서 주무실 거예요? 여기는 왜 왔어요? 언제 떠날 거죠?"
내가 답한다.
"잘 수 있는 곳이 어디이지요? 그냥, 놀러 왔어요. 사실은 오늘 밤에 가려고 했는데 배가 떠나지 않나 보군요."
상대가 다시 말한다.
"잘 수 있는 곳이 없어요. 놀러 오다니요. 이곳을 왜요? 이미 해가 졌어요. 밤에는 배가 움직이지 않아요. 배에는 아무도 없어요. 누가 데려다주겠어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혹시 돈 없어요? 돈 좀 주세요. 저 밖에서 쓸 수 있는 돈 말고요. 여기에서 쓸 수 있는 돈이요."
"예. 돈은 없어요. 저는 카드만 쓰거든요. 근데 제가 떠나온 저 섬의 이름이 뭔지 아시나요?"
"돈이 없으면 오늘 잡아먹힐 것이어도 괜찮나요? 카드라니요. 카드가 어디 있어요. 아이들 게임 카드를 말하는 것인가요?"
"아, 아니요. 어떤 물건이든지 살 수 있는 카드 말입니다."
"아, 이곳은 그런 곳이 결코 못됩니다. 큰일 났네요. 내일 오후까지 당신이 이 섬을 나가지 못하면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을 겁니다. 어서 돈을 좀 줘요. 이곳에서 쓸 수 있는 돈을 말합니다. 어서 준비하시기를 바랍니다. 잡아먹히기 전에요."
"난감하네요."
"난감하다면 어서 돈을 내놔요. 내일 아침이 되기 전에 당신에게서 빼앗을 것이 없거나 돈을 내놓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곳 사람들에 의해 잡아먹힐 것입니다."
"예?"
섬이 떠나가도록 외쳤다.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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