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다 바빠.
연말이다. 그야말로 바쁘다. 며칠까지 무엇에 대해서 정리하여 제출하라. 며칠까지 그것에 대해서 진행 과정을 순차적으로 작성하라. 며칠까지는 저 분야 1년 통계를 내서 제출하라. 또 며칠까지는 1년 한 일에 대해 숫자화를 시킨 후 문서화를 한 것을 제출하고 그리고 무엇이며, 그것이며, 저것이며, 1년을 돌아보라. 반성하라. 열나게 반성하고 내년을 또 기꺼이 열 받치면서도 살아낼 것을 다짐하라. 약속하라.
12월이 시작되면서 하달되어 있는 것들이다. 일종의 보고서들이다. 내려온 문서, 12월 계획을 둘러보면서 생각했다네. 정말 긴 시간 살아냈구나. 1년을 참 길게 살았구나. 1년을 참 알뜰하게 살았구나. 1년을 어떻게든 이겨내기는 했구나. 그리하여 1년이 또 연초 고이 접어 만들어 둔 나래도 펴지 못한 채 하강하고 마는 것이구나. 삶이 그렇구나. 세상이 이렇구나. 세상사 고만고만 우물쭈물 우여곡절이라도 즐길라 했더니 뒤편으로 달아나는구나.
물론 투덜거리는 것도 가끔 알차게 내뱉어지는 경우가 있다. 연말 두둑한 휴가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연초 나 혼자만을 위한 시간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 하나로 버틴다. 버틴다? 뭐 그렇다고 휴가가 있어 용기백배가 되고 의기양양해지고, 백골난망 대단한 은혜를 입은 양 행동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얄팍한 휴가 며칠 있다기에 제출 문서, 보고 문서, 각자 거울에 심장을 대어 반성하고 그 소감을 작성하여 제출하라는 것도 서둘러서 해낼 만큼 기대를 조금 하고 있을 뿐이다. 어쨌든 곧 휴가가 있어 기쁘다는 생각이 눈을 뜨게 하는 힘이었으며 내일을 기약하는 약속이었으며 이런 방식의 삶을 영위할 때쯤 느끼게 되는 애매한, 삶의 희로애락에 해당되는 것이기도 했다.
연말, 짬을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항상 짬이 없다는 문장을 겨드랑이에 끼고서 부지런히 일터를 납시었다. 내친김에 올 겨울 북유럽을 꿈꿨다. 겨울 기행은 숨도 한번 내보이지 못한 채 사라졌다. 추진하기로 했던 조카가 신혼 초 행사가 있어 힘든가 보다. 내 주제에는 외국 여행을 으쌰 으쌰 하면서 머리에 이고, 짊어지고 길을 이끌 도리를 지니고 있지 못한다. 꼽사리 끼어 나라 밖으로 좀 나가려고 했더니 올 겨울은 그냥 집에 가만 계시란다. 아들도 군에 있는데 조용히 집을 지키고 있는 것이 도리가 아니냐고 한다. 그렇다. 코로나도 재유행 조짐이 있다는데 정작 이 시기, 가장 조심해야 할 일터의 일꾼이거늘 더 이상 고집을 부릴 필요는 없다. 그냥 조용히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나의 평생 취미이지 않은가.
죽을 쑤든 떡을 치든 내 멋대로 할 수 있는 며칠이 곧 내게 주어진다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 어서 계획을 세우자. 찢어진 주머니에 두 손을 내리꽂은 채 그저 길을 떠나도 좋은 청춘시대가 아니기에 얼마나 다행인가. 내 삶의 터전에서 나뒹굴기. 첫 번째 이번 겨울 휴가의 약속이다.
'라이프 > 하루 공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 달여 멈춰 있다 (13) | 2022.12.17 |
---|---|
이렇게 산뜻한 겨울날이라니! (12) | 2022.12.16 |
눈 내리는 날의 아침을 걷다 (20) | 2022.12.14 |
어느 하루 도무지 추스를 수 없을 듯 묘한 심정이 만들어지는 것을 어찌하랴! (20) | 2022.12.13 |
소국, 내년을 기약하면서 안녕을 고하다 (17) | 2022.1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