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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하루 공개

이렇게 산뜻한 겨울날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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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산뜻한 겨울날이라니!

 

 

 

'엉덩이'로 검색했더니 이런 사진이 있다. -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매일, 오늘 아침처럼만 산뜻해라. 겨울, 날 선 추위에 온몸이 오그라들고 움츠러드는 시기에 '산뜻하다'라는 낱말이 어떻게 어울리랴 싶으나 오늘, 나의 오늘 기운을 표시할 수 있는 최고 맞춤 낱말이다. 

 

 

몸이 징그러울 때가 있다. 요즈음 더욱 크게 느낀다. 역겨운 몸을 체감하지 않기 위해 나가 지닌 내 몸을 만지는 것이 꺼려진다. 특히 엉덩이를, 내 엉덩이를 내가 만지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양손이 엉덩이 위에 얹히는 순간 끔찍하다. 손바닥의 너비에 비해 엉덩이의 너비가 너무 크게 느껴진다. 거대하다. 민둥산 두 덩이가 내 몸의 한 중간 양쪽에 착 달라붙어있는 느낌이다. 흑점의 개미가 오르다가 포기한 거대한 철산. 

 

 

순간 내 몸이, 내 엉덩이 허우대가 내가 지닌 뇌세포의 무게를 소환한다. 영화 <21그램>을 떠오르게 한다. 이 세상 온갖 심성을 주체해야 할 만큼 나름 큰 세상을 살던 폴 리버스(숀 펜). 그는 여러 개의 생을 산다. 죽은 후 '21그램'의 무게가 줄었다. 그의 뇌, 그가 이고 지고 살았던,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육신을 떠나고 만 영혼의 무게는 5센트짜리 다섯이었다. 

 

 

폴 리버스는 대학교수였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논하고 읽고 쓰면서 적나라한 뇌의 운동을 살았을 것이다. 그런 그도 '21그램 뇌에 불과하다는데 나의 뇌는 얼마나 될까. 나의 삶은 폴 리버스의 삶에 비해 매우 초라하고 왜소하다. 상식적으로 훨씬 적은 양의 뇌 활동으로 연명하는 생이다. 나는 아마 죽으면 그 무게가 '15그램' 정도 혹은 '10그램' 정도나 줄까? 수학적으로 내가 지닌 뇌의 무게, 내가 죽으면서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되는 나의 수학적인 몸무게는 그 정도이지 않을까 싶다. 이를 적확하게 인식하게 하는 것이 내 손바닥이 깨닫는 내 엉덩이의 크기이다. 내가 지닌 뇌에 비해 내 헛욕심 꽉 들어찬 엉덩이는 너무 비대하다.

 

 

오른, 왼 양쪽 엉덩이는 또 내 작은 몸뚱이의 부피를 소환한다. 내 몸뚱이는 작고 초라하다. 어쩌자고 잘 생긴 얼굴에 키가 무려 180센티에 가까운 아버지를 닮지 못했을까. 못생긴, 아주 작은 내 어미를 닮았을까. 이런 엉뚱하고 내 어미를 무시하는 불효녀 같은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 나가 지닌 엉덩이이다. 뇌는 비루한데 엉덩이만 엄청 큰, 불균형 극지의 인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양손이 쫙 펴진 채 엉덩이가 만져지는 순간을 말한다. 

 

 

오늘 일출!

 

 

 

그렇다면 내나 엉덩이는 상식적으로 진짜로 큰 것인가? 사실은 아니다. 나는 속옷 사이즈가 80 혹은 85이다. 80은 딱 맞아서 압박감을 느끼게 한다. 몸의 라인을 제대로 살려서 입어야 할 멋진 옷을 입고 외출해야 할 때 입는다. 보통은 85가 좋다. 적당히 여유롭다. 살진 근육을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게 한다. 그 정도면 엉덩이도 그다지 크지 않은 편에 속하지 않은가. 한데 내 손바닥은 내 자신의 엉덩이를 그토록 과장되게 깨닫는 것일까.

 

 

불면의 밤이 연속되면 더더욱 그런다. 개운한 잠을 치르지 못했을 때 맞이하는 새날의 아침이면 더욱 그렇다. 밤이 길 때 그렇다. 몸이 무거워진다.

 

 

어젯밤은 잠을 잘 잤다. 어제 김장 김치가 두 군데에서 들어왔다. 매년 사 오는 반찬 가게의 것과 한양 언니가 내려와, 다니던 일터 식당에서 담아온 것이다. 그녀는 정식 퇴직 후에도 회사에서 도움을 청하면 기꺼이 참가한다. 두 곳에서 도착한 김장김치를 다각적인 방면에서 비교 감상하는 맛이 즐거웠다. 40분이면 마땅하다는 조리 시간을 30분에서 멈췄다가 추가 10분으로 요리해냈다는 돼지고기 수육의 맛이 기가 막혔다. 적당한 숙성도를 조금 벗어나 조금은 질척거리는 숙성도였지만 크게 과하지 않았다. 

 

 

 

나란히 선 십자가를 보면서 퇴근하는 기분이 묘했다. 내 죄를 사하소서!

 

 

 

마구마구 먹었다. 김장김치에, 수육 굵게 썬 것 한 점을 얹고 양파 한 가닥에 영점 2 센티미터 두께의 마늘 한 개를 더한 다음 고급진 상추 혹은 쑥갓에 싸 먹는 맛은 천상천하 최고의 맛이었다. 최근 어느 날 문득 돌아온 입 안의 감이 김치의 맛을 제대로 느끼게 했다. 두꺼비 파리 잡아먹듯 먹었다. 입이 풍년인 밤이었다. 무지막지하게 먹었다. 먹는 폼이 보통 상스러운 것이 아니었으리라.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모를 일이었다. 베짱이 기타를 칠 시간이 마련되지 않았다. 덩그러니 나앉은 밤 속에서 나는 두툼히 오른 배를 두들기면서 잠을 푹 잤다. 통잠이었다. 은근하면서도 진득한 겨울밤 통잠은 대견하고도 두터운 신뢰였다.

 

 

아침에 치러야 할 일(?)을 야무지게 치렀다. 무엇을? 상상에 맡긴다. 아마 진즉 답을 찾아서 허허로운 웃음을 발하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으리라. 푹 잔 날은 뭔가 다르다. 아하, 두 종의 김장김치와 돼지 수육이 내게 가져다준 산뜻한 겨울 아침이다. 파이팅이여,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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