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여 멈춰있다.
'히스 레저 그리기 5'에서 그림이 멈췄다. 그에게 미안하다. 화지가 올려져 있는 이젤 앞에 설 때마다 약속한다.
"기다려 줘요, 히스 레저. 곧 돌아올게요, 곧. 기다려 줘요."
아마 두 달이 다 되어가는 듯싶다.
마음이 해이해졌다? 해이해지다? 긴장이 풀리다? 규칙을 무시한 채 살아내려 하다? 마음이 느슨해지다? 조금은 맞다. 그러나 결코 모두 맞은 것은 아니다. 온 세상을 향하여 다짐하건대 '약간 풀렸다.' 에는 인정한다. 손에서 팔로 이어지는 이음새가 조금 풀어졌다. 연골, 골의 밀도가 조금 약해졌다. 나이 탓이다. 하루하루가 다르더라.
예전에는 그랬다. 밤새 소주의 냉철한 사유에 젖었다가도 다음 날 아침 냉수에 몸을 푼 후 거울 앞에 서면 이십 대의 얼굴로 즉시 환원 혹은 환생이라는 것이 가능했다.
거울 앞에 서면
나는 백설 공주가 되었다.
다행이었다.
신데렐라가 되는 것은 어떨까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내 작은 몸은 일곱 난쟁이의 경호를 받기에 더 어울린다.
나는 그렇게 술 다음날도 틀림없이 공주였다.
스무 살 젊은 청춘을 낯 위에 다시 세울 수 있었다.
물의 세례만 받을 수 있다면.
어느 날 문득 냉수 세례도 내 몸이 받아들일 수 없는 처지에 들어섰음을 확인했다. 다시 거울 앞에 섰던 어느 날, 지난밤 내 온몸을 축이게 했던 독한 알코올 기운이 어젯밤에 신축하여 차지한 그곳, 내 몸 어느 곳을 점령한 채 떠나질 않았다. 밤새 육신을 나가 살던 온전한 영혼이 돌아와 자리할 곳이 없었다. 복귀가 쉽지 않았다. 복원이라도? 복원이라니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였다. 내 젊음이 영원히 내게 안녕을 고하고 난 후였다.
그림을 그리겠다는 간절함이 녹아내린 것이 아니다. 히스 레저가 나를 멀리한 것도 아니다. 히스 레저를 향한 나의 사랑도 식은 것이 아니다. 몸이 너무 피곤하다. 일은 줄지 않았고 내 몸은 앞으로 나아가면서 자꾸 고부라지고 스러진다. 세월의 속도에 내가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다. 몸이 마음을 따르질 못한다.
융통성이 부족한 것도 문제이다. 나는 효율적인 시간 운영을 하지 못한다. 내 타성이 된 게으름에 연유한 것일 수도 있다. 사람들이 나는 붙들어 매는 것도 한 이유였다. 지난 몇 주 유난히 나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심지어 메시까지 나를 붙잡고 있지 않은가. 메시. 그야 뭐, 나 아니어도 세계 곳곳에 많은 팬이 있으니 나는 조용히 지내자 하는데 월드컵은 아니다. 내가 함께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내사랑. 내사랑이 나를 찾는 횟수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내 나이가 몇인가. 어쩌다 한 번씩 나를 찾는 내사랑. 이런 기회를 소중히 감싼 채 운영해야 한다는 생각이 절박했다. 예전보다는 훨씬 덜하지만 말이다. 하여 내 지난 몇 주가 바쁘기도 했다.
그런데 사실 무섭기도 하다. 혹시. 정말 무서운 나의 병이 다시 도진 것일까.
'그래, 예술인은 타고난 운명이야. 나는 거기와는 거리가 멀어.'
예술가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되지 않는다는 신념. 하늘의 운이 따라줘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내게 달라붙으면 나는 그만 손을 놓게 된다. 그렇게 몇 년을 그림에서 손을 놓은 적도 있었다. 당시 내 마음은 날마다 조금씩 멍들고 있었다. 내 안에 자라고 있는 나를 향한 안쓰러움을 붙잡을 수 없어 그만 조금씩 병들어 갔다. 그 병 다시 도진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오늘내일은 꼭 '히스 레저 5'를 완성해야 한다. 그렇잖으면 나는 또 몇 년을 그림 그리기라는 작업을 눈물 속에 허우적거리는 상태로 주저앉히고 말 것이니. 바쁘게 뛰어야 한다. 연말연시 업무 처리를 위한 준비를 오늘, 토요일에도 마련해야 한다. 남은 시간 어서 끝내고, 그림을, 내사랑 히스 레저를 어서 좀 그리자. 그래, 그리고 싶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 열망한다. 간절하다. 쓱쓱 싹싹, 그림을 좀, 어서 그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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