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기는 단 한 줄도 쓰지 못했다. 보랏빛 원피스를 입고 출근했다.
바빴다. 숨 쉬는 것조차 자연스럽게 놔둘 수 없었다. 부리나케 걸었다. 여기저기, 일터 여러 곳에 내가 걸음해야 했다. 온갖 일의 자료들을 내가 입력해야 했다. 내가 알았다는 신호를 해야만 이일 저일이 해결되었다. 응당 내가 갈 줄 알고 그런 것인가 싶었다. 당연히 내 발걸음이 그곳에 도착하리라 여기고 있는 것도 같았다. 맡겨진 일에는 따박따박 처리하려 애쓰는 나의 평소 성격을 제대로 꿰뚫고 있는 듯싶었다.
지난 주 금요일처럼 빨리 끝낼 수 있으리라 여겼다. 어서 아침 일기를 마치고 지난주 팬텀 싱어의 대표곡, 테너 2인과 카운터테너 2인의 파바로티 곡을 감상하려던 계획은 치를 수 없었다. 당장 처리해야 할 일, 앞으로 해야 할 일, 곧 해야 할 일, 이미 처리했으나 혹여나 싶어 그대로 둔 것 등 문서함에 쌓인 것들이 징그러웠다. 이미 처리한 것들을 쏵쏵 휴지통으로 끌어내리고 나니 벌써 정식 업무 시간이었다.
이런, 제기랄. 월요일 아침부터 일터 일이 힘에 부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감했다. 없는 정일지라도 만들어서 해내야 일터 출근의 맛이 생길 터인데. 2킬로그램 가까이 찐 몸무게를 정상 복귀시키기 위해 오늘 아침부터 커피를 끊었다. 어쩌다 한 번, 디 카페인 커피 한 잔 정도만 마시고 제대로 된 16시간 간헐적 단식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오늘은 일체의 달달한 음식은 입에 대지 않았다.
진보라, 딥 퍼플 원피스를 입고 출근했다. 아침저녁으로 심하게 차이가 나는 기온이 걱정되어 니트 롱 후드 가디건을 걸쳤다. 걸을 때마다 가디건 사이로 돌출하는 밝은 진보라 원피스 자락이 어찌나 촌스러운지. 언니의 말이 맞았다.
"야, 홈드레스야. 아무리 대충 산다고 해도 너 나이가 몇인데 홈드레스를 입고 출근할 거야? 아서라. 천이야, 완전히~."
채 끝마치지 못한 문장의 서술어는 무엇이었을까.
더 늙기 전에 내가 최고로 좋아하는 색인 딥 퍼플의 옷을 하나 입어보자고 벼르고 있었다. 이곳 블로그 애드센스 광고창에 어느 옷가게 옷들의 사진이 올라왔는데 내 눈을 사로잡은 드레스가 있었다. 나는 메이커를 외워 앱을 실행시켰다. 그 원피스를 여러 번 쳐다봤는데 괜찮다 싶었다. 진짜 괜찮은 이유는 50% 세일 제품이라는 것이었고 진보랏빛 색깔이 그랬다. 세일 가격이 나를 유혹했다. 일요일 저녁이면 한양 땅에서 남하하는 언니에게 일렀다. 고속 터미널 가까이 있는 우리나라 최고의 백화점에 입점이 되어 있으니 그곳에 들러 그 옷을 좀 사 오라고.
어제 급히 한다면서 언니가 내게 전화를 넣어왔다.
"아이고, 그러니까 세일을 하지."
"왜? 나 그 보라색 꼭 입어보고 싶단 말이야. 쬐끔 더 진했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제법 짙은 보라색이더라고. 더 늦기 전에 나 좋아하는 색깔의 옷 좀 입어보려고 그래. 사 와."
"그래, 사 가기는 하겠다만, 딱, 너네 집에 나보다는 좀 어려운, 어정쩡한 손님이라도 올 때 입으면 쓰겠더라. 홈드레스더라고."
"아니, 그것, 메이커야. 중저가이지만 괜찮은 거잖아. 무슨 홈드레스라고 그래, 사진을 보니 괜찮던데."
"아이고, 그 모델들이 입고 있는 사진들이야 오죽하겠냐. 그것들마저 뽀샵 처리를 했을 텐데. 오죽하리라고. 자고로 옷은 가게에 직접 가서 사 입어야 되는 것이여."
"알았어. 마음 동하는 대로 해. 사 오면 입어보고, 안 사 오면 그것으로 끝이고."
사 왔다. 반품이 된다고 해서 사왔단다. 입어라도 보라고. 한데 입어보니 괜찮았다. 언니도 그럴싸하다고 했다. 외출복으로도 한두 번은 입을 만하겠단다. 드디어 내가 진보라색 원피스를 입는구나. 밤새 마음 부풀었던가. 남은 환절기, 부지런히 입자고 다짐했다. 올봄과 올가을 한해, 열심히 입고 다 입었다 싶으면 까지껏, 그때 가서 홈드레스로 입자.
아침 기운이 그럴싸하게 나의 일상으로 들어와 있는 시각, 출근을 위해 입어본 딥 퍼플 드레스는 어젯밤에 입어본 것과는 달랐다. 언니 말이 맞았다. 촌스럽기가 극에 달했다. 일곱 시가 넘고 벌써 짱짱해진 햇살 속에 내 몸을 감싼 진보라는 익어가는 봄날, 태양의 힘에 편승하여 활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내가 지금껏 봐 온 진보랏빛 중 유난스럽게 밝은 빛이었다. 방방 튀는 색깔이었다. 거기에 보통의 롱치마가 아니었다. 모델이라야 어울릴 만한 길이었다.
허리 라인도 그랬다. 애매한 선이 허리를 에둘러 돌아가는데. 밍기적거리는 근육들이 마땅한 곳에 숨어들 수 없어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가는 허리선 안쪽 뼉다귀들이 집을 나가고 싶어 했다. 빈약한 내 몸은 소용돌이치는 천 속에서 허우적거리기에 딱 알맞았다. 이런. 입어, 말아? 반품은 이미 물 건너간 일. 최근 몇 년 사이 내가 사 입은 의상 중 최고가였다. 일단 입고 출근하기로 했다. 검은 색깔의 외투가 충분히 방패막이가 되었다.
접어두자. 나 스스로 내가 걸치고 있는 색깔의 값싼 도드라짐에 놀라 어쩔 줄 몰라했던 시각. 좋아하는 색상의 드레스를 입었네요를 외치면서 어쩌자고 그리 요상한 색상의 옷을 입었느냐는 물음은 애써 생략하던 후배의 표정을 버리기로 하자. 머플러로 배색을 맞춰 그래도 올봄에는 몇 번 입자고 다짐하면서 우리 엄마의 손재를 떠올렸다.
나, 대도시로 전학을 간다고 우리 엄마가 5일 장 포목점에서 천을 떠 와 재봉틀로 손수 만들어주셨던 원피스. 아니 전학을 간 후에 만들어 내게 입히셨던까. 방울방울, 크고 작은, 파랑과 초록 동그라미들이 춤을 추던, 흰색 바탕의 파랑과 초록 땡땡이 원피스. 허리에는 바이어스를 제법 두껍게 바느질하여 오른쪽과 왼쪽에서 각각 한 줄씩 길게 엮으셨다. 내 가는 허리 뒤로는 양쪽 줄을 모아 곱고 예쁘게 리본을 만들어 맬 수 있게 해주셨다. 내가 그 원피스를 입고 등교하는 날이면 나는그 도시 최고 크기의 국민학교에서 대도시 재벌 가 손녀들을 물리치고 단연코 가장 이쁜 공주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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