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로 걸을 수 있는 봄의 아침이 따스했다.
얼마나 기다렸던가. 맨발로 걸을 수 있는 봄의 아침. 민낯의 발바닥이 춤을 추고 싶어 했다. 3박자 왈츠. 따안~딴딴, 따아안, 딴 딴. 원목 베란다 바닥에 내려앉아 있는 봄볕이 수줍어 어쩔 줄 몰라 하는 나의 발바닥을 부드럽게 애무한다. 발바닥은 내딛기도 전에 미리 예감한 듯 따스한 감촉을 온몸으로 받아 안아 기쁨 가득한 오른, 왼 양쪽 발에 가뿐한 춘 사월 빛을 싸안고 갈마든다.
이번 주에는 나의 온몸 세포들을 느슨하게 풀어놓고 싶었다. 자기중심으로 돌아가 가만 각자 자기 영혼들을 쓰다듬어 부드럽게 어루만지면서 쉬게 하고 싶었다. 만져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푸석푸석한 나의 근육들이 안쓰러웠다. 하루만 실내운동을 거슬러도 바슬바슬, 바스러질 듯 연약한 나의 앙상한 뼈들과 잠시, 안녕의 인사를 멈추고 싶었다.
주중에 언니가 내려와 함께 생활하면서 저녁 메뉴가 휘황해졌다. 막걸리며 소주를 마시는 저녁이 많아졌다. 뱃살이 낭창낭창. 배 속에 내용물들이 적당히 제 자리들을 잡아 들어앉았다. 따북따북, 세월을 담은 우리 집 뒷산 골에 형성되어 있는 지층처럼 내 살 속에는 차곡차곡, 3대 영양소 및 무기물을 표시하는 영양분이 색색이 쌓여있을 것이다. 튼튼하고 탄탄하게 살집이 부풀어 오르고 있다. 호흡이 가쁠 정도이다. 멈춰야 한다. 하여 언니가 떠나고 난 목요일 저녁부터 일요일 점심까지 최소한의 곡기로 내 몸을 정화하는데도 불구하고 일요일 저녁부터 또다시 나의 배에 내려앉은 포만감의 무게가 둔중하다. 몸무게가 고정될까 봐 두렵다. 식탐을 멈춰야 한다. 막걸리로부터 안녕을 받아들여야 한다.
맨발 시동이 가능한 김에 베란다의 화분의 위치를 바꾸는 등 오늘 상당 시간을 베란다에서 보냈다. 베란다에 내려앉아 있는 봄볕이 따뜻하다. 맨발로 원목 위를 걸음 하는 기분이 참 산뜻하다. 나날이 싱싱함의 연초록으로 새싹을 밀어 올리는 화초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녀석들은 수십 년의 생에서 최근 몇 날을 살아낸 천양지차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나같이 초록 새 살을 듬쑥듬쑥 세상 속으로 내밀고 있다. 상당수의 사람은 대부분 화초를 제대로 살려내지 못한다면서 내가 멋지고 튼실하게 키워서 안겨주는 것도 거부하는데 말이다. 어떤 녀석은 이삼십 년을 분갈이도 거른 채 살게 하고 있다. 미안하다. 긴 시간 살아준 녀석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하여, 그 녀석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네가 사람보다 낫다.'
글쎄, 화초보다 낫지 않은 사람은 누구일까.
오늘은 현재 진행하고 있는 다이어트, 열여섯 시간 간헐적 단식의 규칙을 위반해도 될 것 같았다. 무시하고 싶었다. 베란다의 여러 화초들, 꽃들, 초록 이파리들 사이, 커피가 무지무지 댕겼다. 모과차로 대신할까 하다가 그도 아니다 싶어 참았다. 디카페인이라면 괜찮으리라 생각했다가 또 참았다. 오전을 물만 마시면서 잘 견뎠다. 여기에서 물었던가. 단식을 음식 섭취를 멈춰야 하는 시각, 이른 아침 출근 직후 커피를 몹시 마시고 싶어서 어쩔 줄 몰랐지. 단식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어. 커피를 마시는 것이 단식에 어긋나는지를 물었지. 어떤 분이 답해주셨어. 칼로리가 측정되는 것이니 안 된다고. 그래, 참았었다, 꾹!
화초들과 커피와 모과차와 다이어트와 칼로리 등을 오가면서 내가 좋아하는 철학자인 칼 융과 프로이트를 떠올렸다. 내가 쓰고 있는 가면은 어떤 빛깔일까. 의식 안의 커다란 무의식. 칼과 프로이트. 그 둘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논한 내용들이 떠올랐어. 오늘 베란다 봄볕 속에서의 내가 참 궁금했어. 융은 그랬다지. 무의식을 좀 더 넓은 의미로 확대하자. 유아 성욕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머물러 있는 프로이트와 말싸움 끝에 결국 금이 가고 만 두 사람 사이. 나는 사실 두 철학자의 철학을 모두 이해한다. 그러면서도 칼 융이 나와 더 가까이 산다.
와우, 세기를 점한 두 철학 대가들의 의견을 모두 이해한다? 그래, 이해한다. 한 사람의 성장 배경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것에 끔찍할 정도로 제대로 들어맞는 이라고 알려진 프로이트. 알려진 대로 그의 성장기가 그렇다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프로이트는 당연하다. 프로이트의 철학을 사는 이들을 우리는 제법 본다.
분석심리학으로 프로이트 성적 욕구에의 집착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공격한 칼 융의 페르소나. 그것도 당연한 철학이 될 수 있다. 각각 그렇지 않은가. 인간의 존엄성을 우리는 수없이 읊지 않는가.
"ONLY ONE."
목사 아버지, 정신병 중의 어머니, 시설에 보내진 엄마와는 함께한 세월이 없는 융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이해할 리 없다. 융은 당연히 프로이트의 성적 집착과 오이디푸스 컴플레스를 이해할 수 없었을 거다.
융의 페르소나. 상황에 맞게 변신하는 페르소나를 우리는 또 살고 있지 않은가. 며칠 전 늦겨울 추위 온다길래 하룻밤 밤샘 난방으로 밤을 지낸 나. 춘삼월 그깟 추위가 무서워서, 혹 꽃샘추위에 몸 사그라져 결근하게 되면 어떡하나 싶어 몸 사리던 나. 오늘은, 날짜에 맞지 않게 급격히 올라간 봄 기온에 홀랑 정신을 뺏겨 나신으로라도 봄볕을 즐길 수 있다 싶은 마음으로 마냥 즐거워 베란다를 쉼 없이 오간 나.
지금껏, 이토록 긴 시간(나는 가끔, 아니 제법 내가 살아온 세월을 꼽으면서 끔찍하다. 너무 많이 살아버렸다.)을 살아내면서 내가 써 온 페르소나는 몇컷일까. 오늘 맨발로부터 시작된 나의 변신이 참 대단했다. 칼 융의 분석심리학이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나 나에게는 이 짝 저 짝 모두 다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파이잉', 속웃음을 봄볕에 흘렸다. 가끔, 아니 화초들을 자세히 살피게 되는, 오늘 같은 날이면 이 녀석 저 녀석에게 내뱉는 나의 언어들은 분석심리와 정신분석의 양 쪽 모두를 거침없이 오간다. 내 정신인 것도 같도, 남의 정신인 것도 같은.
나의 자아는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를 상황에 맞는 가면이다. 어떠한 방법으로도 억누를 수 없는 생에의 집착에 징그럽기도 하다. 물론 성욕과는 먼 거리이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떠올릴 겨를도 없는 유, 청소년 시절을 조용히, 아주 보통의 방식으로, 남녀유별 부모 재실의 상황을 살았으므로. 그러므로 나의 자아는 칼 융에 조금 더 기댈 건더기를 지닌 페르소나이지만 말이다. 즉 봄이 내 앞에 와 있으므로 인류의 경험 속 봄에 해야 할 일을 기꺼이 해내는 나는 그저 원형 심리를 저지르고 있을 뿐이지만 말이다.
자, 진정한 나. 자기. 나의 안쪽 무의식과 바깥쪽 무의식을 넘어 나의 가운데, 나의, 나의 전체의 중심인 나의 중심을 찾아 이제 대담하게 길을 열고 문을 만들어서 나아갈 수 있는 시기가 되었다. 장년이다. 기껏 화초 재배에서만 나의 페르소나를 뽐낼 것이 아니다. 어서, 대담하게, 내가 쓰고 있던 젊은 날의 가면들과 안녕을 할 일이다. 어서. 내 안과 밖의 무의식, 나의 마음의 문을 열고, 진정 나를 돌아다보면서 과감하게, 앞으로 나아가자.
나의 부드러운 노년 살이를 위해서 진정 나를 찾아 나서자. 늙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힘을 어서 찾아 나서서 준비해야 할 때이다. 내게 잠재된 무의식 속, 진정 나의 중심 자아에는 어떤 힘이 내재되어 있을까. 어떻게 해서 새로운 나로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봄볕에 몸을 내놓고서 나의 친구들, 내 자식들이기도 한 여러 화초들을 돌아보면서, 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새삼 이제 새 길 찾아 나설 필요가 있을 것 같은 나의 현재를 직시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던 하루였다. 느긋해진 마음 덕분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마침 가락 나의 노년을 미리 준비해 봤다. 분석 심리학자 칼 융의 철학을 빌어서. 물론 프로이트의 도움도 받을 거다.
오늘도 유튜브 강의를 여럿 들었다. 장하준 교수의 경제학 강의를 한 시간 더 들었다. 이차전지로 깃발을 휘날리고 계시는 배터리 아저씨의 강의도 며칠 전 들은 것을 또 들었다. 오만 가지 생각을 했다. 최준영 박사님이 내신 새로운 류의 위인전 강의도 들었다. 박사님의 책은 꼭 사서 읽으리라. 한국의 결제 상황을 고려한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을 1, 2부로 듣고, 조봉한, 깨봉 박사님의 챗 GPT강의도 다시 들었다. 히틀러의 오른팔이었나, 아님 왼팔이었을까. 괴벨스의 생애도 1, 2부로 연속 강의를 들었다. 아침에는 느닷없는 텔레비전의 '세상에 이런 일이'를 잠깐 시청했다. 그리고 또 무엇을 했던고. 아하, 보험 강의도 들었구나.
다시 내일을 위해, 주중을 위해, 내 일터로의 출근을 위해 자야 한다. 저녁이다. 환절기 건강 관리에 유의하자. 아파트 정원의 철쭉들은 내가 집에 있는 시간에 모두 환한 웃음으로 태어나 있었다. 어제 보다가 멈춘 넷플릭스의 영화 '그들이 아버지를 죽였다.'를 시청하고 잠에 들 참인데 괜찮은 일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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