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웠다.
병원을 다녀왔다. 언젠가부터 일 년에 한 번씩(어느 해에는 두 번도 갔구나.) 검진을 간다. 정부 주도 건강검진이 아닌 순수 개인 자본을 사용하는 병원행을 말한다.
일부러 토요일을 예약한다. 금요일 밤, 어젯밤 잠을 자면서 거짓말을 조금 보태서 백 번을 주문을 외웠다.
'내일 아침에도 평일 출근하듯이 일어나서 병원을 가야 한다. 알았지? 기상 알람이 뜨면 벌떡 일어나는 거야, 알았음? 알았지? 알았다고 해! 그리고 어서 자.'
물론 같이 사는 또 한 사람에게도 전했다. 어제 아침에 전한 주문이었다.
"나, 내일 병원행. 첫 타자로 진료받을 거야. 기상 알람이 울렸는데도 안 일어나면 깨워줘. 어서 병원에 가라고 해."
남자는 금요일 저녁, 과메기 초대에 응해서 술을 몽땅 마시고 왔다. 나는 자립을 실천해야 했다. 백 번을 더 외워야 했다.
혈압 재기부터 짜증이 났다. '화이트 증후군'이라나. 집에서 재는 혈압은 120과 130 안팎을 드나드는데 병원에 가서 재면 엄청나다. 우~. 시위를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시위 대상이 명확하지 않아서이다.
왜 이렇게 변변하지 못하는가. 나는. 내가 정한 나의 주치의는 할아버지시다. 대대손손 의사 집안이라서 이젠 아들이 그 뒤를 이었다는데 나는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을 고집한다. 만날 때마다 말씀하신다.
"운동은 하나요? 뛰는 것처럼 걸어요."
"예, 열심히 하고 있답니다. 출퇴근을 걸어서 해요."
"그래요, 열심히 운동해요. 자기 건강은 자기가 책임을 지는 겁니다."
느닷없이 골다공증 검사를 하라고 했다. 영상의학실을 다녀왔다. 뼈는 야무지단다. 6개월 전 피검사 결과 고지혈증 냄새가 난대서 준 약을 이야기하셨다. 약은 가져갔는데 별로 먹지 않았다고 답하니 무서운(무써~운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맞춤법만 받아준다면) 말씀을 하신다(사실 약을 어디에 둔 지도 기억에 없다, 이런!) 우~. 내가 나물을 소여물 먹듯이 먹는데 무슨 고지혈증일까? 겉으로만 알고 있는, 조금 들은 적은 있으나 본 적은 없는 병명이어서 기억에 신경을 쓴다. 의료 쪽 새로운 분야를 또 공부해야겠구나. 외워 가야지. 오늘부터 새 공부 시작이다.
역류성 식도염은 나만 들먹였고 선생님은 반응하지 않으셨다. 내년 건강검진을 보자고 하신다. 오늘 진료는 그것과는 별개로 다니고 있는데 왜 말씀을 끊으실까. 내년을 기약하면서 병원을 나서는데 몸도 무겁고 마음도 돌덩이를 안고 있는 듯하다. 괜히 세상 속 내 존재가 부끄러워졌다. 왜 이렇게도 내 몸은 벌써 허술하고 남루하고 엉성하고 빈틈이 많을까. 벌써.
뼈는 굳건하다 하니 그만그만하게 살아낼 것도 같다. 오늘 아침 잤어야 할 늦잠을 못 잔 것이 이유인지 집에 돌아오자마자 잠이 자꾸 나를 깨웠다. 달걀 프라이 둘에 고구마들을 쪄두고 물김 국을 끓여놓고 놀러 간다는 톡을 남긴 남자가 너무 부러웠다. 씨, 역류성 식도염에는 고구마가 좋지 않아서 먹지 않는다는 말을 곤 백번을 했는데 자꾸 찐다. 어디서 가져왔을까. 짜증 난다. 1년여 내게 짜서 바치던 감자즙을 잊다니. 예상 수명 120으로 축복받은 남자는 아직 나처럼 일부러 병원을 가야 하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얼마나 좋을까. 산이 불러 늘 산을 찾아다니는 습관으로 얻은 행복일까 싶어 산을 좀 다녀올까 하다가 그냥 집으로 올라왔다.
글을 썼다. a4 용지 한 장이 넘은, 200자 원고지 열서너 장 정도의 단편을 썼다. 아날로그식으로 1차 글을 썼다. 종이에 연필 쓰기를 해서 한글 문서로 옮기려는데 잠이 쏟아졌다. 빈속이라서 쉽사리 이불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잠자는 시각도 신경을 쓴다. 역류성 식도염은 음식물을 배에 넣은 시각이 한참 지난 후에 잠을 자야 한다. 그렇게 배웠다. 하여 나는 낮잠을 못 잔다. 내 아침 이불은 내 몸만 빠져나온 채 헝클어져 있었다. 어서 들어와 누우라며 나를 반겼다. 텅 빈 내장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감사했다. 물론 눈을 감고 십 분을 채 넘기지 못했다.
오늘도 그제와 어제에 이어 아침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시럽 더하기 원두커피를 뺄 수 있었던 아침이 고마웠다. 나를 이길 수 있었다는 데에 내가 큰 기쁨을 느끼는 아이러니를 어찌 해석해야 하나. 늦은 점심 식사 후 베란다의 화초들을 둘러보고 다시 컴퓨터 앞에 섰다. 단편을 한글 문서에 마저 옮겼다. 원두커피 더하기 꿀을 넣어 마시면서 글을 입력했다. 순간 행복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잠시 잠깐이었다.
하루를 돌아본다. 단 십 분이었지만 낮잠을 잤다. 병원을 다녀온 직후 그냥 하루를 낭비하고도 싶었다. 낡은 육신이 부끄러워 고요 속으로 침잠하고 싶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하루이고도 싶었다. 그러나 다시 일어났다. 그리다가 만 히스 레저에게도 조금 선을 더했다. 그의 이상야릇한 미소가 살아있어서 기뻤다. 내일은 끝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오랜만에 불후의 명곡을 보면서 캘리그래피도 썼다. 어제 보다가 잠들었던 영화 '위선적인 영웅'도 마치고 새 영화 '아이 애나'를 보기 시작했다. 마저 보고 잘 예정이다. 읽고 있는 책도 몇 줄 더 읽다가 꿈나라로 갈까 한다. 나이 들수록 잠을 잘 자야 한단다.
뚜렷한 주제 없이 종일 내가 했던 일을 무질서하게 늘어놓는 일기이다. 초등학생이 된 기분이다. 새벽 세시에 눈을 떠서 리오넬 메시의 경기를 좀 볼까도 싶은데 나는 아마 떨려서 볼 수 없으리라. 기적이 일어나기를! 오늘은 아침 일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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