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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하루 공개

체념과 인정, 더 나아가 포기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생을 우리는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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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념과 인정, 더 나아가 포기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생을 우리는 산다. 

 

 

 

오늘 아침 첫 번째로 만난 하늘

 

 

업무 처리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허리를 좀 펴고 싶어 고개를 쑥 들어 올린다. 뻐근하다. 상반신은 하늘로 치솟고 싶은 힘을 주체하지 못하여 으르렁거리고 있다. 하반신은 종일 선 채 작업을 한 덕분에 선명하게 뼈 드러나도록 지탱의 힘을 생산하느라 바쁘다. 오늘 아침은 아예 크롬을 열지도 못했다. 이곳 문 열기는 당연히 잊힌 채 하루가 진행되었다.

 

 

 

일터에 도착하자마자 쏟아져 있는 일 처리를 하느라 바빴다. 더군다나 아날로그를 즐겨 사는 자인지라, 변명 같지만, 인터넷 문서를 열어서 해야 하는 작업이 여의치 않아 애를 먹었다. '애를 먹다?' 창자를 먹다? 순간 관용 표현이라지만 질기게 악다구니를 퍼붓는 듯한 언어 구사로 생을 버틴 우리 조상님네들께 술을 한잔 건네고 싶어졌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들이 몸소 체험한 위트의 현장을 훔쳐보고 싶다고 느꼈었지. 전수받자는 생각에서였다. 징그럽게 독기 어린 표현을 생활화하면 차라리 하루하루 버티는 힘이 자연히 샘솟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내 앎의 범위 안에 그렇게 고정하여 알고 있던 '애를 먹다'는 저 위, 현 한글을 관장하는 국립국어원이 '매우 힘들다' 정도를 뜻한다면서 '애'의 어원은 알 수 없다는 답변을 내보이자 나는 참 허전했다. 배짱과 오기로 살던 시절의 일이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쇼팽을 연주하고 있다. 이런 악곡의 구성을 뭐라 하던가. 악절이 반복된다. 단순 반복을 하다가 어느 한 음을 올리고 내리면서 살짝 변형을 주는 방식이다. 사실 이런 날 즐겨 듣는 모차르트의 레퀴엠으로 시작한 오후였다. 그토록 좋아하는 '진노의 날' 부분도 인지하지 못했다. 하루가 다 되었다 싶어 밖을 내다보니 이미 어둠이 내려와 있고 문득 들려오는 음악을 확인해 보니 조성진의 건반 위에 와 있다. 녹턴. 쇼팽. 단단 단단 단단 단단. 반복되는 양상이 내 일상을 닮았다. 가끔 위아래 음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도 내 영혼 속 방황의 모습이다. 이 음악이 끝나면 나의 방황도 끝나게 되는 법칙이 작용한다면 참 좋겠다. 마법처럼 말이다. '녹턴'이 조용한 밤에 어울리는 음악일지언정 뭐 어떤가. 지금 나는 뭔가 씻어내고자 하는 것에 애를 끓고 있다. 이럴 때 음악이 없었으면 어찌할 뻔했는가. 

 

 

 

오늘 아침 두 번째로 만난 하늘

 

 

어제에 이어 오늘도 한때 힘센 비가 초겨울 대지를 우악스럽게 점령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코로나19'의 확진으로 일터 고정 인원의 빈자리가 계속되고 있다. 오늘은 두 자리이다. 안부를 묻고 답하려는 의도로 전화를 돌려 증상을 물으면 목이 아프다고들 한다. 요즘 코로나19 증상의 대세이다. 목을 조심해야겠다. 우두둑우두둑 겨울 고요에 맞지 않게 비 쏟아질 때 하필 바깥 외출이어야 했다. 비를 맞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나도 목이 좋지 않다.

 

 

 

늘 그렇지만 하 심상치 않은 건강 상태가 요즘 두드러지게 두려워진다. 혹 나도 다시 걸리지 않을까. 오늘도 목을 두들두들 두들두들 휘어 감고 출근했다. 어제보다 배로 두껍게 목을 감쌌다. 검은 천으로 목을 가리고 나니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단두대에서부터, 귀여우면서도 능청맞게 매달 수 있는 목걸이까지. 묘한 아이러니를 담아 꾸민, 색욕을 내놓고 드러내는 목 장식품까지. 내친김에 목에 꼭 맞는 목걸이를 착용하여 허술한 머플러의 흔적을 잠재울까 했으나 만족할 만한 목걸이가 없었다. 아하, 십자가가 매달린 검은 목걸이가 있었는데 하고 몇 번, 소위, 주얼리 모음 상자를 뒤적였으나 없다. 생각해 보니 올봄이던가. 지고지순한 기독교인인 선배에게 선물했다. 내일은 꼭 그 장식을 하고 출근하여 인증 사진을 찍어 보내라고 언니에게 업무 메일을 보내야 되겠다. 그녀에게는 얼마나 성스러울까. 내게 있었으면 장식용 잔챙이에 불과할 텐데 말이다. 그래, 사람 못지않게 물건도 적재적소가 있다. 이를 건강하게 실천한 내가 대견하다. 

 

 

 

오늘 아침 세 번째로 만난 하늘

 

 

 

'이놈의 핸드폰을 없애야만 돼.'

어제 반신욕을 마치고 욕실을 나서면서 거칠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들어갈 때에는 분명 읽고 있던 두꺼운 책 한 권을 들고 들어섰는데 축구 경기 시간을 맞추려고 함께 챙겨갔던 핸드폰을 끝까지 들고서는 놓지 못했다. 바보, 바보, 바보, 바보야. 백날 천날을 이러고 있다. 버려? 어떻게 버려? 핸드폰으로 하는 일이 또 수만 가지인데. 쫑알거려보나 안 되는 것을 빤히 안다. 언제나 핸드폰의 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인생이란 무엇인가'가 내 평생 짊어진, 짊어지고 갈 업이라 여겼는데 요것, 핸드폰이 더한 내 목조임이지 않을까 싶어 두렵다. 벗어나고 싶다. 

 

 

 

여전히 오후 내 일터에는 쇼팽의 녹턴을 조성진이 내게 연주해주고 있다. 조성진도 내가 내 생을 그래도 이만큼이라도 진행할 수 있게 하는 힘을 주는 이를 적는 목록에 이미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어제 잔뜩 무겁기만 하여 가상의 두통을 앓게 하던 공중의 기가 오늘은 사알 살 녹아내렸다. 어제 죄다 가진 것 다 내려놓듯 몸 부서지면서 내리던 겨울비 덕분일까. 어젯밤 축구 경기를 시청하던 중 2대 0에서 '패'를 감지하고 포기해버린 예감 덕분일까. 

 

 

 

우리들의 일상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이 때로 체념이, 때로 포기를 동반한 인정 사이를 오가듯이 어제 축구 경기도 그랬다. 초반 일고여덟 차례나 이어진 코너킥을 한 점 슛으로 성공시키지 못했다. 힘 붙고 힘 더해지고 판 내 편으로 움직일 때 한 방 터뜨려야 했는데 하지 못했다. 골 결정력이 여전히 안타까웠다. 되든 안 되든 냅다 두세 방 쐈으면 싶었는데 그리 하질 않았다. 판은 상대편으로 힘이 넘어갔고 분명 핸들링이다 싶은 공이 골인이 되었다. 한 골 그것쯤이야, 뒤쫓아가는 팀에게는 도약을 위한 굳센 의지가 다져지려니 했는데 또 상대방에게 골을 내줬다. 그들은 건강했다. 앞뒤 볼 것 없이 덤볐다. 몹시 불안했다.

 

 

 

아하, 우리는 결국 이 정도였구나, 어쩔 수 없구나 인정하게 되었다. 이쯤에서 만족하는 것이 상책이다 싶어 포기하였다. 더는 오르질 못하는구나 체념하게 되었다. 젊은 피 이강인의 수혈로 바지런히 움직여서 두 골 연속 조규성의 골이 터졌지만 말이다. 그래, 그렇다. 체념과 인정과 포기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것이 사람살이이다. 우선 체력적으로 많이 부대끼더라. 열심히 싸운 선수들에게 수고했다고 박수를 보내자. 어쩔 것이냐. 그만그만한 몸인 것을, 천생인 것을. 그러나~ 혹시, 혹시 말이야. 그럴(?) 수도 있어. 하늘도 가끔 뒤집힌다고! 한 가닥 희망을 조심스레 어루만지면서 오늘을 조잘조잘 풀어썼다. 모두 좋은 밤들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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