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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하루 공개

부디 넘치지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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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넘치지 말지어다. 포도주를 한 잔만 마셨어야 했다.

- 아래 글에서는 '포도주' 대신에 '와인'으로 쓴다.

 

 

 

와우. 딱 이런 모양의 와인이었다. 이런 빛깔의 와인!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이틀 전에 싸디싼 와인 한 병을 사 왔다. 느닷없이 '불면에는 잠들기 전 와인 한 잔~'이라는 말을 들었던 것이 떠올라서였다. 한양에서 내려와 있는 바로 손위 언니에게도 한 잔 술은 반가울 것이라 싶었다. 젊어서 과부가 된 언니도 하룻밤 쉽게 잠드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어제 흘려 읽은 건강 관련 잡문도 한몫했다. 여러 글귀 중에 '불면증이 치매의 원인 어쩌고, 저쩌고'라는 글귀가 내 눈을 붙잡았다.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요즘 부쩍 불면으로 헤매고 있는 참이어서 더더욱 내 눈을 잡아당겼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떠올랐다. 아이에게 물질적인 어떤 것을 크게 물려줄 생각도 없는지라 후손에게 짐이 되지 않은 삶은 꼭 살고 싶다. 내가 꿈꾸고 있는 미래를 떠올려보니 이것은 결코 아니다 싶었다. 치매는 무섭다. 

 

 

남자가 굴을 사 온 댔다. 굴전을 부쳐 주겠으니 저녁 먹기를 기다리라는 내용이었다. 폰을 닫는 내 손가락에 힘이 가득 찼다. 지금이 꿀맛 못지않은 굴의 철이다. 다른 해 겨울 같으면 생굴을 한 바가지 사 와서 와그작와그작 배불뚝이가 될 정도로 구워서 먹는 것이 마땅한 절차였다. 올해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함께 사는 남녀의 건강 검진 문제에 부딪혀 매년 겨울이면 해 오던 일상 몇을 그만 거르고 말았다. 서운함도 없이 그만 지나치고 말았다. 아직 생굴을 먹을만한 시기를 넘긴 것은 아니겠으나 올겨울은 그저 방안 퉁수가 되어 다니는 길만 매일 왕복할 뿐이다. 그래, 오늘은 굴전에 와인 한잔을 하고 잠을 청하자. 치매는 아니 되노니.

 

 

가까운 대형마트에 언니와 함께 갔다. 느닷없이 다녔던 회사의 고문 역할이라도 하는 것처럼 임시 근무를 하고 있는 언니는  와인 판매대의 십만 단위 앞에 섰다. 아들에게서 받는 용돈에 더해지는 일당으로 받는 수입이 있으니 한턱을 내고 싶다고 벼르던 차다. 어느 나라 산물을 사겠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딱 잘라 말했다. 어느 나라 산이 문제가 아니라고. 고작 뇌를 교란시키는 일을 하는 주류를 무슨 십만 단위나 들여 사먹는 것이냐고 태클을 걸었다. '쌀수록 주류답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무섭다, 둘이 번 사람들이 더 무섭다는 말을 언니는 바로 내뱉었다. 곧이어 언니는 내 소비 패턴을 아는지라 값이 점점 낮아져 가는 왼쪽, 왼쪽 라인으로 나를 따라 몸을 돌렸다.

 

 

낙찰. 6천 얼마였던가. 아무튼 6천몇백 원짜리 와인을 한 병 사서 들고 왔다. 스페인 산이었다. 남자가 굴을 한 그릇 정도 싸들고 왔다. 좀 더 많이 가져오지 왜? 툴툴거리는 나는 무시당했다. 언니가 있는 이상 소매 걷어붙이고 금방 전을 부칠 수 있는 사람은 언니다. 야무지게도 해냈다. 정말이지 내가 해낼 시간의 5분의 1 정도의 시간에 굴전을 몽땅, 그것도 맛나게 부쳐냈다. 꼴깍꼴깍, 벌써 입안이 흥건했다. 침샘이 시각세포에서 출발한 자극과 반응 체계의 명령을 내려받아 즉각 자기 공장을 움직였다. 

 

 

굴전. 세상에나, 사진 찍는 것을 잊었다. 아직 제대로 된 블로그 운영자가 아직 아니나 보다.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고급 위스키냐 싸디 싼 스페인 촌구석 생산의 와인이냐(값이나 병의 모양새나 로고 등으로 봐서 분명 스페인의 촌구석 산이라 여겨졌다. 스페인이여, 미안!). 한 남자와 여자 둘 사이의 실랑이 끝에 남자는 와인과 소주, 여자 둘은 와인을 마시기로 합의를 봤다. 오랜만에 위스키 잔이며 와인 잔이 식탁 위에 등장했다. 낯설었다. 언니 없이 부부 둘이서만 마신다면 분명 나는 손 벌려 들고 내리기가 가까운 싱크대 주변의 머그잔에 마셨을 것이다. 격식 차려 살기에는 사선으로 만나는 대각선을 쫙, 철저하게 가새표 선을 그어 사는 나는 이것저것 상식적인 규칙이 참 어설펐다. 

 

 

어설픔에서 출발한 와인 마시기에서부터 삐그덕 거리기가 시작되었더라면 차라리 좋았을 것이다. 대체 이게 와인인가부터 첫 잔 이후 대화가 시작되었더라면. 와인도 아니고 뭣도 아니고. 술도 아니고 주류도 아니고. 뭣도 아니고 된장도 아니고. 이거 이탈리아 생산물도 아니도 스페인 생산물도 아닌 것 같다. 이거, 분명 이웃 나라 거기 생산물이다. 등등 오가는 대화가 비워가는 잔의 수가 늘어갈수록 원초적인 언어들의 적나라한  배열로 아귀다툼을 벌였다면 나았을 것이다.

 

 

, 그만. 그만. 조금이라도 뇌가 삐그덕한다는 느낌이 들면 됐어. 그냥 술이면 어떻고 값이 아주 비싼 명물 주류면 어떠냐. 단지 어감 차이일 뿐. 이 나이를 살았는데 어감, 고깟 어감 차이로 술의 맛을 판단해야겠느냐. 그냥 술이면서 주류라 치고 마시자. 그러니 내 말 하지 않았느냐. 어찌 육천 얼마짜리 와인을 이 고귀한 굴전에 가져다 대려 하느냐. 굴들이여 미안하이. 미안, 미안, 미안. 너희들은 저기. 저기 저, 저 말이야. 제레미 아이언스가 최고급 브랜드의 양복을 입고 등장하는, 거 영화 제목이 뭐더라, , 그런 영화 속 파티 상차림에 나와야 하는데 말이야. 대한민국 소도시의 당신들과 나, 소도시의, 소시민의, 저녁 술상 자리에 앉히다니. 쏘리, 쏘우 쏘리. 굴전이여.

 

 

제레미 아이언스 좋아하네. 그 남자도 늙었어야. 세월에는 장사 없어야. 제레미고 네 레미고 각자 잘들 살아. 남자는 아내 있어 다행인 줄 알고. 여자는 남자, 남자? 있으나 마나 해도 있어야지. 그 힘이 얼마나 큰지 없어 봐야 안다. 싸우지들 말고 잘 살고. 그래도 남편이야. 힘이어야, 남편이. ? 남편이 힘? 뭔 힘? 무슨 힘? 힘이 장사여야 힘이라도 되지. 뭔 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사람이어야. 귀찮아. 남편도 마누라도 다 귀찮아야. 그냥 각자 살면 좋겠어. 그래, 잘 살아. 잘살아봐. 나 없이 잘살아봐.

 

 

이런저런 가벼운 대화들이 오가길 바랐다. 술을 시작할 때는 말이다. 그러나 지극히 이성적인 인간 세 사람은 그저 와인 잔, 소주잔만 채웠을 뿐 조용히들 잔을 비워냈다. 5도로 표시가 된 와인은 술이 되질 못했나 보다. 자칭 술꾼이라고 말하는 데에 1분 1초도 지체하지 않은 남자는 두세 잔 후 바로 소주로 방향을 전환했다. 늙어가는 아들 결혼만 하면 '온 세상 천상천하 나빌레라 누빌레라'를 외치면서 살겠다는 청춘과부는 회사 식당 이야기로 바빴다. 나는? 어, 이것, 와인도 아니고 뭐도 아니고 이게 뭐지? 요 앞 자그마한 마트에서 산 이천 원짜리 와인 맛도 이러지를 않았는데, 대체 이게 뭐람? 이 생각을 위아래 이빨이 만들 수 있는 비정상적인 동그라미 안에 장착해 두고 와인과 굴전을 왕복 운행했다. 

 

 

와인 병은 깔끔하게 비워졌다. 소주 한 병도 액체의 물결을 더 이상 일으키지 않았다. 굴전도 모두 인간들의 내장으로 쑤셔 박혔다. 그리 우아하지 못한 와인잔은 바로 씻겨져서 장식장 제 자리로 복귀했다. 단 3초를 넘기지 않고서도 눈을 감고 숙취에 들어설 수 있는 남자는 식탁 의자에 앉아 머리를 조아리다가 침실로 직행한 후였다. 청춘과부였다가 이제는 돈 많은 마나님이 된 아줌마는 새벽 출근을 내세워 방으로 입실해 주무셨다. 나는? 나의 불면증 치료에 단 한 푼의 효과라도 발휘하지 않을까 싶어 시작된 와인 마시기였다.

 

 

자정이 다 되었다. 그리고 있던 그림을 완성했다. 아니 그냥 이젠 그만 그리자는 생각으로 마감했다. 사진을 찍고 나니 자정에서 새벽 한 시로 때는 기울어져 있었다. 아날로그 일기를 썼다. 양발을 가슴까지 올려 걷기를 백 회 실시하였다. 스쾃도 일백 개를 바쁘게 했다. Calf Raise(종아리 올리기 운동)는 일백 회의 반만 했다. 아침 걷기를 못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불속. 잠은 오지 않았다. 나는 영화 보기를 하고 말았다. 결국 하고 말았다. 자정 넘은 시각이었다. 새벽 한 시로 다가가던 시각이었다. 평점 별점 5점 만점에 4점을 넘겼다는 것만 믿고 영화를 봤다. 대만 영화였다. 낯설었다. 생각해 보니 대만 영화는 자주 못 본 듯싶다. 'Dream flight'였다. 순정 러브 스토리였다. 불운의 어린 시절을 딛고 비행기 조종사로 성공하는 한 총각이 시각을 상실해 가는 고운 여자를 끝까지 사랑한다는 이야기였다. 

 

 

밤의 여신 닉스는 아들이자 잠의 신인 히프노스에게 '활동 금지'라는 팻말을 들게 했나 보다. 나 주위에는 어떤 꿈들도 여흥을 즐기지 않았다. 영화를 보던 중 아주 잠깐 나를 건들었던 히프노스는 어미 닉스의 강도 높은 제어에 그만 풀이 죽어 자기 나라로 돌아가고 말았다. 자기의 힘을 나에게 노나주려는 힘이 부족했다. 신이 제힘 잃고 부대끼는 것을 인간 말직의 내가 어이하랴. 새벽 세 시 넘어 영화는 끝났다. 가랭이 사이에 쿠션 둘의 높이를 만들어 다리 올려 오른쪽으로 누워 잠들기를 시도했다. 역류성 식도염 환자는 왼쪽으로 눕는 것이 좋다는 글귀가 떠올라 멈췄다. 왼쪽으로의 시도는 습관이 되지 않아 몸이 낯설어했다. 멈췄다. 똑바로 누워 내 몸 구석에게 안부를 전하면서 시도한 수면도 대여섯 초를 넘기지 못하고 멈췄다. 몸 구석구석을 짚어볼수록 가련함뿐이다. 어쩌다가 주인 영혼을 잘못 만났을까.

 

 

스스로 해내지 못할 때는 외부의 도움을 청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대한민국 경제의 큰 인물이셨던 분이 그러셨다고 하지 않았냐? 해라, 어렵습니다. 해 보기나 했냐. 그래 해 보기나 하자고 덤벼든 용기는 결국 폰 붙잡기였다. 유튜브 수면 명상을 택해 듣기였다. 지난해 언젠가 며칠 효과를 본 적이 있다고 생각되는 '병원에서 수면 명상'을 가동하였다. 그냥 소리였다. 새벽으로 가는 길은 수면 명상과 한 사람의 호흡이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명징한 호흡이었다. 

 

 

문구 해석을 똑바로 하여 실천에 옮겨야 했다. 문구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와인을 한두 잔만 마셔라'였다. 내가 어젯밤 식도를 따라 내장으로 직진 하강하게 한 와인의 잔 수는 무려 대여섯이었다. 나는 기본도 모르는 여자, 녀자, 여인네였다. 오늘 밤에는 딱 한 잔만 마셔야지. 어이쿠나 없네. 마트로 달려가야겠네.  

 

 


오늘부터는 자정 전에 잠들기에 도전한다. 절대로 10시 30분이 넘으면 영화 보기를 시도하지 않기다. 현재 11시 20분.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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