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달 그믐날 밤, 설날 전야를 독수공방이라니, 이게 무슨 일인가.
고요하다. 바깥 기온을 일체 만질 수 없는 거실에 있다. 밖으로 향하는 모든 창문은 고리까지 꽉 잠근 채 서 있다. 거실에서 내다보이는 실외 풍경은 이미 섭씨온도 10도를 넘어선 따스한 초봄이다. 아파트 옆 초등학교도 오늘은 빈 몸인가 보다. 휴일에도 놀이 삼아 뛰어노는 아이들의 조잘거리는 소리가 들리곤 하는데 오늘은 그야말로 적막강산이다. 문을 열어보면 들릴까 싶어 방금 베란다 창문 너머 학교 운동장을 내다봤다. 사람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운동장 둘레 서 있는 나무들도 참 심심하겠다는 생각을 초등학교 1학년 꼬마가 동시 속으로 불러오듯이 떠올려봤다. 단 한 명도 없는 듯싶다. 그야말로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과 이를 염하는 스님 한 분 계시는 높은 산 속 기도처 정도의 사찰 안에 있는 기분이다.
고요함이 고즈넉함의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싶다. 아늑한 기분까지 들게 한다. 다소곳한 대기인 것을 제법 가까이 보이는 키 큰 나무의 이파리 움직임으로 확인할 수 있다. 거의 정지 상태이다. 일부러 어제 이곳에 올린 내가 쓴 글을 소리 내어 읽어봤다. 소리를 내어 읽으면 분명 아무 탈이 없이 썼다 싶은 글 속 오류들이 확인되고 줄줄 줄줄 읽는 입을 갸우뚱하게 한다. 어쩌자고 이런 글을 썼을까. 매일 쓰는 이곳 블로그의 글은 특히 더 그렇다. 아침에 써 뒀던 아침 일기도 올리기 전 다시 한번 꼭 수정한 후에 올려야 하는데 퇴근 후 영화라도 한 편 보고 어찌하다 보면 자정이다.
오늘 다시 읽은 것은 천만다행이다. 열심히 수정했다. 이미 읽고 댓글까지 남기신 분들에게 참 죄송하다. 아마 열댓 분은 읽으신 듯싶은데. 글 뒷부분은 꼭꼭 씹어가면서 한 글자, 한 글자를 발음했다. 수정할 곳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어제는 시간도 시간이었지만 몸이 지닌 에너지가 모두 몸을 빠져나간 듯싶어 쓴 글을 다시 한번 읽어볼 힘을 만들지 못했다. 그냥 올렸다. 어제 오후에 본 영화가 자기 안에 만든 울타리 속에 사람을 단단히 묶어버렸다. 움찔, 자그맣게 몸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다.
목이 잠겼다. 어제 오후부터 노동의 단계로 상승시켜 일할 기회를 주지 않았더니 성대가 자기 본분을 잊었나 보다. 휴일이 길어지면 목이 잠기곤 한다. 진정 성대 보호를 위해서는 평소 기본적인 말은 하면서 생활을 해야 한다는데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산다. 나의 변종, 투명인간을 만들어야겠다. 일상사를 주고받고 대화를 좀 해야 되겠다. 입을 벌려서, 성대를 움직이게 해서 말이다.
반신욕 끝에 하는 저녁의 머리 감기가, 잠을 자는 데에 영향을 끼친다 싶어 불면이 여러 날 진행되면 그것들은 건너뛴다. 반신욕도 머리 감기도 멈춘다. 어제는 그렇게 해야 할 날이었다. 상식적인 밤과 낮이 존재하는 생활을 해야겠다 싶거든, 즉 새하얀 불면의 밤이 대여섯 밤씩 지속된다면 하루는 가벼운 샤워와 세면으로만 하루를 정리해야 한다. 어제는 꼭 그런 방법으로 하루를 마쳐야만 했다. 물기가 단 한 끗도 느껴지지 않은 머리카락을 베개 위에 펼쳐놓고서 이불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러나 어젯밤의 내일을 생각해 보니 내일은, 즉 오늘은 집을 나서야 한다는 것이 떠올랐다. 결국 반신욕과 수면 중 반신욕을 택했다. 머리를 제대로, 어서 말리기 위해 제법 많은 에너지를 소비해야 했다.
자정을 넘어 잠들기에 돌입했다. 눈 떠 보니 여덟 시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오늘 같은 날, 즉 명절 전일이면 어제와는 쌩판 다른, 근엄한 말투로 변신하는 남자도 아직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언제 집을 나선다는 의식의 일정 내용을 조용한 언어로 선언할 것을 기다리는데 느린 몸짓으로 일어난 남자가 아직 이불속의 내게 해야 할 말을 거실 바닥에 내려놓는다. 설날 전일에 해야 할 말의 내용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문장이다.
"이것, 이것 말이야. 까서 삶고 얼려놓은 꼬막이래. 어제 주더라. 세 뭉치인데 둘은 내가 가져갈게. 하나는 내놓을 테니 녹으면 맛있게 밥반찬으로 먹어."
'먹어? 가져갈게?'
'해 먹으라니. 그럼 설날을 나 혼자 지새우라는 것? 뭔 일이지? 이것이 무슨 일이지?'
'설마'
영화를 하나 볼까 하고 켰던 텔레비전을 얼른 껐다. 나 혼자서 지내는 설날 전일이라니. 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가. 진정 알차게 보내야 한다. 대충 보내는 것은 나 스스로 죄를 짓는 일이다. 나를 억누르는 압박감이 커졌다. 오늘, 열심히 살자. 열심히 살지 않으면 안 된다. 토요일이면 보곤 하는, 어젯밤에 놓친 '나 혼자 산다'는 볼까. 불후의 명곡까지는 본다? 아, 아니다. 불후의 명곡은 아마 설 특집으로 재미 삼아서 할 것이다. 내려놓자. 불후의 명곡은 패스! '나 혼자 산다'의 재방만, 처음 부분을 검색해 보고 내 기질에 맞는 내용인지 확인한 다음 시청 여부를 결론짓자.
공부하자. 어느 인터넷 온라인 클래스 캠퍼스에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다. 8개월 여 남았다. 열심히 강의를 듣자. 하고 싶은 공부들, 듣고 싶은 강의들이 수두룩하다. 어서 배우자. 임종의 순간까지 눈 똑바로 뜨고 공부를 하라던 어떤 이의 말씀이 떠오른다. 공부해서 남 주랴. 나를 위한 공부를 하자. 내가 뿌듯하면 된다. 열심히 하자. 듣고 있던 강의를 켜고 이 글을 마감하려 한다.
아름다운 오후로 가고 있는 시각이다. 오늘은 아침 일기 속에 이 글을 담으련다. 아름다운 독수공방을 하리라. 후회 없는 날을 만들리라. 가장 멋진 색깔로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시각의 노을도 폰 필름에 담으리라.
[나 혼자 산다]는 결국 보고 말았다. 기안 84와 코드 쿤스트가 무슨 라인을 만들어서 재미있게 놀이를 한다는 기사를 읽어서이다. 또 한 분의 새 멤버가 등장한다는 소식도 나를 끌어당겼다. 사진작가(?)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종원이라는 배우였다. 처음 본 사람이었다. 그가 피사체를 중심으로 사진으로 찍고자 하는 장면들과의 거리를 조정하는 모습이 완전히 내 취향이었다. 실제 암실에서 그날 찍은 사진을 인화해서 가져왔는데 정말로 작품 사진다웠다. 나도 한 작품 갖고 싶다.
달걀 프라이 둘을 해두고 떠났다. 밥도 있으니 먹으라며 떠났다. 김도 구워뒀다. 내가 잘 먹는 대파도 다듬어서 길게 잘라서 한 그릇 가득 채워뒀다. 양파도 다듬어두고 오이도 한 개 깎아 뒀다. 너무 추우니 혼자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고향 앞으로 떠났다. 남자는 깊은 한숨을 쉬고 집을 나섰다. 그냥 가자고 하지. 철저한 유교주의 교육의 소산인 나는 명절이면 기꺼이 시댁으로 향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왔다. 혼인하면 여자는 시집 사람이라고 딱 잘라 말씀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섣달 그믐날은 부지깽이도 꿈틀거린다'는 속담에 딱 맞는 삶을 사셨던 우리 엄마의 명절도 떠오른다.
깜짝 놀랄 오늘을 만든 이유가 궁금하다. 어쨌든 오늘 밤은 멋진 밤을 만들자. 30강으로 짜인 강의 하나를 재생 속도 1.5로 모두 들었다. 뿌듯하다.
블로그 친구님들이여. 토끼의 해, 영특하게 이 한 세상을 버텨내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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