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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어쨌든 공부

삼국지와 삼국지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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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와 삼국지연의

 

삼국지 속 인물들의 점토 인형 모음 -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아파트의 평수를 좁혀 이사를 생각하면서 머리 아픔이 시작되었다. 새삼!

'어이구, 저놈의 책들을 어찌한담?'

'이이구나, 저놈의 화분들!'

 

다음은 고개를 돌려 책장을 둘러본다. 책장 머리 위쪽까지 가득 차 있는 책들. 어떻게 하면 효과적인 버리기가 가능할까를 생각하면서 책들을 쭉 훒어보는데 <삼국지>가 눈에 띈다. 집에 있는 삼국지는 세질. 내 일터에 있는 것까지 합하면 네질이다. 

 

나는 도서 '삼국지'를 시리즈로 셋을 구매해서 가지고 있다. 이문열과 황석영의 역본이다. 아, 어린이를 위한 만화 삼국지까지 세 벌이다. 한데 장정일의 <삼국지>가 지난해 내게 왔다. 내가 안아 왔다. 왜? 어쩐다고 장정일의 <삼국지>까지?

 

이문열의 것을 세 권째 읽다가 멈췄다. 황석영의 것은 아마 다섯 권은 읽었을까? 60권으로 구성된 만화 삼국지 어린이본은 아이를 위한 것이었다. 장정일 역본은 일터 도서관의 폐기 도서 대상에 들어있었다. 헌책 트럭에 싣기 바로 전에 붙들어왔다. 

'그래, 장정일은 좀 쉽겠지. 이문열은 한자에 유교 경전처럼 구성된 문장이 내 눈을 현란하게 했고 기대했던 황석영의 글도 쉽지 않았어. 지금껏 읽어온 장정일의 책들을 떠올린다면 그의 역서는 내게 삼국지 완역본 전체를 읽어낸 기쁨을 맛보게 해줄 거야. 분명 가능할 거야.'

장정일의 삼국지는 아직 내 일터 개인 서가에 꽂혀 있다. 아직 1권 1페이지도 열어보지를 못했다.

 

자, 생각난 김에 오늘은 <삼국지>와 <삼국지연의>를 이어 이야기해보련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삼국지>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 역사 소설인 "삼국지통속연의"("이하 삼국지연의라고 한다.")를 가리킨다. '소설'이다. 역사를 바로 다룬 '정사'가 아니란 말이다. 다시 말해서, 대중들은 역사 소설인 "삼국지연의"와 기전체 역사서이자 중국 정사 24사중 하나인 <삼국지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삼국지>와 "삼국지연의". 두 책은 사실 근본적으로 다르다. 두 책이 지닌 차이점은 매우 크다. 우리 역사상 대표적인 의서인 '허준'이 집필한 <동의보감>이 있다. 소설가 이은상이 발표한 "소설 동의보감"이 있다. 이 두 책이 같을 것인가? 절대로 아니다. <삼국지>와 "삼국지연의" 을 같은 책으로 보는 것은 <동의보감>과 "소설 동의보감"을 같은 책으로 보는 것과 똑같다.

 

비슷하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 차이점이 얼마나 큰지 간략하게 살펴보자. 먼저 삼국지연의는 원나라 말, 명나라 초의 인물인 나관중이 저자로 알려져 있다. 나관중이 1330년에 태어나서 1400년에 죽은 것이 정확하다면 그가 집필한 삼국지연의는 고작해야 서기 14세기 말에 만들어졌으므로 해당 작품은 발표된 지 630년 정도 된 것이다. 

 

반면에 삼국지는 서진의 진수가 집필한 것으로 아무리 낮게 잡아도 3세기 후반인 280년~289년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되어 있다. 다르게 말하면 발표된지 1740년이 넘는 역사서이다. 두 책의 발표 연도의 차이는 무려 1110년 차이가 난다.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체감해보자면 많은 사람들이 2023년에 발표된 역사소설과 옛날 옛적에 발표된 역사서가 그 뿌리 정도만 같은 것을 똑같은 대상으로 여기는 것과 같다. 다시 정리하자면, 동양권에서 오랜 세월 동안 삼국지라고 하면 진수가 저자인 역사서 삼국지를 자연스럽게 가리켰다. 그리고 해당 사서에는 중국의 역사에서 삼국시대라고 부르는 시기의 기록과 인식이 서술되고 도출되어 있다. 즉, 당대인의 기록과 인식이 일정한 맥락을 따라서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삼국지연의는 삼국지 정사를 소설로 쓴 것이다. 나관중의 <삼국지 연의>를 말한다. 三國志演義 (펼 연, 뜻 의). '연의'라는 말 자체가 가진 뜻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연의'는 '사실(事實)을 부연(敷衍)하여 재미나게 설명(說明)함'이라는 뜻을 지녔다. 

 

그렇다면 '소설'이라는 게 뭘까. 소설이란 말이지. 나관중이 <삼국지>의 후대에 발표한 창작물이다. 말하자면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는 당대인의 기록에 후대인의 인식이 결합되고 더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삼국지연의> 만으로 '삼국시대'라고 불리는 중국사를 검토하고 해석하여 바라보는 것은 커다란 문제가 된다고들 한다.

 

대부분 사람은 이러한 차이를 알지 못한다. 즉 <삼국지>를 묻어두고 <삼국지연의>만으로 그 시대의 역사서 자리를 차지하게 한다는 것은 주인을 밀어내고 하인이 자기 세계를 구축하여 마치 자기가 이룩한 세계가 전부인 양 못 박는다는 것과 같다는 것이지.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격! 이 오류를 무시한 채 우리나라 대한민국에서는 늘 <삼국지연의>를 아는 것을 중국의 삼국시대를 알고 있는 상식의 기준으로 본다는 것. 마치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모른다면 상식이 없는 것으로 내친다는 것이지. 분명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나는 <삼국지>를 읽고자 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진짜 삼국지를 물어올 때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이 되고싶은 것이 사실이었지. 아직 <삼국지> 완역본을 온전히 읽지 못한 나는 사실 중국 삼국의 역사를 전혀 모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찌적찌적 몇 마디 단편적인 이야기를 귀신 씻나락 까먹듯 얼토당토 않게, 삼국 형상을 말하는 것은 내가 삼국의 역사에 대해 얼마나 옅은 단계로 역사적인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자, 2024년에는 꼭 장정일의 <삼국지>를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정사 삼국지를 쭉 풀어낼 수 있게 하자. 단 한 번 읽기로 그것이 가능하겠는가마는 일단 시도해 보자. 그리하여 삼국지연의를 삼국지라고 말하는 실수는 범하지 말자. 진짜 "삼국지"를 읽어보자. 그리하여 상대적으로 좁고 편향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서 넓고 자유로운 세계관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마련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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