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한 소녀가 있다. 낮 동안 상당 시간을 나와 함께 보낸다. 소녀, 비교적 이른 시간 일터에 입실한다. 그녀, 아침을 시작할 때면 꼭 '안녕하세요?'를 힘차게 외친다. 일터 내부 공간에 첫 발걸음을 내디딜 때면 자기 존재를 확실하게 드러낸다. 똑 떨어지는 인사말이 참 빈틈없이 깔끔하다. '안녕, 안녕, 안녕.' 서너 개의 '안녕'을 매듭 없이, 쉼표 없이 발음하여 나는 소녀를 반긴다.
'있잖아요, 어제, 저요~', 짐을 풀기 바쁘게 나를 향해 여러 문장을 쏟아낸다. '그래요, 어제, 왜요, 무엇을 요?' 소녀의 문장이 마침표를 찍기도 전에 맞대응하는 나의 표현이다.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밤새 있었던 집안 사정을 풀어내거나 저녁 시간 혹은 밤 시간 여정을 알뜰살뜰 내게 고백한다. 어제 오후에서부터 밤까지도 바빴던 나는 아침부터, 아침부터 여전히 바쁘다. 소녀가 내게 해온 말 중 60여 %만 듣고 그에 대한 답은 미지이 뜻을 품은 단답형이다. 물론 조심스럽게, 한껏 다정하게 내게 건네는 그녀의 정은 따독따독 내 심장 바닥에 깔아 둔다. 나의 혈액 순환이 늠름해진다.
그제도 그랬다. 그끄제 왔던 비슷한 시각의 아침에 그녀, 소녀의 입실을 확인하였다. 여느 때와는 다른 소녀의 아침이라는 것이 언뜻 보였다. 몸은 일터 안에 던져두고는 늘 그 시간에 말하는 자기 문장은 아직 일터 밖에 둔 채 허둥거렸다. 갈팡질팡 다급한 듯도 보였다. 입과 혀도? 아니다. 문장만 밖에서 미적거릴 뿐 그녀의 발성을 위한 수단들은 건강한 몸과 함께 우리들의 공간에 이미 들어와 있었다. 소녀의 두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음을 내 옆구리의 뼈들이 느끼고 있었다. 자꾸 몸을 돌려 그녀를 향해야 한다고 주문해왔다.
아침 일기로 바빴다. 조금만 기다려 보자. 내 일이 우선 바쁘구나. 지금 쓰지 않으면 퇴근 후 쉴 수 있는 시간을 만들기 힘들단다. 도무지 하루의 끝을 선 그을 수 없게 된단다. 일이십 분만 일기 쓰기에 더 집중하자. 옆구리의 근육들도 자꾸 움직이려 든다. 시각의 판단이 만사에 둔한 몸에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바쁜 것이 문제가 아니야. 사람이 이상하다고. 일기가 문제가 아니라고. 뭐가 더 큰 것인지 생각해봐. 어서 돌아봐. 안 돼. 소녀는 오늘 줄곧 함께 할 사람이야. 기다리면 될 거야. 조금만, 소녀에게 빈 시간을 주자. 아침, 소녀가 첫인사를 빠뜨린 이유를 곧 말해 올 거야. 기다려. 기다리자고.
마침내 아침 일기 쓰기 시간이 끝났다. 소녀의 눈동자가 끊임없이 일터 빈 공중 공간을 배회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시각이 접수한 상황으로 유추한 직감이 확인한 것이다. 변함없이 민감한 청춘, 나의 촉각은 내버려 두지 않는다. 온몸의 근육과 뼈대가 동시에 움직인다. 소녀를 향해 돌아선다. 몸의 움직임은 곧 마음의 움직임이며 육체의 소용돌이는 곧 정신의 소용돌이다. 소녀는 화들짝 두 눈을 동그랗게 뜬다. 나의 육신과 정신이 몰입하고 있는 대상이 자기임을 파악하고는 이내 얼굴을 붉혔다.
높지 않은 웃음소리 몇을 까르르 풀어놓았다. 두 손으로 작은 자기 얼굴을 푹 감쌌다. 손가락들 살짝 들썩거렸다. 그 사이 괜한 민망함을 찔끔 흘렸다. 잠시 후 소녀는 오른손을 자기 가방 속으로 팔둑까지 쑥 넣어 헤집었다. 곧 오른손을 꺼내 왼손에 붙였다. 무엇인가 담은 듯 손 보자기를 만들어 내게 왔다. 걸음도 평소 걸음이 아니었다. 얼굴만 작지 모든 것이 나보다 훨씬 큰 소녀는 나와 가까워지자 성큼성큼 발걸음을 크게 움직였다. 세상의 중심을 다잡아 움직이는 듯 일터 바닥이 욱신거렸다. '있잖아요, 만들었어요. 이거요.' 보라색 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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