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물흐물하다'에서 헤어났다.
흐물흐물하다. 오늘 아침 세상에 첫발을 디디면서 떠오른 낱말이다. '세상'은 나 혼자만이 아닌 사람들의 일상 합동 공연장인 시공간을 말한다. 출근길에 만나게 되는 것들, 부딪히는 사람들에 대해 떠오른 짧은 생각이다. 날짜와 날씨를 받아들인 한 인간의 하루 일상을 출발하는 지점에서 어우러진 단상이다. 일기예보는 습도 75%에 덩치 큰 구름을 예고하고 있었다.
서툴게 눈을 뜨고 이불을 박차고 일어섰다. 적당히 차려입고 바깥세상으로 나와 내 시야에 들어오는 현상들과 현장들을 아우르는 낱말이 '흐물흐물'이다. 내가 서고 걷고 달리면서 숨 쉴 시공간에서 하루의 출발을 꾀하면서 읊은 의태어이다. 물론 형용사이며 '하다'를 떼어내면 부사가 된다.
자고로 의태어라는 것은 '생생하게' 표현하고자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비유법이다. 오늘 내가 첫 번째로 사용하는 의태어는 그 낱말의 의미가 지닌 고유의 속성으로 인해 결국 흐물흐물하다. 흐물흐물! 몇 걸음 했는데 애니메이션 '인어공주'가 떠올랐다. 그중 애니메이션의 간판 빌런인 문어발 하반신을 소유한 자. 바다 마녀 '우슬라'이다. 우슬라. 우악스러운 빌런 옆에는 공격 대상의 딸 에리얼이 함께 서 있다. 서 있다고? 부유한다고 하자. 사람 반 물고기 반의 인어공주이니 부유가 더 어울리겠다.
이 아침 진한 회색빛 세상에서 누가 우슬라이고 누가 에리얼일까. 나는 기꺼이 우슬라가 된다? 어찌어찌해서 삼지창을 소유하게 되고 에리얼의 부친 트라이튼의 권세를 빼앗아오는 것까지 취한다? 아니다. 그것은 아니다. 그저 떠오를 뿐이라는 것이다. 누가 에리얼이고 누가 우슬라인들 무엇이 어떻다는 것인가. 누가 바다 최고이고 누구 이 세상을 휘어잡고 사는 이인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신경증적인 증상으로 안경을 착용하지 못하는 특이 구조의 눈을 지닌 자에게는 흐릿한 오늘이 일상의 무대라는 것일 뿐이다. 이 복잡다단한 구조의 현생을 사는 이에게 빌런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러면서 빌런 등장하는 영화며 애니는 또 무척 좋아한다. 이런, 양면 이생의 전형적인 인간이여! 하하하하, 우슬라도 이 세상은 너무 복잡하여 삼지창이고 뭐고 뒷걸음질을 치며 어서 떠났으리라.
아침부터 무슨 징조인가. 우슬라를 모셔오게 된 것은 길조인가 흉조인가.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떠오를 뿐이다. 회색빛 시공간을 움직이면서 내가 살아낼 오늘의 이것저것 생각이 미리 생각나서 적어본 것뿐이다. 오늘 아침 내 눈에 접수된 사람들의 모습과 그 배경 안에 내가 스며들자, 나 혹은 누구의 모습일 수 있는, 그녀 우슬라 고유의 검은 단장이 떠올랐다는 것이다. 운무 혹은 우무의 회색 아침, 세상을 뚫고 어디에선가 그녀 우슬라가 거친 듯싶으나 세련된 언어와 노래로 세상에 나선다면 차라리 좋을 듯도 싶다.
기왕지사 우슬라를 모셔왔으니 더 이어보자. 어떤 음악이 어울릴까. 고민할 것도 없다. 풀피리냐 리코더냐는 별 의미가 없다. 나는 오직 그녀 고유의 음악을 취한다. 고백하건대 나는 모든 것 다 떠나서 애니메이션 '인어공주' 중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 보통인들의 상식 선상과 다르다. 우슬라가 인어공주 에리얼을 유혹하는 장면이 내게는 최고이다. 귀염둥이 인어공주의 매니저 세바스찬도 등장하지 아마. 내 눈빛은 인어공주 쪽이 아니라 우슬라에게 닿아 있다.
가장 좋아하는 '인어공주'의 ost 역시 보통 사람들의 상식을 뒤집는다. 인어공주 에리얼의 영혼을 쓰다듬으면서 자기편으로 잡아당기는, 그 장면에 얹어지는 그녀, 우슬라의 노래 'Poor Unfortunate Souls'이다. 왜? 그것은 나도 모르는 나의 음악 취향이다. 아무도 모른다, 누구도 모른다. 괴기 소녀, 악마 성향이 내 안에 내재되어 있다고? 그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그저 내 영혼이 그녀 우슬라를 끌어당기는 것을!
내 음악적 취향에 따른 특이성은 JTBC의 여러 오디션을 할 때마다 확인되었다. 팬텀 싱어며 탑 밴드며 싱어 게인이 열릴 때 나는 내 일터 동료들에게 얼마나 간절하게 외쳤는지 모른다. '당신들이여 들으라. 나, 요즘 그 오디션의 노래들을 보고 듣는 재미로 산다오. 노래들도 잘하고 또 얼마나 신선한지. 비주얼이며 음악성이며 모두 대단하다오, 얼마나 감동적인지 모른다오, 꼭 보시오, 꼭!'. '얼마나'라는 강조 어를 반복 또 반복했으나 매번 프로그램이 끝났을 적마다 내가 권하는 음악 오디션을 봤다는 이가 없었다. 나는 주기적으로 우울해야 했다.
내 동료들은 나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슈퍼밴드를 할 때 더욱 심했다. 나를 이해할 수 없어했다. 특히 슈퍼밴드를 할 때는 더더욱 그러했다. 나는 슬펐고 외로웠고 아팠다. 왜? 내 집에 함께 사는 또 한 사람도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록 음악에 대한 반응이었다. 이것도 그냥 인어공주 OST 연장선상에서 떠올렸을 뿐이다. 물론 이토록 간절히 호소했던 나의 청을 들어줬다면 나는 내 일터 동료들을 더더욱 사랑했으리라. 나는 인덕으로 사는지라 매해 내 동료들은 늘 호인들이었다는 것을 전제로.
온 세상의 선이 사라졌다. 직선, 곡선, 사선, 포물선. 그런 유의 선 말이다. 윤곽이 없는 건물들과 거리와 사람들과 물건들과 풍경들과 공간들이 제멋대로 각자 만사형통이다. 눈앞, 몇 발자국 앞은 제외하고 말이다. 특이체질의 신경세포로 생을 연명하는 내 시력은 오늘 같은 날 내게 오는 선의 부재 혹은 혼돈을 즐긴다. 세상 속 사람들은 온통 내가 좋아하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 속 인물들이다. 그가 그린 자화상들이 겹쳐진다. 나는 곳곳에서 프랜시스 베이컨을 만난다. 그와 걷는다. 그의 그림들과 동행한다. 그러므로, 아 오늘은 이미 행복하다 아니할 수 없다.
우슬라도 금방 도착하리라. 그토록 그녀 출현을 염했지 않은가. 지극정성에 빌런들은 당연히 반응한다. 그녀, 우렁차게 노래 부르리라. '인간이여, 그대 불쌍한 종족이여, 그대들, 불쌍한 영혼을 구제해줄 이 오직 나 하나. 내 마법으로 그대 가련한 영혼들을 도와주리라. 뭘 원해? 날씬, 상사병? 불쌍하고 가엾은 영혼들이여. 내 쾌히 그대들의 훌륭한 도우미가 되어주리니~. 그러나 그대들이여, 내가 도와준 값은 꼭 치러야 하리니`'
뭉그러졌다. 오늘 두 번째로 떠올린 낱말이다. 사실은 '흐물흐물하다'보다 먼저였다. 지금 일기를 쓰면서 어울린다 싶어 붙이는 낱말이다. 출근 준비 때의 상황이다. 상대가 눈앞에 바로 서 있지 않으면 절친이라도 이름을 댈 수 없는 풍경이었다. 내다본 베란다 밖 풍경이었다. 여름옷과 가을 옷 사이에 나를 세웠다. 디자인이며 색상 등 패션을 여러 측면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옷걸이며 옷장에 걸린 옷들 중 하나 내려서 그냥 걸치면 되는 식이다. 다만 유난히 촉감이 예민한 관계로 기온, 즉 날씨가 출근 준비에 걸리는 시간을 늘리고 줄인다. 3분 정도 고민했을까. 주간 일기예보의 최저온도와 최고온도를 읽고 보니 지난주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꽂혔다. 단지 많은 양의 수분이 공간을 채우리라는 것이 예정되어 있었다. 오전 오후 모두 구름뿐이었다. 여름옷을 그대로 입고 나왔다. 간절기 가벼운 외투는 어제도 입고 지난주에도 입은 것이었다.
거대한 물기를 안고 버둥거리던 검은 구름을 이고 걸었다. 흐물흐물한 채 내게 다가왔다가 사라지는 현실 속 자연과 인문을 모두 삼키면서 걸었다. 때맞춰 나를 사로잡던 흐물흐물한 우울을 즐겼다. 아침 출근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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