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제>를 읽는다. 김종길의 시 <성탄제>를 읽는다.
성탄 즈음에는 김종길의 <성탄제>를 읽는다. 성탄 전야에는 꼭 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김종길의 시 '성탄제' 읽기를 권한다. 올해도 그제, 내 아끼는 이들과 함께 '성탄제'를 읽었다. 그리고 오늘 나는 나 홀로 있는 내 '빈집'에서 기형도와 함께 김종길의 시 '성탄제'를 읽는다. 아~, 김종길 시인이시여, 당신이 주신 이 시가 있어 저의 생은 결코 크게 빈곤하지 않다.
12월이 되고 12월이 되면 으레 사람들의 입에서는 '성탄절'이라는 낱말이 오르내린다. '성탄절'은 내게 '성탄제'가 되고 나는 벌써 산수유 열매를 담은 바알간 주머니를 왼쪽 가슴팍에 마련한다. 내 오른쪽 가슴팍에는 아버지의 근엄함 속에 구구절절 교육의 힘을 외치시던 서늘한 부정을 담는다.
성탄제
- 김종길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라곤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늘한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1969)
김종길 선생님은 내게 시적 언어란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셨다. 그 고결함을 경험하게 해주셨던 분 중 한 분이시다. 고마우신 선생님. 일면식도 없지만 내 마음속 김종길 선생님은 문장으로 내가 맺은 나의 또 한 분 혈육이시다. 문학, 시라는 테두리 속의 선생님으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선생님은 이 시로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바알간 불빛을 굳게 드시고서 나를 안내하신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몸도 마음도 연약한 것이 탈인 내게 시문으로 말씀하신다. 네겐 너를 제대로 키우겠다는 일념만으로 자기 생을 바치신 부모님이 계신다. 그리고 할머니가 계신다.
선생님은 스토리 텔링의 힘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셨다. 조물주가 인간이라는 생명체에게 주신 선물 중 단연코 최고의 것이 스토리 텔링을 기반으로 생을 진행한다는 사실이지 않을까. 너와 나와 우리라는 틀의 형성은 스토리 텔링이 가능해서이지 않을까. 스토리 텔링은 온갖 이야기, 싱겁고 짜고 매운 삶을 읽고 듣고 쓰게 하는 모든 힘을 안고 있다. '나'로 있을 때는 각각 제 멋대로, 오직 제 한 몸 도드라지는 것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너'와 만나고 '그, 그녀'를 만나면 '정 두터운 우리'로 살아가게 하는 최상의 힘을 스토리로 펼친다. 사람 사이 오고 가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적을 연출하는 것이 스토리 텔링이다. 선생님의 시에서 이를 확인한다.
선생님, 김종길 선생님의 시에는 크고 작은 수많은 스토리가 펼쳐진다. 아름다운 사랑 노래에서부터 쓰디쓴, 생의 그루터기를 할퀴는 설운 노래, 마침내 도약이 가능한 성스러운 극복의 이야기까지. 당신의 시를 읽으면 각각 나름의 삶을 진단하고 쓰다듬고 곱게 마음 다지는 사람 이야기들이 다채롭게 담겨 있다. 구중궁궐 휘황찬람함이 절대로 부럽지 않다.
수없이 많은 순간을 당신의 시를 읽고 외우고 쓰면서 버티는 삶이었다. 울고 웃고 마음 두드리고 때로 분노하고 주저앉고 뒤틀려 가슴 쥐어뜯어가면서 기어코 나를 살게 하셨다. 당신의 시집, 이 시 '성탄제'가 있는 종이에는 나의 눈물, 나의 웃음, 나의 인생이 있다. 내 남은 생도 끝없이 얹힐 것이다. 겹겹이 쌓인 내 생을 알고 싶거든 그곳을 펼쳐 읽어보라고 내 아이에게 쓰는 유서 속에 기록해둘 것이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이여, 너의 어미 온갖 대소사, 곳곳에서 쏟아낸 웃음, 흘리지 않을 수 없었던 울음, 터뜨려야 했던 분노 그리고 형형색색의 생이 그곳에 있노니, 사랑하는 나의 아들이여, 어미의 생, 때로 정지 상태를 마련하여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해야 했던 시절까지 다 녹아있나니. 그곳에 가서 어미를 읽으렴. 그곳에서 어미를 만나렴. 어느날 문득 네 어미가 생각나거든 김종길의 시 '성탄제'를 읽으렴."
오늘 늦은 저녁, 성탄제의 마무리를 해야 할 늦은 시간에는 한양에서 내려오는 바로 손위 언니를 맞으러 고속터미널로 나간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부터 우리는 우리들의 어린 시절, 우리들의 소박했던 성탄제를 이야기 나눌 것이다. 아버지를 모셔오고 어머니를 모셔오고 청상과부가 되어 살던 생의 상당 기간을 손주 손녀 유학길에 함께 올라 밥을 해주시느라 자기 삶이 없으셨던, 결국 그 도중에 생을 마감하신 할머니도 모셔올 것이다. 밤새, 농부의 딸, 혈연이라는 것 외에 전혀 닮은꼴이지 못한 자매는 그래도 찾을 수 있는 공통분모, 옛 시절 우리들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 나눌 것이다. 나는 오늘도 시 <성탄제>를 읽으면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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