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크스라는 것도 혹 생명을 지닌 것이 아닐까?
저녁 9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에 도착했다. 이 겨울에 왜 밤늦게 내려오는 것인가. 입 뚝 내밀고 입술 탱탱 불어 터진 채 터미널로 향했다. 저녁 운전은 부담이다. 눈이 좋지 않은 관계로 더 그렇다. 할 일이 있어 늦었노라며 동안(다녀간 지 얼마 되지 않은데도) 몸은 좀 어떠냐며 차에 오르는 그녀. 그녀에게 이러니까 소화도 안 된다고 툴툴거리려다가 단계를 조금 누그러뜨려 말했다. 이런, 아직 청춘이어야 할 세월에, 내장이 제 할 일을 못 해 힘들 줄은 몰랐다고. 아마 신경성인 듯싶다고.
소화제이다. 어젯밤 한양에서 내려온 언니가 일본산 소화제를 내게 건네줬다. 건강과 긴밀히 관련된, 믿을 만한 직업의 자녀와 함께 먹는다는 말에 나는 깜빡 넘어갔다. 순간 복용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 만병통치약이 되었다. 언니도 채근한다.
"어서 인터넷에서 주문해라, 어서. 제발 좀 아프지 말고 살아라. 으째 그리 사냐."
"오키. 믿고 주문하겠음요."
"그래라. 우리는 고기 먹고 속 더부룩하면 먹는다. 바로 속이 편해지더라. 먼저 한 봉 먹어보고 주문하든지."
"알았음요. 그런데~"
"왜, 뭐 이상한 것 있나? 일본산인데."
엥? 직구네. 나, 직구를 해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좀 해 봐라. 배운 사람들은 뭐든지 금방 하더라야."
조카에게 주문을 좀 넣어달라고 할까 하다가 정지한다. 내가 해보자.
직구였다. 직구는 관세, 뭐 어쩌고 저쩌고 하는 개인 통상 번호가 필요하다고 들었다. 개인 번호를 가진 자만이 주문할 수 있다고 들었다. 관세라 하고 통상이라 하고 개인 번호라 하니 이상하게 조금 찔린다. 죄도 없는데 왜 이럴까. 어, 이것은, 이것은 말이야. 아하, 이게 그것이 아닌가. 나는 순전히 가스라이팅을 당했구나. 국가라는 틀이, 국가가 정해놓은 그 알량한 법이라는 것이, 그리고 위대한 국민이라면 꼭 갖추어야 할 준법정신이라는 것이 그렇구나. 그에 대한 철저한 교육이, 그리고 그 철저한 교육을 확실하게 받아온 나는 그만, 저 위 턱에서 내리부어 대는 포격에 지레 겁을 먹고 있구나. 푹 젖어있구나. 고급 경제 용어인 '관세'가 날아다니는데 보통 일이 아니구나. 저 거창한 국가와 국가 사이의 다리를 오가는 '통상'이라는데 무겁지 아니한가. 저 낱말들이 내 뇌 속을 비집고 들어와 춤을 추는구나. 나는 결국 커다란 통 속으로 스스로 빠져드는구나. 그 통은 너무 커서 한번 빠지면 끝없이 허우적거려야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과감하게 시도하자. 해외 직구에 발을 담가 보자. 글로발(과한 표현을 취한다.)하게 살아보자.
내 직업에서 연유한 '지나칠 정도의 생각 키우기' 단계를 이번에는 얼른 벗어났다. 더 중요한 것은 나의 건강이다. 살아보니 그렇더라니.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아니더라. 살아생전 건강하게 살다가 어느 순간 딱 목숨 멈추는 것이 남은 생 최고 주제로 사는 나다. 어서 신청하자. 하루빨리 신청하자. 언니가 가져온 것이 다섯 봉은 되나? 그렇다면 적어도 5일 전에는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바쁘다. 오늘 내가 최우선으로 해야 할 일이 이것이다.
인터넷이라는 것으로 일본 것 직구 몰은 바로 발견할 수 있었다. 로그인을 하려다가 한 달이라도 먹어보고 오래도록 복용할 것 같으면 주문하자는 생각이 들어 비회원 주문을 시작하였다. 개인 번호를 받으란다. 신규 신청을 하는데 입력해야 할 것들이 많다. 첫 번째가 주소이다. 주소에서도 우편번호를 어서 넣으란다. 기억하려니 했으나 이미 나를 떠나버린, 나의 상징 중 하나에 속한 우편번호는 '찾기'라는 알고리즘을 통해서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들어갔다. 돋보기가 그려진 곳을 클릭했다. 작동하지 않는다. 서너 번 시도 끝에 위아래를 살펴보니 아래쪽에 '주소 찾기가 되지 않으면 여기를 누르시오.'라는 문구가 보인다.
여기를 눌렀다. 여러 번 눌렀다. 콕콕 단단하게 눌렀다. 콕하고 확인하고 콕하고 확인했다. 순순히 따라왔으니 되겠지 싶었다. 디지털이 저항하는 것인가. 컴퓨터와 나의 어긋난 운명은 오늘도 여지없이 지저분한 동세를 발동하고 말았다. 아하, 유명 인사들이 징크스를 상기하면서 미리 예방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헛 짓거리가 아니구나 싶다. 신을 찾는 것이 구태의연한 일이 아니구나. 두 손 마주 잡고 성스러운 기도를 드리는 것이 심심해서 하는 것이 아니구나. 여기를, 적어도 열 번은 눌러봤지만 이어 열리는 창은 사각 틀만 반짝 뜨더니 빈 속이었다.
'공백', 'blank'였다. 빈자리. 여백. 얼마나 아름다운 공간이냐.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여백의 필요성에 대해 배워 왔느냐. 너무 꽉 채우면 울화통이 터지니 조심하라는 조언을 그 얼마나 많이 받아왔느냐. '여백의 미'를 살려야만 진정한 자기표현이 된다는 충고를 들어온 세월이 얼마인가. 그 많은 시간을 '여백의 미'를 살린 작품이야말로 진정 위대한 작품일 수 있다고 강의를 들어왔는데. 내용 없는 하얀 공간. 텅 빈 창만 하염없이 떴다가 사라졌다.
나의 뇌세포는 고민에 빠졌다. 이것을 계속해? 아니면 멈춰? 도전해? 어차피 내 운명선에는 컴퓨터와의 조합이 좋지 않으니 그만 멈추는 것이 낫겠지. 그래 멈추자. 물론 그 뒤로 또 대여섯 번은 시도했을 것이다. 결코 운명은, 내게 짐 지워진 징크스는 기어코 자기 힘을 발휘하고야 말았다. 언니를 보기가 민망했다. 슬쩍 직구 몰을 나왔다. 혹시 이 소화제가 나와 궁합이 맞지 않은 것을 아닐까. 나는 또 이럴 때마다 하는 생각 습관을 발휘하였다. 점차 나의 빈약한 하체는 미신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징크스'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혹 '징크스'라는 것도 생명체이지 않을까. 내 생을 좌지우지하는 별것!
퇴근 시각이 다 되어 옆 공간에서 낮을 사는 새신랑 동료에게 물었다. 우편번호 검색이 되지 않은 이유는 도로명 '~로'에 이어 숫자를 넣는 부분에서 띄어쓰기하지 않아야 했다. 예를 든다. 평소 '^^^도 00시 00로 12-34'로 입력하던 습관을 버리고 '^^^도 00시 00로12-34'라고 입력을 했어야 했다. 이런~. 이것은 실수인가 신중하지 못함인가, 앎의 범위가 좁은 것인가, 새로운 시도를 하지 못하는 속 좁음인가. 아니면 용기 부족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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