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지 못했던 부고'를 쓰게 된다면 나는 누구의 부고를 쓸까.
가까스로 만났다. '알쓸인잡'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다. 대중매체 혹은 책으로 만난 사람들, 내가 '짝사랑'의 양으로 좋아하고 존경하는 분들이 출연하다는 것을 얼마 전에 알았다. 프로그램을 처음 만났던 날이었다. 그림을 그리다가 쏟아지는 잠의 기운을 누그러뜨리려고 텔레비전을 켰다. 잠시만 머무르려던 계획이 빗나갔다. 경희대 물리학과 김상옥 교수님의 말씀에 흠뻑 취하기 시작해서 소설가 김영하 선생님 등의 의미 깊은 이야기들로, 끝나는 시각까지 텔레비전 앞에 있었다. 부지런하지는 못해서 프로그램 방영일을 잡아두지 못했다. 하여 그제, 일요일 오후에 우연히 또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그냥 마음 잡기 힘든 일이 생겨 실내 집안 곳곳을 축 처져 거닐고 있던 참이었다. 영화를 볼까 하다가 채널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던 중 다시 만났다. 알쓸인잡 5회던가. 프로그램은 진행되고 있었다. 주제가 무엇인지도 포착하지 못했다.
김영하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뉴욕타임스에는 '쓰지 못했던 부고'라는 기사 코너가 진행되고 있단다. 쓰지 못했던 부고. 셀프 부고니 미리 쓰는 부고 등은 학교 등 여러 곳에서 쓰기 공부의 한 방법으로 진행되곤 한다. 나 개인적으로도 학교에서 혹은 일기 쓰기 등을 통해 해 본 적이 있다. 나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를 유서 삼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주변 다른 이의 죽음 당시 놓쳤다가 뒤늦게 쓰는 부고를 신문 지상을 통해 올린다는 것. 사자를 다시 불러들이는 일.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이상야릇했다.
나는 누구의 부고를 써 올린 적이 없다. 집안 죽음으로는 할머니와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을 치렀다. 막내딸인지라 앞장서서 부고를 쓸 위치가 아니었다. 어쩌면 영원히, 내가 주도적인 입장이 되어 부고장을 쓰는 일은 없으리라. 신문 지상 등 대중매체에 내 지인의 부고를 올린 기억이 없을뿐더러 앞으로도 없으리라. 내가 법적인 절차를 마치면 바로 불 속으로 이어지는, 그런 죽음의 장에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는 것에 흔쾌히 동의한 옆사람도, 부고도 절차도 없는 조용한 사라짐을 원하기 때문이다.
내 살아가는 방식으로는 의식이라는 것을 유의미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므로 더더욱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아는, 내가 살아내는 소시민은, 사람들의 놀이터로 자리 잡은 대중매체 속에 직접 출연하는 것이란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내가 사는 나의 주도적인 삶이란 매사 내 안에서 조용한 가운데 치러내는 것이 현명하다는 생각이다. 그런 삶의 연속이기도 했다. 당연하다. 지극히 조용히 살고 살아야 하는 소시민이기도 해서이다. 상식적으로 말이다. 물론 소시민이라고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요즘 세상은 다르다. 다양성과 다중성이 세속을 수놓으면서 이런 일, 저런 일. 별일이 다 있다. 별별 일들을 다 한다. 오만가지 쏟아지는 일들을 마구 토해낸다. 누구를 막론하고 해댄다. 할 수 있다. 내 안에서 조용한 짓으로 그쳤는데 이제는 내 안에서 하는 조용한 일을 거창하게 떠벌리는 것을 당당하게 한다. 제한이라는 것이 없다. 너나 할 것 없다. 어떤 이는 되고 어떤 이는 아니 된다는 규제가 없다. 내가 하면 그만이다. 어떤 이든지 세속 위에, 대중 속에 자기 방식의 삶을 거침없이 내놓을 수 있다. 여기 이곳 내 블로그도 그 하나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만약 내게 뉴욕타임스 같은 대중매체에서 당신이 아는 이 어느 한 사람, 다른 한 세상으로 가신 이를 새삼스럽게 보내드리는 이가 되어 부고를 쓰라고 한다면? 나는 누구의 부고를 쓸까. 언젠가 읽은 기억 속 뉴욕타임스의 부고란을 책으로 엮은 것을 보면 대부분 유명 인사들이다. 김대중도 있고 노무현도 있고 유관순 누나의 부고도 있단다. 우리나라 신문들 귀퉁이에 자리한, 한 줄 안에서만 죽음 맞닥뜨리기 방식의 건조한 인사가 아니다. 어떤 이의 일대기가 될 정도로 꽤 많은 양을 중심 테마 아래 엮는다고 들었다. 그 코너의 전문 기자도 있다고 들었다.
단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는 부고를 '쓰지 못했던 부고'의 부제를 달아 써 올릴 수 있다면, 나는 내 대학 동기 언니의 부고를 쓸 것이다. 그녀는 갓 고교 졸업생 현역이었던 나에 비해 서너 살이 많았다.
"그녀, 이미 자기 삶을 기꺼이 버릴 날이 머지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녀. 자기만 알고 있는 몸속 친구를 다스리려 세상과는 늘 담을 쌓았을 것임을 나 그녀의 죽음 후에야 알았다. 오직 후배 한 여자 있어 자기를 기억해줄 수 있다면 그녀는 만족한다고 했다. 그런 그녀가, 결혼 일주일 만에 자기 안에 살던 친구의 부름에 따라 먼 길 떠났다. 그녀, 이불속에서 탈출구를 찾지 못한 채 곱게 숨 쉬는 것을 멈췄단다.'
그리고 그녀의 생을 좀 더 길게 엮으리라. 글줄 좀 쓴다는 친구들이 내놓은 글을 함께 읽으면서 즐거이 논했던 나날들. 다 해진 운동화의 낡은 숨결을 질질 끌고 다니던 여자.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화장기 전혀 없는 민낯인데도 짙은 분장으로 낯 두꺼운 여자보다 훨씬 아름답던 여자. 바짝 마른 날렵한 몸뚱이로 가끔 세상을 갈지자로 쓰다듬던 녀자. 그녀는 술 한 잔을 마시면 늘 중얼거렸다.
"나는 여자보다 녀자가 더 좋더라. 왜 그럴까? 내 이러면 네 귀에는 내게서 북쪽 냄새가 나니? 누군가 그러더라. 그쪽 냄새가 난다고 말이야. 조심하라고. 한데 나는 전혀 그쪽과는 관련이 없단다, 불행히도. 크크 크윽. 그냥 좋은데 어쩌냐. 나, 녀자야. 녀자. 이제는 좀 잘 살고 싶은 녀자."
나를 빼놓고는 누구도 그녀가 중얼거리는 문장을 듣지 못했다. 그녀는 좀처럼 나를 건너 또 한 사람이 들을 정도의 크기로 말을 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월남 인이셨다.
나는 그녀를 무척 좋아했다. 그녀는 나보다 두세 살은 더 많았다. 오른발 왼발 턱턱 앞으로 내뱉으면서 아무렇게나 걷던 걸음들이 떠오른다. 결혼의 'ㄱ'자와도 친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죽음과 결혼 소식을 동시에 내게 던졌다. 내게서는 깜짝 놀랄 힘도 일지 않았다. 나는 펑펑 울었다. 나는 결코 그녀를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쓴 글, 분명 길고 짧은 글을 늘 쓰고 있는데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글이 궁금했다. 그녀가 남긴 글을 읽고 싶었다. 가끔 나는 어떠어떠한 글을 지금 쓰고 있다고만 했다. 그랬던 그녀의 글들이 보고 싶었다.
그녀와 나는 대학신문사 기자와 대학방송사 아나운서 혹은 기자로 일하면서 비슷한 유의 일을 한다는 동지애로 뭉쳤다. '글을 읽고 글을 사랑하고 글을 쓴다'는 것을 함께 즐겼으리라. 그녀는 분명 세상을 쩍 가를 만한 글을 썼으리라 확신한다. 언젠가 우연히 읽게 된 그녀의 글은 명문이었다.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녀는 굵고 짧은 생을 살다가 갔다. 그녀는 내 대학 생활 중 믿고 의지하던. 인성 좋고 통 큰, 두둑하고 넉넉한 숨결의 여자였다. 주말부부였다던 그녀는 혼자 맞을 수밖에 없는 휴가 첫날 남편을 출근시키고 늦잠을 자던 중 평생 지니고 살아온 뇌전증 발작으로 생명을 다했다. 이불속 경기를 잠재우지 못하고 절명했다고 들었다. 그녀가 넉넉하게 생을 살았다면 어떤 글을 써냈을까 늘 궁금하다. 천하를 호령하는 힘 든든한 글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생을 '쓰지 못했던 부고'로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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