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시간여 인스타그램을 열어 그림 읽기를 했다.
- 정월 초 이튿날 2
- 앞 일기에서 서설이 참 길어졌다. 왜 이리도 주워 담아 이곳에 쓰고 싶은 것이 많은지. 이에 각설하고 오늘 쓰고자 하는 글, 오늘 주로 한 일을 가지고 이제 본격적으로 써 본다. 그러므로 오늘 일기 중 이 부분은 아침 일기가 아니다. 반신욕 전에 바로 쓴 글이다.
INSTAGRAM으로 오전을 살았다. 지금 시각 오후 여덟 시 삼십 분에 다 와 있다. 오전 열 시에서 지금까지 열 시간 중 적어도 세 시간 가까이 인스타그램과 함께 지냈을 것이다. 하루 중 낮 동안, 내가 눈 뜨고 있는 시간의 열일곱에서 열여덟 시간 중- 열여덟 시간이라 치고, 여섯 시간은 수면이라 하면 - 6분의 1을 인스타그램으로 지낸 것이다. 인스타그램은 열었다 하면 시간이 꼴딱 꼴딱, 단숨에 삼켜진다. 얼마 전 이곳 블로그에서도 말했듯이 가입 시 어떠어떠한 절차에 따라 하라는 대로 입력을 했더니 주로 그림과 패션, 음악이 보이는데 그중 대부분이 미술 관련 내용이다.
나는 인스타그램을 보고 나면 이 세상 온갖 감각을 다 맛본다고 느껴진다. 인스타로 숨을 쉬면서 내 호흡은 또 온갖 방법으로 변모한다. 내 시선도 마찬가지이고 내 영혼을 뒤흔드는 감정도 마찬가지이다. 감탄과 감격과 탄복으로 이 세상이 환해지는 생각에 미친다. 질투에 가까울 만큼 송알송알 맺히는 부러움과 겁 없이 치솟는 호기심과 일사불란하게 타오르는 탐구심으로 호흡이 거칠어진다. 꼭 따라 해보고 싶은 모방 심리와 이내 풀이 죽어 통곡하고 싶을 만큼 쓰라린 절망으로 내 가슴 한쪽이 세게 긁힌다. 가끔 죽고 싶을 정도로 나 자신이 처참해지기도 한다.
내 인생을 돌아보게끔 한다. 나는 무엇을 하고 살았을까. 저 수많은 장면 중 내 이름으로 올려진 것은 왜 한 작품도 없을까. 온갖 방법을 탐구하여 제대로 된 자기만의 성을 쌓아서 살아가는 사람 중 왜 나는 끼질 못하는가. 왜 나는 여전히 바닥인가. 왜 나는 여전히 층층의 사물에 달리 오는 명암을 읽을 줄 모르는가. 설령 읽어내는 것들도 머리로만 알지 종이에는 표현하지를 못하는가. 저 수많은 색의 마력을 왜 나는 내 나름의 방법으로 다루질 못하는가. 터져버릴 것 같은 내 심사를 왜 나는 안고만 사는 것일까. 어쩌자고 그토록 하고 싶어 하는 그림으로 제대로 나타내지를 못하는가. 왜, 왜, 왜!
나는 동안 인스타그램을 보면서 수없이 많은 장면을 스크린숏으로 모았다. 저이처럼 물감을 덕지덕지 발라서 시원시원한 그림을 그려야지. 두께가 느껴지는 입체감을 확실하게 드러내는 표현 기법으로, 조소의 부조처럼 회화를 완성해 볼까. 저 아름다운 여자처럼(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들은 참 잘 생기기도 했다. 인스타그램으로 확인하자면) 물에 희석한 물감을 한 바가지 담아 캔버스에 마구 뿌려볼까. 오늘 본 아가씨는 흰색 드레스를 입은 미인이었는데 영상 편집했는지 몇 바퀴의 원을 그리면서 캔버스에 마구 물감을 뿌렸는데도 머리도 몸도, 의상도 깨끗했다. 늙은 내가 끙끙거리면서 커다란 캔버스에 물감을 퍼붓는 영상을 찍어 올리면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저 젊은 화가의 고운 손놀림처럼 한 장의 종이에 사각형의 공간을 마련하여 젠탱글을 제작할까. 저 총각처럼 3d 기술을 접목시킨 완전한 입체 회화를 완성해 볼까. 나는 어떤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을 그려야 할까.
한때 내게 보고서를 쓰고 싶을 만큼 크게 와 있었던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처럼 열정의 추상으로 점프할 수 있는 우연이 내게는 왜 주어지지 않는 것일까.(그가 추상을 그리기 시작한 계기가 있었다.) 엊그제 다큐멘터리로 내게 특별한 화가로 인식된 물방울의 화가 김창열처럼 내 삶을 이끌어내 미술 작품의 타이틀이 될 철학사상도 왜 내게는 뚜렷하게 자리 잡은 것이 있지 않은가. 김창열 선생님의 삶을 보고는 명작이란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떤 생각을 마련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내 생에 잠재된 것을 끌어올린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나만의 그림이 그려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고흐처럼, 고갱처럼, 신비의 곡선에 힘을 빼고 그은 선과 힘을 꽉 챙긴 선의 조합으로 아름다운 인체의 곡선을 드러낼 수 있으면 좋겠다. 늘 순위가 바뀌는,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던 화가 중 2023년 현재, 으뜸을 달리는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처럼 내 영육의 일그러지고 비뚤어진 상태의 현재를 선과 색과 빛과 명암으로 그려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안에 숨어있는 허황한 망상이라도 꺼내 그릴 수 있었으면.
나는 종일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아니 그리지 않았다. 한두 달을 미적거렸던 '히스 레저 5' 그리기를 마감했으나 아직 블로그에 올리지 못하고 있다. 부끄러워졌다. 진짜로 그림을 그리는 분이 혹 블로그 친구들 속에 있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울까 싶어졌다. 사실 어느 화가에게 그림을 찍어 보내면서 조언을 구했더니 제법 긴 글의 답이 왔다.
"열심히 해라, 할 수 있다. 당신, 그림을 그려야만 살 것 같다고 하지 않았느냐. 나, 대학 다닐 때, 졸업 후 그림을 생계로 살 생각을 하면서 수없이 많은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 매일 한 장 이상씩 그렸다. 당신 고작 몇 개월에 그림 열 점을 다 그리지 못했다면서 주저앉다니, 그것은 아니다."
"자연스러움이 없다, 면과 면의 경계가 너무 인위적이다. 엄청나게 지우고 또 지웠다는 생각이 든다. 하여 수정 불가능한 곳이 발견된다. 그것은 아니다. 물론 당신 나름의 개성이 여전하여 다행이다. 인물 고유의 표정도 제대로 드러나 있다. 열심히 그리라. 인체 정밀 묘사에 꽂힌 듯한데 그야말로 가장 어려운 그림이 인체 정밀 묘사이다. 더군다나 정밀 묘사라는 것이 까딱 선 하나 엇나가도 얼굴 분위기가 달라진다. 세상 어려운 것이 인체 정밀 묘사이다."
가당찮은 그림이니 그만두라고 선을 그어주었으며 더 나았을까. 나는 '괜찮다, 할 수 있다.'는 의미가 느껴지는 구절에서는 가슴 뛰다가 '이 부분의 명암은 아니다'라는 문장 앞에 서면 가슴이 무너진다. 언제까지 이런 평에 나는 머물러 있어야 하는가. 늘 그렇다. 늘 자연스레 그려내지 못하고 내 그림은 늘 그렇고 그렇다. 슬프고 아프고 참 허전하고 나 스스로가 너무 안쓰럽다. 갑자기 와인 한 잔을 벌컥벌컥 마시고 싶다. 습관성인가. 인스타그램 속 그림들을 감상하다가 결국 내 그림 앞에서 무너졌다. 하루가 또 간다.
케이트 윈슬렛이 생각나서 그녀 주연의 영화 한 편도 봤다. <드레스 메이커>였다. 케이트 윈슬렛의 복수극을 보면서 내 마음속 응어리를 조금은 녹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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