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 잘 익을 팔월!
동시 '팔월(김정원)'에 가면 어느 시장에서 수박을 통통 두들겨보시던 할아버지가 등장하신다. 할아버지는 수박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시고는 잘 익었다고 하시더니만 작품 속 화자인 '나'에게로 오셔서는 내 머리통을 툭툭 두들겨보시고 '아직 멀었다' 하신다. 늘 이팔청춘을 고집하는 내 영혼은 할아버지의 후자 쪽 손이 느끼는 정도이길 바란다. 그러나 오늘은 팔월 일일. 내 서른 하루의 올 팔월은 할아버지의 처음 손길에 드러난 소리처럼 잘 익기를!
드디어 완독 했다. 나흘 만이지, 아마. 옥타비오 파스의 문학 비평집 <활과 리라>를 모두 읽었다. 참 요란스러운 방법으로 독서를 했다. 3분의 2 쯤에서 멈추고는 저 뒤 작가 연보를 읽고 역자 후기를 읽고 에필로그를 읽었다. 다시 돌아와 남은 쪽수를 모두 읽었다.
독서 시작 후 시종일관 글자와 글의 내용과 내용이 지닌 의미와 내 머릿속에서 그 의미의 확대 재생산되는 의미를 읽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멈추자. 이쯤에서 멈추는 것이 좋겠다. 진정한 용기란 '나를 인정하고 내려놓는 것'이라지 않는가. 멈추자.'를 예닐곱 곳에서 했을 것이다. 이런 때에 발동하는 나의 오기는 천연기념물급이다. 한편 솟구치는 또 다른 용기가 대꾸한 것이다. '읽어라. 너, 죽고 못 사는 '시' 이야기이지 않은가. 자존심도 없는가. 비평집이 본래 그렇지. 문학비평가들의 글이 그렇지, 뭐. 끊임없이 도수를 높여 자기 안의 내용물들을 글로 설파하는 것이 직업이지. 그깟 것 그냥 읽으면 되지. 뭘 그렇게 해석이니 재해석이니 요란한가. 어서 한 번은 쫘악 읽어내거라. 그대 수준이 이 책 읽고 소감문을 쓸 수준도 아닌데. 그냥 한 번은 읽었다고 말할 수 있으면 되는 거야. 어서 읽어라.'
얼마나 많은 삶을 살아야 이렇게 글을 쓸 수 있을까. 얼마나 연륜의 바퀴 자국이 깊어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단 한 문장도 빈 문장을 찾을 수 없었다. 철학서도 아니고 심리학서도 아닌 문학비평집인데 어떻게 이런 글이 가능할까. 사실 첫 몇 문장을 읽고는 베끼자고 덤볐다. 한 문장 한 문장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이내 그만뒀다. 베끼는 것도 죄송했다. 왜? 제대로 된 이해도 하지 않고서 무작정 베끼는 것은 작가에 대한 예의에서 어긋나는 것이다. 공지영의 <인간에 대한 예의>도 읽지 않았느냐(이것이 바로 빈 문장이다). 적어도 2독, 3독 후에 베껴야 할 것 같았다. 이렇게 되면 베낄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오지 않지만 말이다. '이 책만은 꼭~'이라는 단서를 달고 1독을 부지런히 했다.
시를 여러 방향으로 정의하신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시대 속 시들을 시대적 특징과 함께 논하신다. 역사 속 시대사에서 탄생한 여러 갈래의 시를 시대의 특징과 함께 읽어주신다. 시가 지닌 본성을 언어, 리듬, 이미지, 운문과 산문으로 들어 함축을 풀어주신다. 시가 안고 있는 시의 근원을 들어 올려 풀어헤치신다. 시의 계시. 동서양의 사상과 철학도 시와 연계되어 여러 곳에서 강의해 주신다. 내가 존경하는 많은 시인들의 시가 곳곳에서 펼쳐진다. 나는 작가가 들먹이시는 '숭고한 시인'의 목록에 든 이들이 모두 내 젊음을 함께 하신 분들이라는 것에 마냥 행복해했다. 십여 년 세속에 푹 찌들어 살면서 그만 잊고 지낸 세월에 용서를 빌었다.
시란 나이면서 너이다.
시는 이것이자 저것이다.
시는 리듬과 상상력과 현현(顯現)이다.
지금 떠올려 보는 세 문장의 요약이다. 얼마나 설레발을 치면서 읽은 독서인가. '독후감'이라도 써야 할 텐데. 그러나 이 책에 대한 한 편의 글을 쓰기에는 내 능력이 너무 짧다. 어쩌면, 아마, 이 책의 독후감은 쓸 수 없으리라 여겨진다(그러나 부디 쓸 수 있었으면. 나는 그날 기꺼이 눈물을 흘릴 것이다). 하여 감히 위 세 문장의 요약 글을 올린다. 일단 드높은 중고가라도 책을 구입할 것인가 아니면 2독, 3독을 계속 대여해서 할 것인가는 수일 내에 확정 지어 꼭 다시 읽을 참이다. 이 책을 떠올리게 해 주신 유튜브 '일당백'의 정박 선생님(하, '지구본 연구소'의 최준영 선생님이신가)께 무한 감사를 드린다.
요통이 찾아왔다. 칠월과 팔월의 경계에서 너무 안일했나 보다. 아니면 너무 행복했을까. 3단 계단식 전시대를 제법 들고 있었다. 한 손이었을까. 우 씨, '또 한 사람'이 읽던 책 좀 마저 보고 오겠다고 책장에 눈을 두고 있던 때 내 팔들은 무리를 했다. 내 육신은 주눅이 들었고 내 허리는 적어도 10 퍼 정도 손상을 입은 듯싶다. 그런데, 요통, 오랜만이다. 머리도 감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팠던, 오래전 어느 날이 떠오른다. 아파트 근처 소아마비 여자 약사님이 운영하시던 약국으로 달려갔더니 예쁜 얼굴에 고운 말씨로 '괜찮을 거예요'를 말씀하시면서 조제해주셨던 약. 한약 냄새가 폴폴 풍기는 약을 먹었더니 바로 나았다. 이후 두 번째인 듯. 조심해야 되겠다. 이젠 함부로 힘자랑을 할 때가 지났나 보다. 그 약국, 얼굴도 목소리도 참 예쁜 약사님과 키 크시고 잘 생겼다 느껴지는 약사님 남편의 러브 스토리가 떠오른다. 지금은 어디 사실까. 그리고 다음 시도 함께 떠오른다. 어찌 이런 시를 쓰셨을까 싶은 참 단정하신 나희덕 시인의 시이다.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
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
네 숨결 처음 데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
밝은 피 뽑아 네게 보내며 즐거움에 떨던
아, 나의 사랑을
- 나희덕 시 <뿌리에게> 1연
오늘을 사신 모든 이들이여. 아름다운 팔월이기를!
종일 비가 내렸다. 독서하기에 참 좋은 날이었다. 태풍은 발길을 돌렸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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