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번째 팝송을 소개한다. 열심히 외워 불렀더랬다.
날이 부숭부숭하다. 적당하게 건조하여 부드러운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맹숭맹숭 부스스하게 부은 듯한 대기 상태이다. 동지도 지났는데 좀처럼 날이 밝아지는 시각이 빨라진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되레 늦어진 듯싶다. 어제보다 조금 늦은 시각에 출근하는데 바깥공기의 색깔이 어제 이맘때보다 어둡다. 왜일까. 비가 내리는가? 엘리베이터 입구 반대편으로 난, 내 얼굴 셋 너비의 창밖을 수소문한다. 고요하다. 정확한 확인을 위하여 폰을 연다. 일기예보를 검색한다. 흰 구름 한 덩이가 둥실 떠 있다. 비는 내리지 않는다. 자, 가자.
두 귀에 이어폰을 지렛대 삼아 전해지는 유튜브에서 썸네일(?) '지하철 영어'가 들린다. 어? 친구가 건네는 문장이라 여겨진다. 가까이, 가까이 느껴진다. 기쁘다. 묘한 물리력의 보자기가 두껍게 쌓은 듯한 두텁게 쌓인 외국어 문장이 이렇게 가깝게 느껴진 적이 처음이다. 영화광이면 당연히 영어를 잘한다는데 나는 영 아니다. 그야말로 완전한 콩글리쉬이다. 국어를 잘하면 외국어도 쉽게 배운다는데 수능 국어 만점에 빛나는 진실인데도 영어가 영 시원찮다.
외국인과의 대화에서 이어질 문장을 곧바로 대지 못해 멈춘 적은 없으니 이로써 충분하다고 여겼다. 하기는 이런 생각이 내 영어 실력 키우기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으리라. 다행히 최근 들어 영화를 보면 예전과는 다른 친밀감이 느껴진다. 기쁘다. 오늘 뜻밖에 만난 영어는 그보다 더 가까이, 좀 더 가까이, 내 곁에 다가왔다 싶어 신이 난다. 이참에 영어 회화에 박차를 가해볼까도 싶다.
내친김에 중학교 시절 처음 배웠던 팝송을 데려온다. 당시 제대로 된 복사기가 있었을까. 어쨌든 영어 가사에 소리 나는 대로 적은 우리말 가사가 친절하게 그 아래 줄 서 있었다. 영어와 한글이 구한말 번안가요 베껴둔 것처럼 두 줄로 또박또박 적힌 악보를 받았다. 영어 선생님이 칠판에 적어주신 것을 우리가 공책에 따라 적었는지도 모르겠다. 알파벳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일단 가슴 부풀었다. 무슨 일이든지 처음 저지르게 되는 일은 신비라는 천으로 쌓인 베일이 한 겹 두 겹 있지 않은가. 한 겹을 벗겼더니 영어 가사를 노래 부르는 유명 팝송 가수가 마법의 깃발을 흔들면서 서 있었다. 또 한 겹을 벗기면 대한민국 가수가 한글에 참기름을 발라서 열심히 혀를 굴리면서 노래를 불러줬다. 영어 가사도, 한글로 번역된 소리 가사도 그리고 음표들이 오르내리는 가락이며 가락 안에 숨은 리듬까지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굴러가는 일심동체였다.
유려한 영어 필기체는 영어 선생님의 필체였다는 것이 또렷하다. 요즘 캘리그래피랍시고 가끔 쓰는 그림문자 못지않게 예술적이었다. 전체적인 모양새는 고대 상형문자인 듯 혹은 어느 특정 동물들이 자기들만의 의사소통을 위해 내놓은 기호인 듯 오선지 위 음표 아래 우아한 품새로 배열해 있었다. 우리는 한글 발음만 주야장천 외우면 됐다.
영어 선생님은 나만큼이나 빼빼 마른 분이셨다. 사십 대 초반쯤 되셨을까. 존함도 똑똑히 기억한다. 며칠까지 외워오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노라고 으름장을 놓던 기억도 선명하다. 노래는 잘 부르셨던가? 어렴풋이 기억되는 것이 요즈음 디지털상에서 노래 부르기용 악보처럼 한 악절씩 선생님이 부르시면 우리가 따라 부르는 방법으로 외워 불렀을 것이다. 학교 축제 때에 단체로 무대 위에 서서 불렀던 것도 같다.
중학교 초년병 시절이니 공부라는 것의 맛을 처음 맛보고서 우왕좌왕하던 때이다. 그다지 거창한 계획으로 조리 있는 생을 꾸리는 것과는 영 거리가 먼 태생이었지만 불쑥불쑥 내 앞에 서 있는 것이라면 열심히 해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성경책과 함께 살듯 악보와 함께 며칠 진중했다. 마침내 외웠다. 아직 목소리도 청명하기 그지없던 시기였으므로 노래를 곧잘 불렀다. 악보를 보지 않고 가사를 보지 않고 끝까지 노래 부를 때의 심정은 장원급제의 맛과 다름없었으리라. 물론 나 혼자서 선뜻 다 외운 것도 아니었으면서 말이다.
그때 영어 노래 외워 부르기는 딱 한 곡으로 끝났다. 그 노래에 이어 대여섯 곡만 더 외워 불렀더라면 지금 내 영어 스피킹 실력보다는 낫지 않을까. 억지 춘향 격의 애매한 외국어 습득 방식이지만 어쨌든 한국어 발음으로 외웠는데도 영어 문장 해석이 가능했다. 팝송 한 곡을 그럴듯한 영어 발음으로 온전하게 부를 수 있었다. 자연스레 해석된 영어 문장을 아직도 산뜻하고 뚜렷하게 기억한다.
놀라운 것은 딱 거기에 찍힌 방점으로 내 영어 문장 외우기는 끝났다는 것이다. 중학 3년, 고등 3년 정규 과목이었으니 다른 문장들도 외우기는 했겠지. 시금털털한 나이의 지금도 여전히 내 안에 확실히 자리 잡은 영어 문장은 그 노래에 소속된 것들이 전부이다. 어쭙잖은 방식이더라도 반복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몇 곡만이라도 더 팝송 외워 부르기를 계속했더라면 아마 지금쯤 원어민과 넉살 섞은 수준의 영어를 하고 있지 않을까. 공부를 천명이라 여기며 살던 친구들을 스스로 더 하기도 했으리라.
내게는 선명한 원어로 읽기를 원하는 명작소설이 있다. 세대를 초월하여 명문으로 휘황찬란한 소설이다.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이다. 우리 글 읽듯 원어인 영어로 좀 율리시스를 읽고 싶다. 그런 날이 내게도 올 수 있을까. 이를 기대하기에는 내게 남은 날이 너무 짧지 않은가.
어두운 색을 머금은 대기가 사람을 차분하게 한다. 출근을 준비하면서 느닷없이 듣게 된 '지하철 영어' 회화가 'long long time' 시절의 파릇파릇한 내 청춘 한 조각을 또 데려왔다.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다. 마침내 글 저 위에서부터 어서 내놓고 싶던, 내가 처음 배웠던 팝송을 소개한다.
내 외로이 드리는 기도에 대한 대답이신
당신,
당신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놀라운 당신의 사랑, 그 이전까지 나는 너무도 외로웠어요.
내가 동안 어떻게 살았을까요.
당신은 나의 인생, 나의 운명 그리고 나의 사랑.
당신은 나의 모든 것.
당신을 사랑해요.~
한 세기를 울렸던(울리는?) 팝송이라고 선생님이 그러셨던 것 같다. Neil Sedaka의 'You meaning to me'였다. 가사를 곱씹으면서 읽어보라. 이 얼마나 사춘기 감성을 자극하는, 오글거리는 내용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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