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쯤에 서야 할까.
일터 같은 부서 동료들은 모두 젊다. 혼인 기에 머물러 있는, 씩씩하고 고운 처녀, 총각이 있는가 하면 새신랑이 있고 아들 둘을 둔 사내가 있다. 올해 마흔 된 친구가 아이 둘을 둔 사내이다. 나와 가장 나이가 가깝다. 그의 첫인상 외모는 이십 대 후반 혹은 삼십 초반의 총각 같았다. 2년 전, 첫 맞대면을 하던 날이었다. 인상이 참 싱그러워 나는 그만 말을 놓고 말았다.
처음부터 말을 놓았던 것은 아니다.
"꼭 우리 아들 같아요."
"예? 아들이 저만큼 나이를 먹었다고요?"
"예, 딱 우리 아들 연배일 것 같은데요?"
"그리 안 보이시는데요."
"어, 더 많이~보이는~, 에구머니나. 그래요, 제가 나이가 들어 보이나 보군요. 피부가 너무 하얗고 약해서 주름살이 빨리, 남보다 더 많이 주름지더라고요. 피부가 너무 부드럽거든요."
"아, 그런 말씀이 아니고요. 제가 보기에는 제 나이 또래 자녀는 없으실 것 같아서요. 제가 올해 서른여덟이거든요."
"예? 세상에나, 이게 무슨 일? 나는 서른이나 서른 이전으로 봤는데. 동안이네, 동안. 얼굴이 너무 곱다. 참 남자한테는 곱다고 그러는 것 아니겠구나. 어쨌든 피부가 너무 곱고 깨끗해요."
남자는 거침없이 말을 놓는 나의 무례함에 무표정의 침묵을 행사했다. 재빨리 나의 경솔함을 사과하자 괜찮다는 눈웃음 한 컷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살다 살다 원 세상에나.'
너무나도 예상외의 일을 겪게 되었거나 부딪히고 당할 때 흔히 이렇게들 말한다. 그는 말이 없어도 너무 없다. 내 생이 그리 짧은 것이 아닌데 내게 의식이며 인식이라는 것이 형성된 후, 세상 살면서 그렇게나 말이 없는 사람은 그 사람이 처음이다. 지난해와 지지난해 2년 동안 같은 일터에서 살았다. 올해로 3년째 함께 살게 될 것이다.
그가 사적인 말을 하는 것을 본 적은 2년 동안 열 번 안이다. 내 일터는 너무 바빠 특별한 주제로 일의 진척사항을 처리해야 하거나 급하게 전달해야 할 사항이 있지 않는 한 모일 기회가 거의 없다. 모이더라도 전달 사항이나 토의를 마치면 일사천리로 어떤 일이 정해지고 그것으로 끝이다. 남은 일은 각자 해야 할 일을 각자 열심히 하고 남은 일은 업무 담당자가 해내면 된다. 여유롭게 차 한 잔을 마셔본 적이 없다. 마흔 되는 동료가 입을 벌리는 경우는 그러므로 더더욱, 거의 없다.
일터의 회식을 할 기회도 거의 없다. 코로나19가 힘이기도 하다. 어쩌다가 일터 전체 회식이 있거나 일터에서 복지 차원으로 제공되는 그룹별 회식이 1년에 두세 차례 있긴 하다. 전체 회식 후 우리 그룹은 대개 나이 많은 내가 2차를 쏜다. 엉큼하게 들어앉은, 골목길 끝 움쑥 들어간 거리 한쪽 가게에서 오물오물 술자리를 갖는다. 소위 룸 소주방에 처박혀 서너 시간을 노래 부르거나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가면서 둘레만 둥둥 핥아내는 식의 이야기로 같은 공간에 머물기도 한다.
어제 회식이 딱 그런 꼴의 모임이었다. 전체 회식이 있었다. 흔한 삼겹살 안주에 여러 야채도 함께 꿰어 열심히 먹었다.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술이라는 것을 먹었다. 나는 보통 소주 한 잔을 받아 들고는 술 마시는 자들이 한 병을 다 마실 때 딱 한 모금씩 마시는 방법으로 술을 마신다. 여기에 '술 권하는 사회'의 장점인 확실한 의사소통 가능이라는 것에 목을 매다 보니 거뜬히 술과 대적을 하게 되기도 한다. 최대 소주 두 컵 정도가 한계선이다. 술을 좋아하는 서른여덟에 만났는데 이젠 마흔이 된 말 없는 남자와도 드디어 소통할 수 있게 된다.
올해 마침내 마흔 된 동료가 입을 벌리기 시작하는 때다. 제법 스스로 나서서 입을 벌리기도 한다. 나는 마냥 신기해하면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길 기대하지만 이내 입을 다시 닫는다. 말하기의 정도, 최고 수위를 레벨 10이라고 한다면 그는 레벨 3까지만 이야기한다. 그쯤에서 딱 끝낸다. 절대로 그 이상의 말은 덧붙이거나 이불을 덮어씌워 말을 포장하거나 하지도 않는다.
어제 1차가 끝나고 2차로 진입할 무렵에는 내 팔짱을 꼈다. 오호라, 세상에나, 이게 무슨 일인가? 어쩌다가 한 번씩 씩 웃어주는 눈웃음까지 보여주었다. 그가 내 팔짱을 끼고 푸리 딩딩한 겨울밤 민낯을 걸었다. 어제는 사실 전체 회식 후 만나면 가곤 하던 룸 소주방을 갈 예정이었다. 우리 그룹 해단식을 하자고 사전에 입을 모았다. 그러나 2차로 떠나려는데 우리 그룹만 가려니 했던 것이 어긋났다. 다른 그룹의 인물도 몇 끼어있었다.
오른쪽 겨드랑이에서 흘러내리는 긴장감 묻은 땀이 폴폴 쏟아지는 듯싶었다. 오른 팔이 조금 마비되기도 했을 것이다. 순간, 남자의 팔뚝에서 솟아나는 기류가 합해졌으리라 생각되었다. 일백 미터쯤 걸으니 한편 달달 덜덜 숨을 쉬기가 불편했다. 하지만 또렷한 의식으로 확인하고 보니 내 오른팔을 끼고 있는 그 남자의 팔에 흐르는 기류에는 어떤 변화도 감지되지 않았다. 팔도 무뚝뚝했다. 굳이 팔을 뺄 필요가 없었다. 내가 말했다.
""에고, 오늘 해단식을 하려고 했더니 다른 그룹의 젊은이들이 보이네요. 다음에 하기로 하고 나는 집에 가야겠어요. 괜히 젊은 사람들 노는 데에 끼기가 그러네요."
이미 술기운이 과한 상태의 그 남자는 알아들었을 리 만무하다 싶게 조그마한 소리로 내뱉은 내 말을 제대로 알아차렸다.
"에에이, 왜요오? 같이 가요오, 같이."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세상에나 어리광 비슷한 어조의 어투였다. 누구 들으면 별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한다고들 하겠지만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말투에 나는 그만 깜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남자의 팔을 쑤욱 빼냈다.
남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옆에 서서 걸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너어무 나이 드셨다고 뒤로 물러서지 마세요. 세상에나, 저, 처음 봤어요. 자꾸 빠지시면 그것도 잘못하면 갑질이 됩니다요. 그것이 사람을 더 힘들게 할 수도 있어요. 오늘은 같이 가요. 젊은 사람들 틈에도 끼어봐요오. 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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