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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하루 공개

초가을의 참 맛을 즐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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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을의 참 맛을 즐기면서~

 

 

 

어젯밤 달 1

 

 

영화 <영혼의 집>을 마저 보고 잤다. 새벽 3시 가까이 되어 잠들었다. 잠은 마냥 상상 가득한 꿈길이었다. 꿈은 진보랏빛 하늘 가득 감개무량이었다. 보는 내내 가슴 뛰었는가 하면 잔잔했는가 하면 신비스러웠는가 하면 불기둥이 솟았는가 하면 역사가 창작되었다. 이런 영화만 있다면 나는 아마 백 살, 천 살을 살고 싶어 하겠지. 평소 하는 '되도록 짧은 생'은 쓰레기통에 쑥 집어넣으리라. 

 

내일 출근이 아니라는 것이 참 마음 가볍게 하는 기쁨이었다. '살고 싶은 맛'을 온전하게 실감한 밤이었다. 꽤 많은 영화배우를 좋아한다. 남자 배우 중 단 한 순간이라도 만나 눈빛으로 말하고 살포시 겹으로 올린 두 손으로 마음을 전하고픈 '내 마음 속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리스트 열 중 한 사람이 '제레미 아이언스'이다. 어젯밤 본 영화의 주인공이었다. 청년기에서부터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보여주는 그의 연기는 나의 사람 보는 눈이 얼마나 현명한가를 확인시켰다. 나 더 늙기 전에 그를 한번 만나 볼 수 있다면. 그를 그린 나의 그림을 선물할 텐데. 

 

 

어젯밤 달 2

 

 

여주인공은 '메릴 스트립'이다. 솔직해지자. 그녀는 늘 나의 질투의 대상이다. 배역 어느 하나 다르지 않은 분위기는 '신비스러움'이다. 그녀는 부엌데기 세상사에 찌든 주부 역을 해도 그렇고 삼 겹, 사 겹, 겹겹이 쌓인 연애의 한 중간에 서 있는 역을 맡아 해도 마찬가지이다. 어젯밤 본 영화에서는 '신비'의 대표 아이콘으로 등장했다. 그녀의 금빛, 은빛 머리카락 속에 숨어 사는 난쟁이 소녀가 되고 싶었다. 그녀가 일으키는 마법의 성을 진두지휘하는 천사가 되고 싶었다. 그녀 잠결 속 한 가닥 꿈에 등장하는 마녀였으면 싶었다. 그녀의 사랑이 제레미 아이언스였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녀는 나의 연적이자 나의 동료이자 나의 꿈이자 나의 소원이다.

 

아침을 늘어지게 잤다. 조그마한 창 하나만 열어두고 잤는데도 이불 밖에서 수면 중이었던 양쪽 어깨에서 팔꿈치까지의 위 팔 부분에 와 닿은 기운이 제법 차다. 양쩍 쇄골 깊은 골에도 사각사각 서늘한 기가 서린다. 여름 내내 덮던 이불을 교체하기로 했다. 내 한 몸 넣고 빼는 정도로 사용하는 이불인지라 계절의 순환에 따라 일년에 딱 네 번 이불 빨래를 한다. 요와 이불을 이틀 예약으로 세탁기에 넣었다. 오직 흰 이불만을 선호하여 표백제 옥시크린과 세탁용 소다를 푼 물에 이틀여 담근다. 게으름의 극치를 사는 주제에 오직 흰 침구만을 고집하는 내게 가끔 조롱 선명한 웃음을 뿌리곤 한다. 그것마저 즐겁게 받아들이므로 괜찮은 주생활 중 하나이다.  

 

 

어젯밤 달 3

 

 

청소까지 끝내고 나니 가을 이불을 전시하고 나니 열 시쯤 되었을까. 아하, 생각해보니 오늘이 일요일이구나. 화분에 물 주기를 시작했다. 오늘은 모두에게 물을 주는 날이다. 긴 호스 연결을 아직 해결하지 않고 있는 '또 한 사람'에게 화가 났지만 지저분하게 불린 화분 수의 주인공인 나를 탓하면서 그만뒀다. 물뿌리개로 열심히 물 주기를 했다. 걷기 운동을 한다 치고 듣고 싶은 유튜브 강의를 들으면서 하면 한결 마음이 가볍다. 다 자란 부추를 잘라 전을 부쳐 먹을까 하다가 멈췄다. 냉장고 가득 차 있는 추석 음식부터 해결해야 한다. 

 

어젯밤 4

 

 

컴퓨터를 켜고 보니 일주일을(아니 이주일째?) 이젤 위에서 수심 가득한 얼굴을 만들어가고 있는 영화 <노인의 나라는 없다>의 주인공 '하비에르 바르뎀'이 보인다. 그림 속 얼굴은 다른 영화 속 얼굴이다. 시작할 때는 쉽게 그려질 것 같았는데 영 진도가 나가질 않아 사진과는 다른 어정쩡한 '수심 가득'이다. '오기'라는 말이 생각났다. 

 

 

어젯밤 4

 

 

오기(傲氣)는 부족한 능력이면서도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마음을 말한다. 오기의 오(傲)는 거만하고 오만하고 교만함을 뜻한다. 나 자신에게 물었다. 어중간한 능력이라면 오기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가 부리는 거만하고, 오만하고, 교만한 짓은 자기 얼굴에 '누'가 되지만 어설픈 능력의 사람이 부리는 거만하고 오만하고 교만한 짓은 아무도 쳐다보는 이 없으니 부릴만 하다. 오기라도 있어야 한다. A3 크기의 화지에 그리는 인물 정밀묘사 한 장을 이토록 긴 연휴에는 완성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집 베란다에 놀러 온, 어젯밤 보름달.

 

 

오기를 발동시켜 점심 후 지금껏 '하비에르 바르뎀'을 그리고 있다. 영화 <참을 수 없는 사랑>도 봤다. 가지가지 나물에 비빈 밥도 먹었다. 내 좋아하는 최준영 박사님의 지구본 연구소 강의도 들었다. 내일도 쉰다. 제법 긴 시간, 가을벌레들의 소리, 일정한 음높이와 리듬이 사람이 쉬기에 참 부드러운 밤이 될 것임을 예고하는 듯하다. 달을 좀 더 달답게 찍을 수 없는 휴대폰. 내가 문제일까, 폰이 문제일까. 어젯밤 늦도록 내 베란다에 놀러 와있던 팔월 보름달은 올가을이 내게 편안함을 선사할 것이라고 알려줬다. 초가을, 밤이 참 깨끗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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