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린 '하비에르 바르뎀'을 이곳 블로그에 올릴까 말까.
온 세상이 그늘이었다. 조물주는 종일 햇빛 한 방울도 내가 볼 수 있는 지구에 떨어뜨려 주지 않았다. 점심 이후 혼자 있는 시간 속 내가 잿빛 무채색 지구를 내다보는 외계인처럼 느껴졌다. 이어 온다던 태풍이 약해진 자기 존재를 햇빛 차단 정도로 과시하는 것일까. 내 우주는 피해야 할 더위도 없는 오늘 온통 그늘이었다.
누구, 열폭할 일을 맞았다면 마음속 화로 생긴 열을 오늘같은 날 내놓으면 좋을 텐데 싶었다. '열폭'이라니. '열폭'은 '열등감 폭발'의 줄임말이다. 능력 없는 자들이 제 안에 생성된 낮은 자존감을 뜻밖의 행동이나 거친 언어로 분출하는 것이다. 사소한 일에도 분을 못 이기고 마구 폭발한다. 현대인들의 언어 습관이 만든 신조어 중 하나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 그늘은 나를 위한 것이구나. 종일 그림을 그리면서 이도 저도 아닌 그림을 만드는 나에게 얼마나 절망했던가. 누구 내 곁에서 사소한 간섭이라도 해왔다면 나는 그만 연필을 부러뜨려 던졌을 것이다. 그늘은 나를 위한 공간 조성이었구나.
어제 마음에 새긴 '오기'를 불러와 그림을 그렸다. 완성했다. 완성의 기준은 내 나름대로, 내 생각 가는 대로 정했다. 지친 마음이 그은 선이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로 내 혼을 쏙 빼 간 배우 '하비에르 바르뎀'이 완성되었다. 아내 페놀로페 크루즈로 인해 그리기 시작했다. 페놀로페 크루즈의 영화를 보면서 그녀를 그릴까 했다가 훨씬 그리는 재미가 더 할 것 같은 그녀의 남편을 먼저 초대하였다. 그는 참 잘 생겼다. 부인 페놀로페 크루즈의 미모에 대어봐도 전혀 꿀리지 않을 얼굴이다. 연기 또한 잘한다. 천의 얼굴이다.
틀을 잡아놓고 긴 시간 머물러 있었다. 그런 그림이 어제 술술 그려졌다. 영락없이 하비에르 바르뎀이었다.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작품을 완성할 수 있을까 기대되었다. 그러나 연필 자국이 더해질수록 아니었다. 점점 사진 속 얼굴 분위기와 멀어졌다. 여러 배우의 얼굴 이곳저곳이 그림 속에 자리를 펴 앉았다. 어제 일기에서 주장했던 능력 부족한 자의 오기가 필요했다. 마구 그렸다. 몸과 마음이 지치자 오기는 강하게 힘을 부렸다. '완성'이라고 낙인찍었다. 늘 하던 방법으로 제목을 붙이고 날짜를 쓰고 사인을 했다. 멋진 낙관이었다. 완성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부끄러울 일임은 잘 알고 있었다.
너무 지쳐 사인하는 순간 차라리 시원했다. 블로그에 올릴까 싶었는데 부끄럽다는 생각 한 점 없이 마구 올렸던 것이 떠올랐다. 몇 떠올려보니 나 자신이 참 우스웠다. 앞뒤 가리지 않은 채 마구 올렸던, 대담했던 내 행동이 어색하지도 않았나 보다. 생각해보니 나는 벌써 다 살았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익명성'을 품고 오 작동이자 불편한 용기를 과감하게 펼쳐 왔다. 부끄러운 일이다.
한편 그림 올리기를 그만두는 것도 아니다 싶다. 그림을 올리기 시작한 의도가 있었다. 그림 그리기를 꾸준히 하자는 자기 다짐이었다. 잘 그리고 잘못 그리고를 떠나서 하나둘 블로그에 올리면서 그림에서 손을 놓지 말자는 것이었다. 언젠가 자신 있게 올릴 수 있는 좋은 작품도 그릴 수 있겠다 싶어서이다. 물론 오늘 그림은 너무나 엉터리여서 올리는 것은 너무 한다 싶기도 하고. 하여 망설인다.
오늘 한 일에는 영화 한 편과 또 한 편의 반을 본 시간, 점심과 몇 주전부리로 미각을 충족시켰던 시간이 포함된다. 영화 <참을 수 없는 사랑>과 <뮌헨, 전쟁의 문턱에서>를 봤다. 영화 두 편 시청은 나를 뿌듯하게 한다. 내 안타까운 그림 그리기 실력을 다독거릴 수 있다. 특히 <뮌헨, 전쟁의 문턱에서>는 내 취향의 영화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좋은 영화였다. 영화는 온 인류의 삶을 품는다.
어서 자자, 내일은 출근이다.
'라이프 > 하루 공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 소녀로부터 삶의 의욕을 나눠 받았다 (27) | 2022.09.14 |
---|---|
우주 창조신의 관리 범위 밖으로 떨어뜨려지다 (19) | 2022.09.13 |
초가을의 참 맛을 즐기면서~ (44) | 2022.09.11 |
추석도 나와 함께 나이 들더라 (65) | 2022.09.10 |
경건한 주인 바뀜 식을 거행하였다 - 추석 명절로 인해 하루 늦게 올림 (28) | 2022.09.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