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해양 마라톤, 대회에 출전자의 보호자로 함께하였다.
빨리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 관념의 작용이었을까. 궁금한데도 끝까지 보지 못한 영화 때문이었을까. 초저녁 잠깐, 잠이 쏟아지던 시각을 지나쳤더니 밤새 수면의 신이 등을 돌렸다. 알량한 예민함이 지나쳐 보편적인 일상을 살지 못하는 것은 운명이리라. 하늘이 내려주신, 잠의 여신과의 불화에 어젯밤에는 내가 어깃장을 그었다. 으드드득, 거칠게, 굵기를 달리한, 전혀 규칙을 지니지 못한 선이었다. 일어나 앉았다.
아직 끝내지 못한 영화를 봤다. <내 생애 첫 번째 마가리타>. 인도 영화였다. 드나드는 영화 관련 플랫폼의 평점에 의지해서 보기 시작한 영화였다. 5점 만점에 4.2. 시종일관, 스토리를 풀어내는 과정이며 영화 속 사람들의 생활이 마치 실재 인간계의 실상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생각이 들 만큼 친근감이 들었다. 나 그리고 내 이웃 중 어느 집의 실상이었다.
영화 보기를 끝마치고서도 잠이 오지 않았다. 듣고 있던 '수면 영상'을 껐다. 새날 행사가 있으니 동행해야 한다던 이에게 전화를 넣었다. 마라톤 출전 예정자와 통화했다. 그는 외박(?) 중이었다. 새벽 다섯 시가 넘어서고 있는 시각이었다.
"빨리 준비해."
"알았어. 잠을 한숨도 못 잤어. 내가 꼭 가야 해? 내가 운전해야 해?"
"아니야. 운전은 내가 할 거야. 준비해. 9시 이전에 도착해야 해."
올해 들어 전국에서 첫 번째 실시하는 마라톤이란다. 참석해야 한단다. 일종의 보호자 역할을 하러 가는 것이란다. 말하자면, 뛰다 보면 여러 가지 돌발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단다. 가끔 결승선 통과를 앞두고 혹은 결승선을 통과한 후에도 불상사가 발생하는 일이 있곤 한단다. 이런저런 문제가 있을 수 있으므로 옆 사람이 필요하단다. 보호자 자격을 지닌 옆 사람이 있어야 한단다.
며칠 전 건강검진 결과 큰일을 안고 있지나 않은지 걱정되었는데 그것을 훌훌 털어버린 상황이다. 함께하자, 동행해 주자. 제 할 일 다 한 어린아이에게 주는 보상 형식의 동조였다. 준비했으니 열심히 해보라는 심정으로 함께 길을 나섰다. 서로 의지하지 않고 사는 것을 마치 결의에 찬 주제로 정해놓은 듯 생활하므로 오랜만의 동행이었다.
엄청 많은 차들이 그곳, 체육공원으로 가고 있었다. 전국에서 몰려든단다. 아니나 다를까. 제법 드넓은 듯 보이는 주차장에 빈 곳이 거의 없었다. 대형버스로 곳곳에서 이동해 왔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전국 각지 일부 마라톤 동호회에서는 아마 지난밤에 내려와 텐트를 치고 준비했나 보다. 어린아이에서 백발노인까지 세대를 초월한 마라톤 축제였다. 심지어 유모차에 태워져서 대회에 함께 하는 아기들도 있었다. 장관이었다.
여러 단체 틈에 삐죽 끼어든 우리 집 사나이는 난생처음 국가적인 규모의 마라톤 출전이라는 것에 힘입어 나름 흥분되어 있었다. 오늘을 위해 알차게 준비하여 참가한 자기 생에 마음껏 큰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결과에 상관없이 즐기는 일이 사람을 살게 한다. 고3 때에도 운동장 끝 철봉에 매달려 운동하기에 정신을 쏟았던 날들을 떠올리면서 대학을 체육과로 가지 못한 것이 서운하다는 것을 가끔 말하곤 한다. 아이 4학년 때 내가 사는 소도시의 '〇〇시 초등학생 학년별 마라톤'에서 1등을 차지한 것은 모두 자기 유전자 덕분이라며 뿌듯해하던 사람이다.
잠은 쏟아지고, 현실은 잠을 이겨내야만 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정신없이 나오느라 실내용 얇은 바지를 입고 나온, 가는 빈사 상태의 인간 지경인 내 기분에는 관심 밖이었다. 사진을 찍어야 해서 내가 꼭 필요하다는 이야기에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이 마라톤이 뭐라고. 혼자 좀 하면 안 되나. 차 안에 누워 잠을 잘까 하다가 경기 출발 후 한 시간 앞뒤 시각에 도착한다는 말에 운동장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한번 잠들면 누가 꼬집어도 못 일어날 것 같았다.
경기는 전 구간, 하프 구간, 10km 구간, 5km 구간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우리 집 사나이는 10km 구간을 뛴단다. 9시 35분에 출발하면 10시 30분의 앞뒤 주변 시각에는 도착할 것이란다. 결승선에서 대기하다가 들어오는 모습을 사진과 영상으로 붙잡아두라고 했다. 출발!
나는 매년 마라톤 중계방송을 꼭 봐 왔다. 특히 연초 3월에 실시되는 동아일보 주관 '서울 국제 마라톤'은 성인이 된 이후 거의 모든 해를 시청했다. 두 시간이 넘는 경기이다. 시작 즈음에서 전 구간의 반쯤 돌았을 때까지는 이것저것 집안일을 하면서 시청한다. 한쪽 귀로 중계방송을 듣는 것이 대부분이다. 선두권이 3분의 2지점 정도를 통과하면 나의 경기 시청 방법이 달라진다. 본격적인 궤도의 시청을 시작한다. 바삐 하던 모든 일을 우선멈춤 한다. 텔레비전 앞에 정좌한다. 옆에 티슈를 꼭 챙겨둔다. 왜?
고딕의 모양새로 앉는다. 단 한 장면도 놓치지 않도록 나 스스로 몸과 마음의 자세를 경계한다. 페이스메이커로 뛰는 사람의 열정까지 챙겨본다. 앞뒤 순서가 뒤집고 뒤바꿔진다. 중계자가 해당 선수의 개인사를 이야기한다. 선수들의 걸음에 맞춰 눈을 움직이면서 중계진의 해설도 열심히 귀에 담는다. 컨디션 등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든지 당일 페이스 조절에 실패한 것조차 함께 듣고 놀라고 안타까워한다. 각 선수들의 열정과 끈기와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너의 일, 선수 당사자의 일로 마감하지 않는다. 내 일처럼 선수들의 안타까움이며 뿌듯함을 함께한다.
전 구간을 뛰는 마라톤에서는 대부분 꼭 그런다. 두세 명 혹은 한두 명이, 선두를 두고 잡았다가 놓았다가를 반복한다. 붙잡혔다가 놓쳤다가를 어김없이 연출한다. 특히 운동장에 들어와 출발선 즉 결승선으로 향하는 마지막 운동장 한 바퀴 돌기에서 연출되는 여러 컷은 우리 현실,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긴장감이 고결하다. 나는 선두 두셋 혹은 한두 명이 운동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줄곧 눈물 바람이다. 아니 경기 도중 이미 곳곳에서 눈물이며 콧물을 찔끔거렸을 수도 있다.
마라톤이야말로 우리네 일생을 두세 시간으로 압축해 놓은 인생 소극이다. 마라톤 경기를 시청하면서 흘린 눈물은 내 생의 곳곳에서 차마 흘릴 수 없었던 눈물이다. 오늘은 현장에서 수많은 인생을 실감했다. 저,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추운 겨울날 두 시간 여 땅을 울리는 것은 자기 존재를 확신하기 위한 소망의 작용이지 않을까.
5km 선두 주자가 골인했다. 온몸에 기어코 해내겠다는 결기가 대단했다. 마침내 온전히 이루어낸 것에 대한 감격으로 낯이 붉어졌다. 단단한 몸 전체에서 숭고함이 뿜어져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았다 싶은데 10km 선두 주자도 들어왔다. 각각 나름의 생을 사는 이들의 고아한 삶들이 열매를 맺고 있었다. 남자는 오지 않았다. 들어올 것이라고 약속한 10시 30분이 한참 지났는데도 남자의 실루엣을 운동장 트랙에서 확인할 수 없었다. 이런, 스스로 너무나 믿었구나. 처음인데도 그랬다면 이것은 자만이지 않나? 투덜거릴 즈음 트랙을 뛰는 이들 중 힘든 기색을 전혀 내보이는 한 남자의 모습이 낯익었다.
대략 10km를 뛰는 선수들 중 스무 번째는 될까. 아니 삼십 번째? 지금껏 골인한 사람들의 모습이 운동장 바닥에 여전한데 그다지 힘들어하지 않은 모습이 차라리 낯설었다. 평소 살아내는 방식 그대로, 앞뒤 주자의 기록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선수 대부분은 결승선을 통과하면 가쁜 숨을 조절하느라 주저앉는데 우리 집 사나이는 얼굴이 조금 붉어진 것 외에는 출발선에서의 모습과 큰 차이가 없었다. 가볍게 결승선을 통과하였다. 나름 야무진 계획으로 준비를 했는지 목표 시간보다 5분 이상 달리는 시간을 축소했다며 기뻐했다. 본부로부터 받은 증서를 스캔하여 가족 톡방에 바로 올렸다. 군인 신분의 아들이 축하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와~"
"10km를 52분에용!!"
"최고 기록 아닌가 용?"
"드디어~"
"축하드립니다. ㅎㅅㅎ"
오늘은 몇 선수의 모습에서 세차게 솟아오르던 눈물을 속으로 삼켰다. 참가 선수들 모두에게 박수를 보낸다. 우리 집 아저씨를 비롯한 전 인류 마라토너들에게 아낌없이 큰 기대를 전한다. 특히 아기 둘을 유모차에 앉혀 완주한 젊은 아빠와 여전히 어여쁜 모습의 엄마에게, 아들과 함께 달려오다가 결승선에서 속도를 낮춰 아들에게 기록을 양보하던 곧은 부정의 아빠에게, 온 가족을 꾸려 함께 뛰던 제법 나이 있으신 듯한 부모에게 감사의 염을 표한다. 당신들의 모습을 보니 내가 살고 싶어지더라.
그 외 오늘 내가 한 일을 적어보자. 문득, 휴가 동안 내가 무엇을 했나 생각하니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아 안타깝다. 그림은 언제 그릴까.
- 영화 <사랑, 결혼, 그 밖의 것들> 시청. 제레미 아이언스의 출연이길래 보고 있다. 글쎄 3분의 1쯤에서 멈췄는데 별 매력이 없다.
- 유튜브 <최준영 박사의 지구본 연구소> 강의로 '세계유산을 둘러싼 갈등! 사도 광산은 왜 논란인가?'를 들었다. 다시 들어야 할 판. 내용이 자세하게 남아 있지 않다.
- 유튜브 <최준영 박사의 지구본 연구소> 강의로 '우크라이나 돈바스 최악의 상황 그리고 러시아의 포탄 부족?'을 들었다. 역시 다시 한번 들어야겠다. 그렇고 그렇다는 분위기만 남아 있다.
- 유튜브 <최준영 박사의 지구본 연구소> 강의로 '2023년 전망 특별 편, 혼란의 세계 각국 올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들었다. 두 번째 듣는데도 역시 강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남아 있지 않다. 유럽은 힘들 것이고 미국과 중국은 서로를 확실하게 겨냥하는 짓은 덜 할 것이고 이집트와 레바논은 위험하고. 중동에서 새로운 역사가 씌어지지 않을까. 중동 여러 나라는 미국과 중국을 놓고 나름 왔다갔다를 할 것이고. 우리는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간을 잘 봐야 되고. 다시 한번 더 듣자.
- 그리고 농협 하나로 마트에서 시장을 봐 와 김치찌개로 점심을 먹었다.
운동장을 걸으면서 오랜만에 이런 저런 뉴스를 읽었다.
- 독일 쓰레기 처리 관련 기사를 읽었다. 독일답다.
- 이태원 참사 유족 대표 "살고 싶은데, 손 내미는 사람이 없다." : 눈물겹다. 대체 국가라는 것은?
- 김치에 핀 하얀 곰팡이는 무해 물질? 진짜로? 더 정확한, 타당한 근거를 알고 싶다.
- 아기 낳으면 5천만 원을 준다. 전남 농촌들 여기 저기 여럿! : 글쎄다. 저출산은 방법을 제대로 바꿔야 할 듯.
- 수비가 메시 타이밍 못 잡는 이유 영상 시청 : 메시는 메시다.
- 5년 후엔 인천이 제2의 도시이다. 인구 밀접. 서울 근접 등의 이유로!
- NYT 동아시아 '근로 노령화 사회 주목 - 이 나이에 일 즐겁지 않다.'라는 기사로 한국 사회를 겨냥하다. : 나, 속없이 그런다. 사실 그러고 싶다. 70까지는 몸을 움직여서 일을 해야지. 정년 후에는 꼭 노동을 해야지. 되도록 일을 하면서 살다가 아니다 싶으면 어서 죽어야지. 요즈음 자꾸 이런 유의 생각을 한다. 진지하지 못한~
- 19세기 세계를 풍미한 'K컬처' 풍속화가 - 김홍도, 신윤복이 아닌 '기산 김준근'이다 처음 듣는 이름이다.(생몰연대 미상) - 더 찾아봐야겠다.
- 가수 겸 배우 노민우의 일본 출국 패션을 보다. 그에게서는 묘한 매력을 느낀다. 그가 참 좋더라. ㅋ
오늘은 자자. 꼭 자야 한다. 내일을 위해서, 온전한 낮 생활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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