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친김에 걷고 또 걷자.
- 아침 걷기 중 만난 건강한 은발의 할머니도 기억하면서. 할머니가 내 오늘 아침 일기의 고운 손님이다.
이 주일 여 함께 사는 이의 건강 검진 결과를 놓고 마음 졸였다. 온갖 생각으로 속이 탔다. 애가 탔다. 진료일도 좀 빨리 받아오고 결과도 좀 빨리 받아왔으면 좋으련만 남자는 병원에서 하자는 대로 날을 받아왔다. 전전반측(輾轉反側),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 주일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기진맥진한 채 밤낮을 구분할 수 없었다. 밤이 없었다.
조물주는 인간의 무엇이 그리 괘씸하여 병이라는 것을 마련하여 떠맡기는 것인가. 그 상황이 내 것이 아니고 우리 모두의 것이 아니라면 얼마나 좋을까. 눈만 뜨면 떠올렸다. 버릴 수 있다면. 아프고 병들고 중병을 선고받아야 하고, 수술하고 치료받고 나아가는 것을 지켜보고, 혹자는 다시 쓰러지고. 왜, 어쩌자고 우주의 생명체들에게 조물주는 질병이라는 악귀를 대뜸 동행하게 하는 것일까. 무엇이 못마땅해서!
동안, 그래도 내게 마음의 안정을 조금이라도 갖게 한 것이 '걷기'이다. 안정이라기보다 '잊기'가 옳겠다. 잃어버리고도 싶었다. 아픔도 분실할 수 있다면. 3년째. 출퇴근길을 걸으면서 한결 나아진 몸과 마음의 건강을 실감하던 차다. 시작한 김에 습관으로 정착시키자고 작정하고 있었다. 걷기 시간을 점차 증가시켜가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도 두 시간을 걸었다. 또 한 군데 참 알맞은 걷기 코스를 발견했다. 가끔 다니던 길이었는데 새삼 발견한 것은 언니 덕분이다. 집 가까이 있는 시립 도서관 둘레길을 돌다 보면 언덕 위로 위아래 수평으로 흐르는 두 길이 있고 사이 구간을 오르내리는 계단이 각각 놓여 있다. 수요일 밤 저녁을 먹고 걷기에 나섰다가 그 코스를 밟았다. 계단이 상당히 높다. 급경사 쪽이다. 아마 각각 50칸씩은 될 것이다. 폭도 넓다. 아이들 걸음으로는 한 칸씩 오를 수가 없을 정도이다. 말하자면 한 칸의 사방 크기가 아이들이 소꿉장난해도 될 만큼 넓다.
두 계단, 각각의 50칸을 단 한 번에 거침없이 오르는 내게 중간중간 쉬었다가 올라오던 언니가 내게 말했다.
"야, 걱정 없다야. 너 계단 오르는 것 보니 니 걱정은 할 필요가 없겠다야. 굉장하다. 어찌 이 길을 쉼 없이 갈 수 있니? 너 정말 굉장하다. 아무 걱정 없다야. 니 남편 내시경 결과 기다리면서 은근히 니 걱정이 되었는데, 이제 아무 걱정 안 하련다 야. 너 어떻게든 잘 살겠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겠다야. 하긴 나도 살았어야. 그리고 우리 엄마가 얼마나 악착같이 살았냐. 걱정 없다. 너 다리가 보통 튼튼한 것이 아니다야."
다음 날 조직검사 결과를 보러 가야 할 사람이면서도 몽땅 술을 마시고 온 제부에게도 언니는 나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았음을 여러 번 강조했다. 그날 밤 가장 걱정 없는 밤을 보낸 것 같은 이는 그녀의 제부이자 나의 남편이었다. 평소 새벽 네 시, 수산시장으로 달려가 시장을 봐서 회사 식당으로 달려가던 언니. 과부 몸으로 사방팔방으로 뛰면서 돈을 벌어 자식 둘을 꿋꿋이 키워낸 그녀도 의외로 걷는 힘이 약했다. 내가 걷는 속도의 반도 따라오지 못하는 듯싶었다.
2년을 아침저녁으로 걸은 것이 효과가 있다 싶어 기뻤다. 평상시 출근길의 두 배, 세 배로 걸어댄 덕분에 몸은 참 가벼워진 요사이 며칠, 나를 지탱해준 가장 큰 힘이 걷기였다. 세상 좋을 때라 내가 듣고 싶어 하는 강의까지 들으면서 새벽길을 걷는 것은, 내가 하고자 하는 삶의 방식에 딱 들어맞았다. 보고 듣고 읽고 쓰고 배우는 데에 환장한, 세기말을 뒤흔드는 철학자라도 되는 양 오직 공부를 해보겠다고 부산스러운, 나의 살아가고자 하는 방법에 제대로 된 안성맞춤이었다.
내친김에 더 걷자. 같이 사는 이의 대장내시경 조직검사 결과도 괜찮았겠다, 내 건강검진 결과도 이상이 없다니 아직 축복 기간이라 여기자. 이를 계기로 나도 함께 건강을 알차게 가꾸어가자는 다짐이 생겼다. 그 그끄제, 그끄제, 그제, 어제, 오늘까지 5일 동안 새벽에 두 시간씩을 걸었다. 쑥 들어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은 듯한 복부를 만질 수 있게 되어 무엇보다 기뻤다. 소화기 쪽 이상 징후를 역류성식도염으로 진단받은 이후 줄곧 굶주려봐도, 간헐적 단식을 해봐도 늘 배가 벙벙하고 답답했다.
요 며칠 사이 그것이 해소된 듯싶다. 새날 아침을 시작하기 전 눈을 뜬 직후 만져보는 내 텅 빈 배를 만질 때의 내 손바닥이 느끼는 감각이 얼마나 개운한지, 나는 이 감을 참 좋아하고 즐긴다. 눈을 뜨면서 입 안 기운으로 확인되는, 지저분하고 구리기만 했던 역류성 식도염 증후군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발병 그 이전으로 몸 상태가 점차 가까워져 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여기서부터는 저녁에 쓴다.
오늘 여차여차해서 점심을 놓치고는 빈 서랍에서 유통기한을 채워가고 있는 컵라면을 먹었는데도 그리 배 속이 요란하지 않았다.
아침 걷기를 실천하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을 요약해 본다.
1. 여섯 시 십 분 전에 일어난다.
2. 여섯 시 삼십 분 전에는 꼭 집을 나선다.
3. 이렇게든지 저렇게든지 혹은 혼합형으로든지 해서 아침 녘 한 시간 이상을 꼭 걷는다.
4. 주말 혹은 휴일 등 출근하지 않는 날에는 같은 시각에 일어나서 두 시간 이상을 꼭 걷는다.
오늘 아침 걷기를 마감하는 시각에는 멋진 만남도 있었다. 시력이 좋지 않은 내 눈이 우리 아파트 라인에 사시는 할머니라 생각되는 분을 만났다. 건너면 집으로 가는 길이 있는 신호등 앞에서였다. 가까이 다가서는데 새벽의 색깔과 참 잘 맞다 여겨지는 건강한 은발을 소유한 분이셨다. 우리 라인의 할머니려니 했다. 그분에 비교해서 머리카락이 좀 짧나 싶기도 하고 몸집이 조금 약하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아침을 걷는 은발을 본 것은 1, 2년 사이 우리 라인 할머니뿐이었다. 그러므로 틀림없이 그 할머니시라고 여겼다. 그러나 내 눈앞에 서 계시는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아님을 인지하였다.
이미 내 시선은 할머니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할머니도 나를 보고 웃으셨다. 치아도 참 고르셨던가. 낯빛이 우리 라인의 할머니보다 훨씬 건강했다. 아, 정말로 아니구나. 멋쩍어진 나도 함께 웃는 김에 인사를 드렸다. 그냥 주고받는 인사였다.
"안녕하세요?"
등산길에서 지나치는 사람이 있을 때 나누는 가벼운 인사의 결이었다.
"....."
"....."
두세 번의 말 줄임표를 내놓은 후에야 할머니가 나를 보고 맑게 웃으시는 이유를 파악했다.
"아이쿠나. 아가씨(아줌마라고 하셨겠지, 아마.) 모자 끝에 얼음이 얼었네. 진짜로 춥기는 춥나 보다."
눈을 치켜뜨고 내 눈썹 아래 걸쳐있는 털모자의 외곽선을 올려다봤다. 투명 동그라미들이 옅은 빛에서도 확인되었다. 걷기에 재미를 붙여서는 모자에 얼음이 맺힌 것도 모른 채 걸었나 보다. 빠른 속도로 달리다가 마스크 위로 솟아오른 입김이 물방울이 되고 이것들은 낮은 기온 때문에 순간 얼어버렸나 보다.
신호등이 있는 교차로를 함께 걷다가 할머니는 여전히 웃는 얼굴을 내게 보이시더니 나와는 반대 방향으로 틀어 길을 가셨다. 우리 아파트에 사시는 분이 아니셨다. 이것도 기념이다 싶어 얼른 핸드폰 필름에 자그마한 얼음덩이들을 매달고 있는 모자를 찍었다. 뒤돌아서서 할머니의 은발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은발은 내 머리카락의 서너 배가 넘는 건강함을 지녔다고 생각하면 지나친 것일까. 문득 저 건강한 은발의 할머니처럼 늙어서도 웃음을 담고 있는 얼굴로 살아야지 다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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