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것!
분명 '잡것'이라고 했다. 차림새며 몸집이며 분명 초등학생이다. 한 소년이 있다. 그 옆에 또 한 소년이 있다. 장담컨대 아는 사이인 듯싶다. 나와 가까이 있는 친구가 더 힘이 세 보인다. 더 멀리 있는 학생은 특수 학생임을 그의 몸놀림으로 알 수 있다. 몸집은 그 학생이 훨씬 크다.
작은 체구의 학생이 더 큰 학생을 향해 외친다.
"잡것, 저 잡것!"
큰 체구, 특수 학생이라 여겨지는 소년이 맞대응을 한다. 보다 큰 키와 몸집으로 맞대응은 한다.
"...... ."
내 두 귀를 의심했다. 잡것? 고개를 홱 돌려 소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나의 시선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내가 보내는 눈길을 의식하지 못한다. 친구를 향해 내지른 말이 '잡것'이란다. 잡것이라니!
작은 몸집의 소년을 보니, 가만 지켜보니 발걸음이 산만하다. 걸음걸음 매 걸음마다 반복되는 리듬이 없다. '하나 둘 셋넷'을 한 걸음의 리듬이라 치자. 보통 사람들은 이를 반복하여 걸음한다. '하나 둘 셋넷, 하나 둘 셋넷~'으로 말이다.
이 소년의 걸음은 그렇지 않다. 소년의 걸음걸이를 떠올려 리듬을 붙여보았다. 발을 헛디디거나 돌부리에 걸리면 어쩌다가 '하나앗 둘둘 세엣넷'이 되기도 하고 '하~아낫 두우우울 세에에엣 넷'이 되기도 한다. 소년의 걸음은 일반적인, 보통의 걸음이 아니다. 요상한 리듬이다. 소년의 걸음에 다시 리듬을 덮어본다. '하나아앗 두우울 세에에이이이엣 네에에에에에에엣' 조금 과장된 것이기는 하다.
막춤 비슷한 춤이라도 추는 양 정해진 리듬이 없다. 소년에게 취중의 남자가 걷는 걸음의 리듬을 연관시키기는 미안하지만 천태만상 속 술에 찌든 이의 걸음을 연상하게 했다. 뭔 그런 일이 있겠냐며 반문하리라. 아니다. 걷는 걸음마다 이상하여 여러 번 그 학생의 걸음 위로 리듬을 얹혀 구음을 소리해 봤다. 딱 맞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아저씨의 걸음걸이였다.
그렇다고 술을 마신 것은 아니다. 확실하다. 움직임이 산만할 뿐이다. 신체 어느 곳이, 특히 걸음에 필요한 몸 어느 부분에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다, 그것 또한 절대 아니다. 그랬다면 오늘 이곳에 그 소년을 들먹인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소년의 몸은 지극히 정상이고 온전하고 건강했다. 오른쪽 손에는 굳세게 핸드폰을 들고 있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려던 참이었나 보다. 걸음만 갈지 자의 변형이었다.
이상하다 싶어 고개를 돌려 그의 걸음을 살피는데 시각이 아닌 청각을 자극하는 소년의 음성이 또 들려왔다.
"...... ."
"저 잡것. 내가 가만두지 않을 것이여."
"...... ."
"잡것, 지랄한다 지랄해."
"...... ."
키가 큰 소년이 또 뭐라고 했나 보다. 알아들을 수가 없다. '잡것, 블라블라'는 키가 작은 소년의 맞짱이었다.
화들짝 놀란 나의 청신경이 재빨리 내 운동감각을 재촉하여 180도 회전을 시켰다.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그냥 모른 척해야지.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겠는가. 가던 길로 온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걸음을 정상적으로 가동할 수 없었다. 힘이 빠져 걸음이 늦어졌다. 나 자신에게 외쳤다.
'뭘, 저런 정도에 기가 죽냐? 아이들이 뭘 안다고 그러겠어. 어쨌든 심하게 화가 났나보다 하자. 내 무엇을 어떻게 하겠는가."
다섯 걸음 정도 걷다가 다시 뒤돌아봤다. 뒷소리가 이어지지 않아 다행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궁금해졌다. 잠시 후 다시 소년의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작은 소년이었다.
"작것(잡것을 말한 것이겠지. 이번에는 내 귀에 작것으로 들렸다.). 선생이, 지만 이뻐하니까 정신을 못차리고 지랄한다니까. 내가 가만두지 않을 것이여, 작것. 씨발"
혼잣말이었다. 거리가 온통 울릴 만큼 큰 소리로 외쳤다. 그 거리에 있던 모든 사람은 다 들었을 것이다. 아무도 소년의 소리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잡것. 옛날 옛적 이 언어는 자연스러운 언어습관 속에 자리해 있었다. 상놈이며 쌍놈이라 말하기도 했다. 이것저것 할 것 없이 뒤섞인 잡동사니를 이른다. 순수하지 못함을 일컫는다. 여러 가지가 섞여 있는 물건이나 점잖지 못하고 잡스러운 상황의 사람을 뜻한다. 깊이 파고들어 파악하자면 이 낱말은 저 옛날 신분제도가 철저하던 때에 연유할 것이다. 예의범절이며 교육의 힘을 강조하며 자녀교육을 시행하셨던 부모님 덕분에 내 언어 속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세속에서는 제법 듣던 낱말이다.
시대가 언어를 선점한다. 요즈음 이런 낱말을 사용하는 것에 사람들은 벌을 생각할 것이다. 더군다나 초등학생의 입에서 이런 낱말이 내뱉어지다니 놀랄 일이라고들 할 것이다. 끔찍한 일이라고들 결론지을 것이다. 이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온갖 생각이 뒤섞여 내 영혼이 잡것이 되어버린 듯한 밤이었다. 어제 저녁이었다.
사실 더 긴 이야기를 좀 하고 싶었다. 다각적으로. 언젠가 하게 될 날이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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