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라이프/하루 공개

지독하게 느린 그림 그리기

반응형

 

 

 

나는 지독하게 느린 그림 그리기를 한다.

 

 

그제와 어제 쉬는 날, 딱히 평일과 달리 한 일은 그제 점심에 낮술 한 잔이 전부이다.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위 사진과 같은 호강을 누리지 못했다. 물론 하고자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제와 어제를 돌아본다. 쉬는 날이면 하기로 한 나와의 약속을 거의 해내지 못했다. 해내고자 했던 일들을 하지 못한 채 텅 빈 것 같은 하루를 보내고서 잠자리에 들 때의 허전함이란 참 견디기 힘들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허감이 온몸을 꽉 채운다. 더군다나 이틀이었으니. 이런 날은 이상하게도 해야 할 일들이 마땅한 레고 맞춤 조각을 찾을 수 없다. 찾아드는 일이 온통 삐딱하게 진행된다.

 

어제를 돌아보자. 태풍을 예고한 상태에서 수십 번 고민을 한 후, 쉬는 날에도 나선 일터 출근이었는데 그곳에서 손쉽게 해낼 수 있는 일, 그곳 가까이에 있는 동사무소에 가는 일, 그곳 가까이에 있는 우체국에 가서 해야 하는 일이 일터에서 집에 돌아온 후에야 전달받을 수 있었다. 온통 젖은 몸과 의복이며 신발을 빨아서 말린 후, 소식 궁금한 일터 화초들을 처리하고 난 뒤의 개운함을 만끽하고자 할 때 일이 바쁘게 나를 찾았다.

 

“있잖아요. 죄송해요. 금요일까지는 도착해야 하는데요. 이것, 저것, 그것, 요것 등!”

여섯 가지의 서류 작성 중 일터 가까이에 있는 동사무소에서 해야 할 일이 넷이나 되었다. 부리나케 집에서 만들 수 있는 서류를 만들어서 프린트하고 사인한 후 다시 외출복을 걸쳐 입고 집을 나서야 했다. 진저리가 쳐졌다. 어쩌자고 일이 이렇게 진행된담?

 

인감 도장이랄지, 동사무소에서 떼야 하는 서류 등이 포함된 문서 처리가 나는 참 거북스럽다. 어렵다. -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언제 어른이 될거나.

 

온갖 짜증을 부려서 일을 끝내고 난 후 돌아보니 남자에게 무려 열 통의 전화를 넣어, 묻고 나서야 처리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곳 우체국에 가려면 어디에 주차를 해야 하는지까지 답을 받아야 했다. 단 한 번도 거친 소리를 내지 않고 받아준 사내. 고마웠다. 또 한 사람에게도 거의 열 통 가까운 전화를 넣어서 도움을 받았다. 손아래 동서. 도무지 경제 쪽에는 관심 자체가 싫은 나는 이 일을 벌이는데 주도자의 역할을 한 동서에게 도움, 또 도움을 받아야 했다. ‘내 나이가 어때서’로 사람들은 세상을 사는데 나는 내 나이가 늘 힘들다.

 

젊을 때도 그랬다. 다만 젊을 때는 당연히 누군가가 해주는 일이라고 여겼던 것을 이젠 그 무대에 나를 주인공으로 턱 올려놓아야 할 상황에 서고 나니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해본 가락이 없는 일들이다. 절차도 복잡하고 갖춰야 할 문서도 많고 한편 제대로 해내지 못해서 혹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더욱 힘들다. 어제 가까스로 해냈다. 끝낸 것을 확인하고자 전화를 걸어 온 남자가 모두 무사히 처리했다는 나의 답에 이렇게 정리했다.

“잘했군, 잘했군, 잘했어~. 아, 이제 걱정이 없다. 혼자서도 잘 살 수 있겠구나.”

 

그제와 어제, 아니, 그제 오후이다. 쉬는 날에 딱 한 가지 해낸 일이 있긴 했다. 오랜만에 완성체 인물화(적당히 끊었지만 어쨌든 눈, 코, 입, 귀 그리고 온전한 두상과 목을 갖춘)를 그렸다는 것이다. 마땅한 인물 사진을 찾지 못해 고심하던 중이었다. 매일, 열 장 정도, a4 크기에 드로잉을 하는 것만으로는 지루했다. 늘 미적지근하여 책상 옆에 세워 둔 이젤과 화지, 연필, 목탄 등을 볼 때마다 불안하였다.

 

작품다운 작품을 좀 하고 싶었다. 작품이라니. 초보 아마추어 수준인데 무슨 작품이겠는가. 다만 이목구비를 갖춘, 표정을 지닌 인물 한 장을 정식으로 완성하는 것을 말한다. 지난해 한창 열을 올려 그리다가 멈췄다. 유명 화가가 출중한 작품을 완성한 후 맞이한다는 일정 시간의 침체기에 젖어 든 것처럼 그렇게 지난해 후반기를 멍하니 지났다. 연필을 쥐지도 못한 채 지냈다.

 

물론 책과 영상을 통한, 눈과 마음으로 그리기는 멈추지 않았다. 부지런히 그렸다. 최근 들어 유명 드로잉 책자 베끼기를 하루 열 점씩 해내다가 끝을 보고 나니 욕심이 생겼다. 더 나은 인물화를 그릴 수 있을 듯싶었다. 그 기운을 모아 어제 유튜브 검색을 통하여 인물화 그리기에 마땅한 사진을 찾았다. 어느 유명 유튜버의 작품 제작 과정에 있던 사진. 한눈에 반했다. 이것이로구나. 이래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진이며 모습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로구나.

 

 

인물 정밀묘사는 참 힘들다.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그제 그린 내 작품도 좀 자랑하고 싶은데 화가 유튜버의 사진을 그린 것이라서 멈칫 하고 있다.

 

작가의 작품 제작 과정에 일부러 눈을 주지 않았다. 사진만 복 나 스스로 제작해보고 싶었다. 책자 한 권의 드로잉을 마치고서 일종의 자신감이 생긴 것. 아주 느린 속도로 나의 그림 실력에 발전이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제, 드디어 작품 제작을 시작했다. 쉬는 날 해내기로 했던 남은 일들을 포기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해낸 정도에서 끝냈다. 완성작이라 칭하였다. 멋진 사인을 했다.

 

무엇보다 한나절에 그림을 완성했다는 것에 신이 났다. 나의 그림 그리기 패턴에서, 특히 인물화 그리기에서 가장 큰 문제가 속도였다. 여기저기에서 알아본 결과 정밀묘사에 가까운 형식의 내 그림은 그 속도가 매우 느린 것이 당연한 것. 어느 한 부분, 아주 미세한 선의 움직임으로도 인물 전체의 분위기에 엄청난 변화를 초래한다. 있어야 할 자리에 인물이 지닌 고유한 특성에 맞는 선을 심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다. 순간 잘못 선을 그으면 한껏 부드러운 턱선의 미인이 사나운 세모 턱선이 되어 날선 표정을 지닌 여자가 되기도 하고 인자한 눈빛의 사내가 악동의 눈빛으로 나에게 한 판 붙기의 도전장을 내미는 남자가 되기도 한다. 엉뚱한 말이지만 '인간의 존엄성'을 부르짖는 민주주의 정치판을 볼 때마다 뭇 정치인들이 무시하는 인간의 존엄성을 내가 화폭에 쏟아붓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죄책감에 들기도 한다. 사실, 자주 그렇다. 오묘한 b4 정도 크기에 그리는 인물화를 어떤 경우 대여섯 날을 들여야 하기도 했다. 순수 아마추어이니 당연하거니와 내놓고 작품을 하는 처지가 아니므로 그러기 마련. 거기에다가 독학인데 어찌 순식간에 ‘쓱쓱 싹싹’이 가능하겠는가마는.

 

나는 내 눈에 보이는 소중한 것들을 온전히 그리고 싶다. 인물이고, 풍경이고 정물이고 간에 그 특유의 실루엣을 순간 제대로 잡아서 슈우우웅, 한 번에 그릴 수 있는 실력이 좀 되었으면 싶다. 그런 날을 간절히 기다린다. 그리고 열심히 노력하자고 한다. 하자, 해보자. 어쨌든 이번 인물화는 b4 크기의 화지에 한나절의 시간으로 제법 사진과 비슷한 그림을 그려냈다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하여, 어제와 그제의 내 하루도 소중한 날들이었다고 남기기로 한다.

 

새벽녘 여름 홑이불이 엄청 싸늘했다. 한기가 느껴졌다. 남자의 이름을 크게 불러 깨웠다.

“◯◯씨. 얼른 일어나서 사방에 문 좀 닫아줘요. 추워.”

밤새 진동하던 바람의 크기에 제대로 다운이 된 나는 조각 잠 끝에 기상 알람 시각에도 몸을 세울 수 없었다.

“덥구만 그래, 나 원 참.”

가을 냄새가 벌써 풍기는 아침이었다.

반응형

'라이프 > 하루 공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은 한다  (11) 2023.08.14
과했다  (12) 2023.08.12
쉬는 날인데 식물이 궁금해서 출근하였다  (17) 2023.08.09
낮술을 마셨다  (10) 2023.08.08
주말 루틴 한 개를 추가했는데~  (16) 2023.0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