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술을 마셨다. 쉬는 날!
낮술을 마셨다. 쉬는 날이다. '양귀비주'를 마셨다. 엥? 양귀비주라니? 오, 아니다. '개양귀비주'로구나. 소주잔으로 딱 한 컵을 마셨다. 걱정들을 하덜덜들 말라. 마약 성분의 참 양귀비로 담근 술이 아니다. '개양귀비꽃(혹은 잎)'로 만든 술이다. 어떤 새로운 것을 접하면 그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캐묻는 사람이 나다. 이론적으로라도 꿰고 있어야 내 자존심이 민망하지 않다.
개양귀비주를 담아준 주인이 가까스로 내 질문에 응답해 왔다. 소화가 잘 안 된다고 해서 주니 그냥 마시면 되지 뭘 알고 싶냐고 했다. 그는 내 알고자 하는 핵심을 무시했다. 나는 '개양귀비주를 담그는 방법'을 알고 싶다고 했으나 그는 내게 이론적인 것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양귀비와 개양귀비'의 차이점 몇을 알려왔다.
양귀비와 개양귀비는 마약 성분이 있고 없고가 전부임.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는 양귀비꽃은 개양귀비. 마약 성분이 있으면 양귀비, 원예용 양귀비꽃은 개양귀비. 무려 80여 종이 있음. 이 중 마약 성분이 있는 건 네 종류. 양귀비와 개양귀비의 구분은 줄기의 잔털 유무와 씨방의 모양으로 구분함. 마약 성분이 있는 양귀비꽃에는 잔털이 없으며 씨방의 모양이 동글동글함. 개양귀비는 팽이나 도토리 모양. 진짜인지는 길가, 개양귀비꽃을 찾아 확인 바람. 색깔별로 다른 양귀비는 꽃말도 다름.
빨간 양귀비 - 위로, 위안, 몽상
흰색 양귀비 - 잠, 망각
자주색 양귀비 - 허영, 사치, 환상
주황색 양귀비 - 약한 사랑, 덧없는 사랑
빨간색 양귀비 - 쓰러진 병사. 제1차 세계 대전의 전사자를 추도하는 꽃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인 듯싶음.
노란색 양귀비는 꽃말이 없나 봄. 못 찾았음.
개양귀비잎의(그렇다면 개양귀비주도 아마 꽃이 아니라 잎으로 만든 듯) 효과
^ 개양귀비잎은 식용으로 사용되는 약초 중 하나.
^ 소화 기능 개선, 식욕 증진, 수면 유도 등의 효과가 있어 많은 사람이 섭취하고 있음.
^ 개인의 체질에 따라 위장 장애나 알러지 반응 등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으니 위장이 약한 사람은 개양귀비잎을 섭취할 때 신중해야 함.
대낮에 개양귀비주라니. 딱 한 잔을 마셨다. 딱 한 잔. 사실 어젯밤에도 마셨다. 딱 한 잔. 오늘 낮 또 한 잔을 마신 이유는 어젯밤 한 잔에 연유한다. 개양귀비 딱 한 잔을 마시면서 어젯밤 은근히 걱정을 했더랬다. 역류성 식도염을 달고 사는 나는 특별한 공식 행사일이 아니면 적어도 저녁 일곱 시 이전에는 식사를 마친다. 어젯밤에는 평소 하던 방법대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밤 열 시에 또 한 번 나의 연약한 식도로 음식물을 통과시켰다. 훨훨 날고 싶음이 고요 심사를 이긴 셈.
어젯밤, 남자가 저녁 운동에서 바삐 돌아오더니 저녁 초대가 있다며 나갔다. 현관 중간문을 나서면서 말했다.
"나, 대왕문어를 먹으러 감. 막걸리하고. 함께 준댔음. 같이 갈 것임?"
이런, 이런, 이런. 나는 이미 저녁 식사를 끝낸 후. 남자가 저녁 식사 전, 잠깥 바깥 운동을 하러 나간 사이 나는 저녁 식사를 마친 후였다. 밤호박 반 개, 찐 달걀 둘, 우유 한 잔에 청국장 가루 두 스푼. 요플레.
"우씨, 진즉 말해야지. 나 대왕문어 먹고 싶은데."
남자가 초대한 친구의 아파트 안에 도착해 있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시각에 전화를 넣었다.
"나야. 대왕문어 좀 가져와. 막걸리도 한 잔!"
민망했으리라. 다 들렸겄지. 주인 들으라고 했으니 성공.
"없어, 그러니까 같이 왔어야지. 도도한 척. 할 일이 있다고 안 왔잖아. 당신 것은 없음."
전화를 끊고 적어도 5분은 나 혼자서 툴툴거렸다.
사실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다. 대왕문어를 못 먹는다는 서운함에 이미 양치질을 했다는 것을 잊은 채 입 안에 꾸깃꾸깃 넣은 것이 아몬드 몇 알. 역류성 식도염 이후 아몬드도 하루 섭취량 개수를 맞춰서 씹어먹는다. 손위 언니의 말씀에 의하면 하루 10개 정도가 적당하단다. 역류성 식도염 증상을 소지하고 있음을 안내받고도 내 몸 안 소화기관의 안부를 무시하던 시절, 즉 하룻밤에 앞뒤 7킬로그램 가량 살이 빠질 만큼 구토했던 날의 오후 나는 아몬드를 무려 40알은 먹었을 거다. 옛날에는 그랬다. 겁도 없이 먹어댔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가끔 무지무지 그리운 그 시절! 내 멋대로 '처묵처묵'을 하던 시절.
저녁 아홉 시, 열 시를 넘어 자정으로 치닫던 시각, 이제는 그만 기다리고 양치질을 하고 자려는데 남자가 왔다. 적당히 취했겠지 싶어
"왔음?"
단 한마디 인사를 던졌는데 비틀거리는 오른쪽 손가락 끝에 신문지 묶음이 있었고 그 안에 봉지가 들려 있었으니 그것은 대왕문어였다. 막걸리는 없었다. 술기운에도 남자는 한밤중이니 맛만 보라고 대왕문어를몇 점 썰어주었고 김치 냉장고에 숨겨둔(?) 개양귀비주를 한 잔 따라주었다. 겁도 없이 마셨다. 어젯밤 걱정한 것은 역류성 식도염이 아니라 더위였다.
나는 아무리 높은 기온의 여름밤에도 에어컨이나 선풍기를 켠 채 잠들지 못한다. '소리'때문이다. 민감하다. 아마 개미 새끼 자기 똥을 운반하는 소리에도 잠을 깨고 말 것이다. 하여 대왕문어가 아까워 마신 한 잔 술때문에 열대야로 인한 불면이 진행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팍팍 열대야가 더해진 술기운! 다행히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늘, 휴가일의 아침, 몸도 마음도 말끔했다. 올라오는 태풍 6호 '카눈'의 영향으로 서늘해진 새벽 바람이 얼마나 상쾌했는지 모른다.(부티 '카눈'은 제주 앞바다에 미처 도착하기 전 그 기운을 깡그리 잃어버리기를!)
오늘 점심을 먹으려는데 떠오르는 것. 어젯밤 남자가 가져온 대왕문어가 남아있었지. 생전 처음(아마 몇 번은 먹었겠지. 대부분 음식을 집에서 요리한다. 육수를 끓이는 것부터!) 밀키트 차림으로 사온 냉면을 끓였다. 대낮 개양귀비주 한 잔에 대왕문어 열점 정도를 함께 먹었다. 가로5센티미터에 세로 2센티미터 정도의 대왕문어 조각들. 살집 씹는 맛이 쫙쫙! 내 안에 자리한 분노의 오염 부위를 씹어대는 듯 만족스러웠다. 오랜만에 아니 아주 오래 전 젊음의 시절에 한두 번 했을 법한 대낮 한 잔 술이 오후를 버티는 힘이다. 좋아하는 헤비메탈 그룹 '블랙홀'의 대표곡 '깊은 밤의 서정곡'을 듣는다. 아, 그립고 또 그립다. 록 페스티벌을 기다리던 내 젊은 날의 한낮이여.
오후에는 오랜만에 인물화를 한 점 그렸다. 어느 화가 유튜버가 그린 작품의 사진을 보고 그렸는데 누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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