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했다.
대여섯 달을 무난하게 치렀다. 나와 동거하는, 집에서 키우는 식물들에게 물 주기를 말한다. 얼마 전 우체국에 다녀오던 날, 무더위를 무릎쓰고 사서, 양쪽 팔에 걸고 안고 왔던 식물 다섯이 있었다.
소방소 옆 대형 화원이 늘 궁금했다. 가끔 장시간 외출을 위한 걷기 중 만나는 대로변에 있는 곳. 예전 같으면 화원을 지나노라면 불쑥 들어가 화초들을 구경하고 꼭 한 그루는 사서 나왔다. 이제 있는 살림도 없애려고 마음 단단히 먹고 하는 생활이라서 화원에 들어가기가 어색하다. 언젠가 이 화원 밖, 거리 쪽에 나와있던 화초가 눈에 들어오서 살까말까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주인 아저씨가 얼른 나와 알은 체를 하시고는 화초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다. 지극 정성으로 해주시는 화초 이야기에 홀딱 반해서 한참을 들었다. 정작 사지 않고 그냥 돌아서는 마음이 어찌나 미안했는지.
그날 잘 알겠다는 말만 남기고 돌아설 때의 뒤통수가 얼마나 무안했는지 모른다. 언제 여유 시간 넉넉하여 마음 차분할 때 꼭, 들어가서 구경을 좀 해야지 하던 마음이 있었다. 마음에 드는 화초도 몇 사고 말이다. 그날은 필시 우체국을 다녀와야 했으므로 내가 해야 할 일을 전부 무찌른 채 하루를 보내겠다는 결심도 어렵지 않았다. 차라리 여유로운 하루 생활로 기울자고 생각했다.
우체국을 나와 집에서 더 멀어지는 곳으로 나가야 있던 화원이지만 그곳으로 몸을 쉽게 돌릴 수 있었다. 요즘처럼 무덥지는 않았나 보다. 양산을 가볍게 들고 빅백을 어깨에 걸고 걸음했으니 말이다. 이미 스킨다부스 정도의 키우기 난이도가 낮은 관엽식물 하나 구입하겠다는 마음으로 들어갔으니 보무도 당당했으리라. 집주인은 동화 <빨강머리 앤>의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 정도의 적당히 푸짐한 몸매에 앤에게 반하여 예정보다 석 달이나 넘게 앤의 마을에 머물렀던 부자 할머니 '조지핀 배리'의 인성을 지녔음직한 낯빛이었다. 틀림없이 이미 얼굴을 익힌 주인 아저씨의 부인 임이 틀림없었다.
밖에서 바라보면서 예상했던 정도의 내부 크기는 아니었다. 밀림처럼 우거질 정도로 화초들이 많은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조금 실망스러웠다. 내가 원하는 관엽식물을 쉬이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다는 뜻이니까. 최근 들어 인터넷 몰에서 구경했던 특이한 관엽 식물을 찾았으나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도 몸매며 잎의 무늬 등이 제법 비슷한 식물 몇을 골랐다. 집에까지 걸어야 했으므로 들고 갈 일을 생각해야 했다. 양산이 있으나 접으면 그만이겠지만 빅백의 무게가 제법 나갔다. 한두 개만 사는 것이 옳을 일이었다. 내 삶의 신조를 떠올리면 말이다.
'이제는, 어떻게든 짐이 되게, 짐을 이고, 짐을 부리면서 살지는 말자. 제발 가볍게 살자. 버리자. 새 물건은 절대로 집에 들이지 말자.'
다짐은 다짐으로 제쳐뒀다. 결국 제법 흙에 자리잡은 묘목의 화초 다섯을 골라 구매했다. 피토니아 화이트 스타, 피토니아 레드 스타, 아펠란드라, 물방울 페페, 그리고 지금은 이름을 잊은 어떤 녀석 하나. 우선 내 품 속에 다섯 관엽이 안겨진 것에 뿌듯했다. 집에 물건 들이지 않기를 열심히 실천하는 단계라는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더위를 뚫고 꽤 긴 거리를 화분 다섯을 안고 걸어갈 일도 그리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두 팔 가득 화초가 담긴 비닐 봉지를 안고 열심히 귀가했다.
내 집에 새로 들어오는 식물들은 일단 교육을 받아야 한다. 주인장이 정해진 때에 주는 물을 받아먹어야 하므로 자기 몸 속 수분 조절을 잘 해야 한다. 정해진 날에만 물 주기를 실시하므로 살아내려면 각오 단단히 해야 한다. 상태를 보니 모두 싱싱했다. 아직 물을 주지 않아도 되겠다 싶었다. 한데 아펠란드라 한 녀석이 멋진 무늬를 뽐내는 잎을 하루 한 장씩 몸에서 버리는 것이 보였다. 눈 짐작으로 며칠은 더 둬도 되겠다 싶었다. 한편 최대한 견뎌라, 내가 물을 주게 되는 날 받아먹어도 되게 네 몸을 추스려라고 명령을 내렸다.
화초들이 비실비실할 때는 되도록 생각을 단순하게 해야 한다. 되도록 눈빛을 덜 쏘아야 한다. 자립심을 기르게 해야 한다. 아펠란드라는 눈부신 잎의 무늬를 뽐내느라 태어난 생이다. 하루 한 장씩 자꾸 잎을 떨구니 이것 안 되겠다 싶었다. 지난 주, 어제 금요일이 들어있는 주의 월요일이었을까, 아니 그 전날인 일요일이었을까. 앞으로 물 주기를 하려면 일주일이 남았는데(바로 내일!) 남아있는 칼라데아의 잎은 몇 남지 않았음이 또렷해졌다. 안 되겠다 싶었다. 사 오던 날 화원에서 언제 물을 줬는지를 알아왔어야 했는데 그냥 왔다. 매번, 모든 일에 조바심을 지니고서는 면밀히 움직이지 못한 채 일처리를 하는 나의 실수이다.
화원에서 구입해 온 식물 다섯에 물을 주기로 했다. 물받침 그릇과 함께 화초 다섯을 개수대로 데리고 갔다. 잔뜩 물을 먹였다. 화분에서 뱉어낸 물을 그대로 받침에 둔 채 저녁가지 뒀다. 그 물도 그대로 더 먹일 참이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확인해보니 세 녀석의 물받침 그릇의 물은 거의 다시 먹었는데 화이트며 레드의 스타 두 녀석이 함께 있는 물받침 그릇의 물은 반이나 남아 있었다. 남은 물을 아펠란드라에게 옮겼다. 다음날 아침 모두 베란다로 옮겼다.
또 다음 날, 그러니까 다섯 화분의 화초에 물을 먹였던 날의 다다음 날이겠다. 새롭게 눈 뜬 아침에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다섯 화초였다. 잘 살고 있겠지. 베란다로 나갔다. 어이쿠나 한 녀석, 가는 허리의 미모를 자랑하던 한 녀석의 몸이 구부러져 있었다. 내 좋지 않은 시력으로도 물커덩해진 허리가 보였다. 이제는 갈 때가 다 된 직립 동물에서 확인할 수 있는 뼈가 물러버린 모양새와 똑같았다. 재빨리 칼을 들고 가까이 가 줄기를 만져보니 허리 위는 아직 싱싱한 듯싶었다. 어서 잘라야 한다, 어서 저 윗부분이라도 수경재배를 하여 다시 뿌리내리게 해야 한다. 한 생명으로다시 태어나게 해야 한다. 아펠란드라였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아펠란드라의 허리를 짖이긴 수분은 이미 머리 꼭대기에도 그 여파가 미치고 있었다. 자르다 보니 싱싱한 듯 매달려있던 잎 둘도 쉽게 떼어져 나갔다. 가장 윗 부분에 자리한 잎 한 장만 뎅그러니 남았다. 어떻게든 살게 하려고 분에 꽂았다. 내 어리석음을 통탄했다. 어쩌자고, 어쩌자고 스타들이 뱉은 물을 이 녀석에게 먹게 했던가. 아마 그 짓만 하지 않았더라도 이렇게 줄기가 썩어 문드러질 일은 없었을 텐데.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랴.
화초들을 기르면서 매번 하는 후회가 그것이다.
'과하지 말자.'
화초들은 그렇더라. 대부분 과습으로 생명을 다하고 말더라. 수많은 화초들의 죽음에는 과습이 대부분이었다. 물을 너무 주지 않아서 죽었던 것은 딱 한 녀석만 떠오른다. 울창하게 자라고 있던 율마였다.
어느 세월에나 '적당한 양의 물 주기'가 가능할까. 정식 물 주기의 날에 화분에 물 주기도 마찬가지이다. 꼭 넘치는 경우가 있다. 일주일과 이주일, 일주일 반과 삼주일. 건기와 우기에 따라 물을 좋아하는 식물, 그다지 좋아하지 않은 식물로 나누어 두 가지 패턴으로 물을 주는데 물을 줄 때마다 물그릇을 넘치는 경우가 참 많았다. 오늘도 그랬다. 태풍이라고 습기가 많으니 간격을 길게 잡아 물을 주려고 했는데 너무 했다 싶어 하루 앞당겨 물을 줬는데 마지막에 한 녀석에 줬던 물이 바닥으로 흘러 한강물이 되고 말았다. 한탄했다. 어느 세월에 '적정한 때', '적정한 양', '적정한 시기'라는 것을 체득할 수 있을가. 인생에서 '중용'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가를 화초들에게 물 주기를 하면서 늘 느낀다. 매번 도로아미타불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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