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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내 어머니의 언어

창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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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창하다.

 

 

이 낱말이 현재 내게 알맞은 말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앞날이 창창할수록 더 시간을 아껴 써야 해야."

우리 엄마, 내가 축 늘어진 채 게으름을 피우려고 들면 꼭 하시던 말씀이다. 자식들의 언행이 늘 눈에 거슬렸을지언정 자기 안에 있는 언어 몇 내놓을  뿐 두세 마디 이상은 말씀하실 힘도 없으셨을 우리 엄마. 위 문장을 내게 말씀하실 때에 현재 나의 마음 같지 않으셨을까.

 

안타깝다. 자기 생을 제 몸에서 나온 자식들이 가로막은 거친 둘레, 흙 속에 묻은 채 평생을 사셨던 우리 엄마. 당신의 말, '창창하다'의 진면목을 나는 왜 어서 깨닫지 못했을까. 어이하다 그 긴 세월을 나는 무량태수(여기서는 원뜻을 벗어나 '매사 아무런 의욕이 없이 게을러 터진 모양새로 사는 사람'을 뜻함)로 살아왔을까.

 

세월이 흘러 위 문장을 내게 말씀하시던 나의 엄마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으시고 나는 내 아이에게 위 문장을 말하고 싶지만 내 곁에 있지 않고.

 

'창창하다.'

아직 내게 어울리는 문장이라면 참 좋겠다.

 


'창창하다(蒼蒼하다)'는 형용사이다. 

 

먼저 하늘과 바다, 그리고 호수 따위가 매우 푸를 때를 일컫는 낱말이다. 한반도의 가을 하늘, 그 창창함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으랴. 동해, 창창한 바다처럼 너를 생각하는 나의 마음도 창창하다.

 

두 번째로는 나무나 숲이 짙푸르고 무성할 때를 뜻한다. 우리 아버지가 평생 가꾸신 우리 집 뒷산은 창창한 수림(樹林)이 빽빽하다.

 

세 번째로는 앞길이 멀어서 '아득하다'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낱말이다. 자칫 부정적인 어감이 느껴지나 사실 긍정적인 의미가 더 크지 않을까 싶다. 위, 우리 어머니가 사용하시던 '창창하다'의 뜻이 그랬다. 내가 이 낱말을 들으면서 느낀 생각은 앞으로 무궁무진, 살 수 있는 날이 많다는 의미였다. 땅속으로 땅속으로 꺼져버리고 싶던지, 하늘로 치솟고 싶던지, 젊음의 일탈에는 '창창하다'는 곧 '영원하다'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조차 했다. 인간의 생은 딱 정해진 유한인 것을. 나는 왜 어서 빨리 '인생 유한'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일까.

 

'내 조국의 창창한 앞날'. 예로 든 이 문장은 어느 인터넷 플랫폼에서 '창창하다'를 찾다가 얻어 걸린 문장이다. 아, 내 앞날도 창창해서 감히 '내 조국'의 미래로 일희일비라도 할 수 있었으면. 이제 나의 생은 창창하다의 반대 지점에 정면으로 서 있다.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다. 몇 년 전부터 나는 늘 그날을 생각한다. 그날!

 

창창하다의 어근 '창창'은 여러 의미의 낱말을 지니고 있다. 내가 사용한 위 문장의 '창창'은 '푸를 창'의 두 번 반복인 '蒼蒼'이다. 아득히 먼 새파란 푸름이다. 어쩌자고 그 멀고 멀었던 창창함이 이렇게도 순식간에 나의 생에서 쑥 빠져나가 버린 것인가. 앞날 창창한 젊은이들의 푸른 호흡, 싱싱한 심장이 부럽다. 

 

나는 이제 '창창하다'의 또 다른 뜻인 '창창하다 倀倀하다'의 의미에 어울리는 나이가 되었다. 갈 길을 잃어 갈팡질팡하고 마음이 아득하기만 한 때. 혈연보다 더 가깝다고 여겼던 친구가 죽어 그의 처지는 그만 오갈 데 없는 천애 고아 마냥 창창할 따름이라며 울먹였다.

 

아, '창창하다'의 또 다른 의미인 '蹌蹌하다'는 모습이나 행동이 당당하고 위엄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자기 스스로 힘으로 그토록 어려운 일을 해낸 그의 모습은 창창했다. 과연 내게 이 의미의 생의 한 컷도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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