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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미술

쿠사마 야요이 : 강박과 사랑, 그리고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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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사마 야요이 : 강박과 사랑, 그리고 예술

- 미메시스

- 엘리사 마첼라리 글 그림, 김희진 역

 

'쿠사마 야요이' 책 표지

 

 

지난 시월 후반, 며칠 쿠사마 야요이의 세상에서 거주하였다. 준비 중이었던 강의 내용을 보완하기 위해서였다. 다섯 번을 다시 읽었다. 새로 익힌 언어가 '이인증'이다. 나를 나 아닌 다른 사람으로 인식한다는 질병. 의아했다. 내가 있는 곳이 때로 나와는 먼 곳이며 지금 여기 나와 함께 있는데도 전혀 존재 가치가 느껴지지 않은 병을 말하는 것 같다. 분명 나도 자가 진단되는 증상이다. 이것이 병이라면 나도 농밀한 질병의 징후를 지닌 환자이다. 병일까?

 

그녀는 이미 대중 속에서 산다. 일반인들도 어느 정도 식자층이라고 하면 설령 미술 분야에 어떤 관심이 없더라도 쿠사마 야요이를 알 것이다. 그녀의 대표작인 'pumpkin' 시리즈를 알고 있을 것이며 수많은 동그라미의 반복으로 뒤덮인 그녀의 그림을 알 것이다. 고흐의 대표 작품인 '별이 빛나는 밤에'가 틀림없이 생각나는 '무한 거울의 방'을 그녀의 동그란 눈과 함께 떠올릴 것이다. 

 

강박과 트라우마와 용기와 도전과 저항 등의 강렬한 의미를 지닌 낱말들로 꽉 찬 그녀의 생. 나는 가끔 그녀의 생을 부러워했다. 미친. 내 생각을 들은 또 다른 '나'가 현실의 '나'에게 던진 낱말이었다. 그래, 미치고 싶은 만큼 내 생이 끔찍했다고 여겨지던 세월 즈음 그녀의 그림과 그녀의 생을 접하고는 차라리 그녀의 생이 내 길었기를 바랐다.

 

내 생의 동력이 될 어떤 것을 갈구하던 시절이었다. 불면의 잠을 애써 무찔러야 했던 시절에 베갯머리에 손수 제작했던 부적을 집어넣으면서 나는 나의 어중간한 생이 얼마나 싫었던가. 이도 저도 아닌 삶이 얼마나 징그러웠는지. 타고난 생이 '서민'이라는 것이 구차스러웠다. 지탱해야 할 세월이 층층이 남아있다는 것까지 싫었던 시절이었다. 그녀, 쿠사마 야요이의 그림을 떠올리면 위안이 되었다. 

 

그녀의 작품을 공부하던 때 나는 가장 유명세를 타고 있던(현재도 그런 듯) '호박' 시리즈에는 그리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지금도 그렇다. 내 삶이 성차별이라는 주제에 얽매어 있거나 페미니스트 등의 낱말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것도 아닌데 나는 그녀의 초기 미술작품에 관심이 많다. 그녀 작품의 근간이 되는 요소가 아버지의 변심 현장을 본 것에 기인한 것이라면 초기 작품은 자기 생 자체를 뒤틀어 파쇄해버리고 싶은 욕구로 몸부림을 쳤을 것이다. 여기에 미국에 건너가서 그림을 그리던 시절 미국 유명 미술가들로부터 자기 아이디어를 도난당했다는 생각에서 잉태된 작품일 수도 있겠다. '축척 1'이며 '여행하는 삶' 등 설치 미술에 더 눈이 가고 생각이 많아진다. 

 

'축척 1'의 연작은 수백 개의 부드러운 남근 조각들로 의자와 테이블의 표면을 덮은 작품이다. '여행하는 삶(1964)'은 남근 주제의 확장이다. 남근 조각들을 끝이 뾰족한 스틸레토 구두에 끼워 넣고 사다리를 덮어씌웠다. 당시 미국 미술을 주름잡던 앤디 워홀 같은 남성 팝아트 미술가들이 만들어낸 요망스러운 이미지를 남근과 관련하여 조롱한 것이란다. 쿠사마 야요이의 남근상들은 부드러운 촉감에 폴카 도트 무늬의 패브릭 소재로 만들어졌다는데 이 무늬가 성병을 상징한다고 해석된다. 내가 이 작품에 주목한 것은 이런 해석이 아니다. 그녀가 표현한 남근 조각들을 나는 우주 생명체들의 몸부림으로 읽었다. 수많은 인간 군상들의 생을 연명하는 몸놀림으로 보았다. 어떤 이는 그것들이 환각을 일으키는 성게의 촉수와 더 비슷해 보인다고도 한다.

 

1960년대 중반부터 제작하기 시작한 도트무늬 연작들은 커다란 크기의 설치 작품들에서 잘 볼 수 있다. 남근상 조각들에 이어진 '무한한 거울 방(1965)'이 나는 그녀 작품의 절정이라고 생각한다. 거울에 반사되어 끝없이 재생되는 도트무늬들. 이후 그녀는 '죽은 자를 깨우는 대주연(1969)', 여러 누드 퍼포먼스 및 해프닝 작업으로 대중과 사회를 요리하는 데에 몸을 사리지 않았다. 그녀는 결국 자기 자신을 주체하지 못한 채 도쿄로 돌아갔으며(1973) 현재까지 그곳에서 살고 있다. 자기 육신을 다스리는 일에 치중하는 것도 중요했으므로 정신병원 옆에 공방을 마련하여 지금껏 미술 작업을 하고 있다.

 

그녀는 일본을 대표해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녀의 첫 전시회에 아무도 걸음 하지 않았다는 일본인들이 지금은 그녀의 미술관에서 각자 자기 영혼의 고뇌를 치유하고 있다. 일본 곳곳이 쿠사마 야요이로 숨 쉰다. 세계 곳곳이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을 받아들여 제2, 제3의 작품들을 여러 분야에서 생산해내고 있다. 우리나라도 그렇다. 그녀는 현재 살아있는 여류 미술가 중 가장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나도 얼마 전 미술 강의를 그녀 작품으로 치렀다. 내 유년의 생과 연결한 강의 내용이었다. 한동안 뜸했던 그녀의 미술 세계를 다시 공부하면서 나는 뜻밖에 오래전에 그녀 인생을 공부하면서 생각했던 것을 반복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의 생은 그녀에게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미친!'

 

내가 나에게 외치는 미지근한 목소리가 안쓰러웠다. 내 생의 뻘쭘한 무지가 그대로 드러난 셈이다. 부끄럽기도 했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그녀에게 미안해 했다. 너그러이 용서해주기를 빌었다. 그녀가 말한 문장을 옮겨본다.

"나는 내 주위에 있는 모든 것에 나의 의지를 불어넣고 싶다. 나의 예술을 종교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참, 그녀의 플라토닉 러브 스토리도 인상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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