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량전 실행 - 7월의 마지막 일요일
- 그러나 결코 한량이 되지 못한 오늘 오후
'놀라움과 달콤함과 씁쓸함을 내게 안겨 주다. 영화 <에펠>'
오늘 마지막 순서로 열었던 한글 문서창에 입력하여 저장해 둔 문장이다. 나는 늘 한글 문서창을 여럿 열어둔다. 쓰고 싶은 글들이 참 많다. 열흘 째 열려있는 것부터 오늘 오전 노동을 마치고 새로 열어둔 창까지 그때그때 쓰고 싶은 내용이 있으면 몇 줄 쓰고서 그대로 열린 채로 둔다. 하여 우리 집 '오리지널 컴퓨터'는 항상 열려 있다. 본체와 처음 만난 것이 언제였을까. 가끔 뜻하지 않게 사라지는 글들이 있을 때마다 전혀 정제되지 않은 구절들을 퍼부어 구박하지만 가만 돌아보면 결국 내 손가락과 그것을 작동시키는 내 뇌세포에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하면 다시 따스함 가득 품은 내 속내로부터 사랑을 받는 내 물건. 우리집 오리지널 컴퓨터는 이 살 저 살, 아래 두덩이며 가운데 덩이, 머리 꼭대기 한 점 있는 것 등을 요리 조리 쓸어담아 와서 한 몸이 된 것이다. 조립품. 아주 오래 전에. 이십 여 년 가까이 그리 살고 있다. 고마운 우리집 오리지널 컴퓨터. 하여 나는 최신형 노트북일랑 옆사람 사유 재산으로 인정해서 줘버렸고 아이패드는 쬐끔 간사스럽게 놀곤 하여 한 쪽에 팽개쳐두고 있다.
그제, 어제, 오늘까지 무려 사흘을 놀고 있다. '놀다.' 그러고 보면 나는 참 못 말릴 사람이다. mz세대의 눈으로 보면. 더군다나 '22. 내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오죽하랴. 사흘째 책을 펼치지 않고 있어서, 화지에 선 하나 긋질 않아서, 영화는 봤지만 제대로 된 영화감상문을 쓰질 않아서 '놀다'라고 나를 압박한다. 얼마나 한심스럽겠는가. 내 삶의 한계이다. 내 생의 치료 불가능한 질병이다. 병명을 뭐라고 명명해야 할까. 나 좋아하는 학문적인 용어를 가져와볼까. 일상에서 융합불가능을 인식하면 발정하는 불치병. 내가 뒤집어 씌운 '융합'의 범위를 볼까. 내겐 오직 듣고 보고 읽고 쓰고 실행한 것을 합한 후 또 하나 온전한 학문적 아류를 형성할 때를 말한다. 이 얼마나 황당무계하며 허무맹랑한 탐욕이며 포악인가.
아침 나절 옥타비오 파스의 <활과 리라>의 서문에 이어 본문 몇 쪽을 읽었다. 내 의식에 꽂혀 있는 '일하다'와 '놀다'를 돌아보게 했다. 여느 책 읽던 바와 똑같이 책과 연필과 온 몸이 성치 않은 낡은 수첩을 들고 베란다에 앉았다. 나쓰메 쏘세키의 소설은 한 쪽으로 제쳐졌다. 옥타비오 파스를 읽고 나서 두 권을 함께, 독서 감상문도 작성하고 인상깊은 낱말이나 구절 등도 적는 방법을 취하자 싶었다. 대여 기간이 각각 2주일이어서 시간은 넉넉하겠다 싶었다.
그러나 옥타비오 파스를 몇 장 읽다가 꿈이 확 깼다. 온 몸을 강타하는 문장들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딱 한번 몇 문장을 옮겨쓰고는 연필과 메모장을 내려놓았다. 그것도 제2판 서문에서.
'대답이 달라지는 것은 질문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부동은 허상이며 움직임이 만드는 환영이다. 그러나 운동 역시 허상이며 변화 속에 되풀이되는 '동일함'의 투사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동일하며 동시에 달라지는 질문을 반복하는 것이다.'
고백하건대 나와는 관계가 먼 별천지 사고(思考)였다. 연필을 들 필요가 없었다. 책 한 권 모두, 책 속 모든 문장을 곱씹으면서 좍좍좍좍 분해하면서, 베끼면서 읽어야 한다 생각되었다. 책을 접었다. 우선 내려놓기로 했다.
나쓰메 쏘세키로 돌아가기로 했다. '인상깊은 부분 베껴 써 보기'로 오기까지 여러 갈래 길을 거쳤다. 옥타비오누스의 문장들에서 받은 충격이 너무 컸다.
베란다로 나가 몇 화분을 정리하였다. 지난 겨울 시작한 파킬라 삽목 작업이 이제 마무리된 듯싶다. 넷 삽목에 두 그루는 온전한 나무가 되었다. 좀 더 지켜봐야 할 필요는 있다. 오늘까지 혹 살아낼가 싶어 지켜봤던 한 녀석의 몸을 빼내어 버렸다. 둘은 새 생명을 잉태시키지 못했다. 녀석들의 힘이 부족했던 것일까, 내 보살핌이 부족했던 것일가. 그곳에 페페 한 그루를 이식하였다. 페페는 본 화분 곳곳에 열 그루 넘게 덧난 채로 자라고 있는 아기들이 있다.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페페 본체 셋에 분가한 녀석 둘 그리고 오늘 새 분가살이를 한 녀석이 시작한다.
기르던 부추를 잘라내고 어제 시골에서 가져온 부추 뿌리를 추가로 심었다. 분갈이는 하지 않았다. 부추 화분 셋이 되었다. 잘 자라야 할 텐데. 부추를 물 먹듯이 하는지라 부추 닮은 녀석의 화분만 봐도 가슴 설렌다. 부추를 무지 좋아한다. 우선 요리 방법이 쉬워 좋다. 내 게으름을 담보해서 얼마든지 쉽게 먹을 수 있다. 흐르는 물에 잘 씻어 팔팔 끓는 물에 살짝 데쳐내어 초장에 찍어먹으면 그만이다. 경제적으로나 생활의 편리함에 맞춰볼 때 가장 가성비 좋은 음식 재료이다. 짤달막한 키에 건강한 몸을 자랑하는 전통 부추만을 먹고자 하여 시골에서 공수해 왔다. 맛볼 때마다 온몸을 정화시켜주는 기분이다. 하여 전통 부추를 기른다. 듬성듬성 심어진 부추 몇 가닥의 화분 둘에 원 안에 꽉 채운 뿌리 여럿을 추가하여 가득한 부추 새끼들의 집합체 화분 셋이 되었다. 어서 자라렴. 옆사람은 잘라야 할 때를 놓쳤지만 오늘에야 음식 재료로 오른 부추에 청량고추를 몽땅 잘라 넣어 부추전을 붙여 내게 대령하리라. 물론 실내골프 겸 저녁 술자리를 위해 집 떠날 시간을 예정해두고 있겠지. 삽목하여 생을 시작한 철쭉 등 화분 몇도 버렸다. 새 생명을 전잎들 사이에 쑤셔 넣었다. 너무 짧은 생이다. 나를 원망하겠지. 어쩌자고 내 생을 시작하게 했소. 왕매미가 바닥에 떨어져 죽어 있다고 어쩔 줄 몰라하던 어제 오후 외출길에서 만난 소녀들의 눈물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나도 한편 참 사람다운 사람이기도 하다.
드디어 책상 앞 의자에 앉았다. 시작하면 끝을 낸 후 일어서려고 생각하고 보니 책상 위가 너저분하다. 이 나이 되도록 그때그때 버릴 것을 구분할 줄 모른다. 한두 달 전 캘리그래피를 쓰던 종이에서부터 어디서 찾아 올려뒀는지 3년 전 연구 차 공부했던 루벤스의 그림 설명지도 올라와 있다. 한쪽 구석에는 블로그에서 내게 의미깊은 댓글을 주신 분들의 댓글을 베껴놓은 것까지(이 일도 제법 재미있다). 한 짐이다. 정리를 한다고 했으나 상하좌우 반듯하게 모아져 다시 대형 프린터 위로 위치만 바꿔 앉는다. 종이 속 활자들이 늘어지면서 내뱉는 한숨 소리 합창이 들리는 듯하다. 흐휴~ 쫑알쫑알쫑알~
자, 이제 나쓰메 쏘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읽으면서 체크해뒀던 부분, 베껴쓰기를 시작한다. 소위 내가 빌어쓰고 싶은 문장들을 말한다. 나는 글을 쓸 때마다 이것들을 아주 많이 변형시켜 복사할 것이다? 지켜 보시라. ㅋ. 아,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나는 이미 내 글쓰기 습관이 굳혀져 있다. 어떤 좋은 글귀도 따라 쓸 수 없다. 어떤 배움도 내 것으로 체화할 수 있는 시기를 넘어섰다. 내 것이 내 것으로 응고된지 오래다. 새롭게 배우고 익혀서 이렇게 좋은 것, 저렇게 훌륭한 글쓰기의 표현법 등을 적용시킬 수 있는 융통성이 마련될 수 없다. 나는 이미 좁아졌다. 거대한 벽이 내 글의 사방에 세워졌다. 슬프지만 어찌 하랴. 단지 베껴볼 뿐이다.
저녁을 먹고, 씻고, 지친 손과 엉덩이와 눈을 위로하고자 유튜브를 켰다. 내 좋아하는 '팬텀싱어' 모음곡을 몇 곡 들었다. 늘 가장 먼저 듣던 '카루소'와 '흥타령'도 뒤로 밀치고 포레스텔라를 듣는다. 고우림의 목소리가 확연히 들리는 곡을 듣고자 했다. 최근 작품 'Bad~'의 처음 부분에서 가장 잘 들린다. 왜, 고우림? 어제의 쇼크를 추스리느라고. 김연아니까 용서한다. 그리고 고우림이니까 봐 준다. ㅋ. 그리고 나는 곧 라흐마니노프로 돌아선다. 고우림보다 라흐마니노프가 훨씰 잘 생겼다고 나를 세뇌시킨다. 푸하하하하하하하~ 그래, 가야지. 아름다운 커플이여. 잘 살기를~
조금 전 열한 시를 조금 넘겨 나쓰메 쏘세키의 장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읽으면서 인상깊은 내용 혹은 표현이라고 표시해뒀던 곳들 베껴쓰기를 마쳤다. 열 번 이상 나는 '차라리 멈출까?'하고 머뭇거렸다. 베끼고 또 베껴도 끝이 없었다. 뭐가 그리도 나를 사로잡았을까. 어떤 표현들이 나를 가만두지 않은 것일까. 사실 내 자신에게 정나미가 떨어졌다. 아직도, 이 연세(?)에 와서도 무슨 욕심을 이리 부리느냐. 베껴두고 몇 번이나 읽을까나. 베낀다고 얼마나 변화가 있을 것인가. 이것 이리 베낀다고 이미 고체화된 글쓰기가 얼마나 발전이 있을 것이냐. 며칠 지나면 고양이, '검은 고양이 네로'만 남아 있을 텐데. 아, 한 마디로 나도 참 징그러운 인간이다.
곧 자정이다. 날을 넘기기 전에 우선 올린다. 맞춤법은 그냥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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