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피하자.
일기라며, 혹은 아침 일기라며 쓴 것들을 돌아보니 천태만상, 각양각색의 매일을 살면서 너무 안일하게 구성해온 듯싶다. 탈피하자. 글쓰기 분야에 엑스퍼트도 프로페셔널도 스페셜리스트도 아니므로 그다지 크게 신경을 써서 글을 쓸 필요는 없다. 그러나 매일 그저 그런 방식의 일기 쓰기는 아닌 듯싶다. 말하자면 '나는 오늘 몇 시에 일어났다' 류는 아니라는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일기 쓰기의 형식'을 배우던 때가 생각난다. 돌이켜 보면 얼마나 우스운가. 교육은 왜, 늘, '틀'을 만들어 '고정'시키는 것에 목을 매는가. 열심히 배울수록 형식에 맞춰 쓰느라 정작 쓰고 싶은 내용은 일기 바깥에 있었다. 일기란, 특히 초등학생 시절의 일기는 일종의 조작이라 이름 붙이면 너무한 것인가. 초, 중, 고등학교에서 외국어 시간 원어민으로 뛰는 분과 나누던 대화가 떠오른다. '왜 한국에서는 학생들에게 뭔가를 하라고 하면 계속해서 어떤 방법으로 해요를 묻는지 모르겠다'던. '자유롭게 하세요'를 수없이 외친다면서 서툰 한국어로 '왜 한국에서는~'을 강조하던 원어민. 돌이켜 보면 우리는 늘 선생님이 일러주신 방법으로 해야만 제대로 되는 것으로 확신했던 시기가 너무 길었다. 우리는 학창 시절의 대부분을 '칸을 만들고 그 안에 집어넣기'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느라 많이 놀지를 못했다.
녀석들. 내가 키우는 화초들은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 싶을 만큼 내가 키우는 방식에 제대로 길들여졌다. 고마운 녀석들. 주인 여자 게으른 줄을 어찌 그리 잘 간파했는지. 요즈음 장마철을 겸한 무더위 즈음 물 주기는 1. 5주에 물 주기와 3주째에 모든 녀석들에게 물 주기로 나뉜다. 한 주일을 지나고 다음 주 수요일에 물을 주기와 셋째 주 일요일이 되어 모두에게 물을 먹이는 식이다. 겨울철에는 더 늘어지는 간격으로 물 주기를 한다. 한여름과 한겨울 화초 키우기는 느긋하게 해도 되므로 참 편하다.
오늘은 둘째 주 수요일. 물을 많이 먹는 화초들에게만 물을 주는 날이다. 결론은 오늘 해가 뜬 시간의 상당량을 화분에 물 주기로 보내야 했다는 것이다. 일요일 오전 내내 걸리는 모든 식물에게 물 주기에 비하면 조금밖에 안 되는 시간이지만 하고자 하는 일에 매달릴 수 있는 시간이 줄었다는 것이다. 내 특기인 '합리적인' 변명이다. 오늘도 '놀자' 쪽의 여유로운 하루를 보내고야 말았다는. 읽고, 쓰고, 그리기를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어제 옥타비오 파스의 책 <활과 리라> 서문에서 읽은 첫 글귀가 줄곧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글을 쓴다는 것은, 아마도 언젠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던져서, 그에 대해 답할 수 있을 때까지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질문에 대답하려고 애쓰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이외에 더 적절한 정의는 없을 것이다.'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질문. 거기에 대답하려고 애쓰는 것. 글을 쓴다는 것.
옥타비오 파스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이미 가고 없다. 어떻게든 물어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의 생을 돌이켜 본다. 어릴 적 집안의 파산. 어렵사리 한 공부. 고등학생 시절부터 발표한 창작 시며 문학 비평 활동. 외교관 생활과 그의 고국 멕시코의 혼란. 그에 대한 저항 등. 그를 괴롭히는 질문은 범위는 비록 크고 넓지만 크게 나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여기고 싶다.
'대체 사는 ~ ?'
차마 완성하지 못한 질문형 문장을 내던진다. 그를 불러본다. 이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당신도 살았으리라. 당신을 괴롭히는 질문에게 두들겨 맞은 채 넘어지지 않기 위해 당신이 한 일은 시를 썼다는 것일 텐데. 조물주는 왜 '선택'이라는 낱말을 만들었을까요. 어쩌자고 당신은 시의 리듬을 타고 휠 랄랄라 멋진 유영을 할 수 있었는데 나는 왜 바등바등 없는 능력을 탓하며 소주잔을 들이켜게 했을까. 그러므로 부디 당신, 노벨문학상 수상자였을지라도 나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므로, 당신도 나와 같은 질문을, 우리들이 모두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그 해답을 찾지 못해 끊임없이 괴로웠기를.
당신은 아마 프랑스에서 만난 쉬르 리얼리즘(초현실주의)으로도 질문에 대한 답을 제법 찾았으리라. 쉽게 생각하자고요. 당신과 나, '영장류 인간과'에 속하는 똑같은 사람이라는 전제 하에 함께 답을 찾아보자고요. 당신 못지않게 인간이 가장 열광적으로 해야 할 것은 예술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벼르고 벼르면서 나도 오늘은 드로잉북을 펼쳐야 되겠소. 4B연필이 제멋대로 화지를 휘젓게 하여 한 미친 여자를 그려보고 싶소. 당신과는 조금 다르더라도, 알찬 내용을 못 되더라고 당신의 초현실주의를 흉내내보겠다는 것이다.
내 젊은 어떤 날, 어느 유명 섬에 들렀더이다. 섬, 그리 높지 않은 구릉 정도의 섬 중앙으로 오르니 한 여자 창을 하고 있더이다. 긴 머리 풀풀 나부끼며 제 손바닥만 한 미니 부채로 가락도 새로 짓고 리듬도 바투 세워 공중을 오르내리더이다. 그녀가 부르던 창의 노랫말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날 섬은 관광지라지만 단 한 사람 나만 있던 한여름이었소. 아, 둘이었구려. 그녀, 흰 소복으로 치장한 미친 여자와 나, 하여 둘이었구려. 장대비 포악하게 쏟아지던 무더위의 칠월이었소. 구성진 가락 자신에게 내가 보낸 박수에 고마움도 표하지 않고, 거센 빗줄기 아랑곳하지 않고 펄펄 펄펄 제멋대로 나대던 하얀 치맛자락 곱게 쓸어안고 섬 안으로 숨어들던 여자. 그 여자를 그리면서 오늘도 나를 찾는 질문들을 용서하겠소.
사실은 시를 쓰고 싶소. 당신처럼 시를 쓰고 싶소. 아니 시를 썼지요. 미친 여자 창보다 못하다는 것을 잘 알지요. 그래 몇 푼짜리 자작시 몇, 저 건너 또 다른 포털 사이트의 블로그에 숨겨 뒀지요. 열쇠까지 걸어 잠가두고 혹 누구 내 못난 시 훔쳐가면 어쩌나 싶어 가끔씩 한밤중에 확인도 하지요. 오늘, 드로잉 끝에 당신 흉내라도 좀 내보면 내가 끊임없이 만들어 내던지는 질문, 내게 끊임없이 달려들어 답을 내놓으라고 졸라대는 질문의 날카로운 불면을 좀 잠재울 수 있을까요.
당신이 흠모했다던 하이쿠 시인 마쓰오 바쇼를 흉내 낸 5,7,5를 하나 내놓습니다. 한번 운율 살려 읽으시고 가볍게 버려주시오.
자정 깊은 골 소매 부리 잡고서 눈물 숨기네
괜한 내 앙탈에 당신의 잠자리 가시 돋을까 걱정되오. 당신의 시 중 가장 유명세를 탄, 하여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 일부를 적습니다. 가만 소리 죽여 낭독하면서 잠자리로 들어 누울까 합니다. 내일 또 답 없는 질문을 들고 새날을 살아낼 준비를 해야 되겠지요.
내 앞에는 아무 것도 없다 다만 순간 하나만이
이 밤을 되찾고, 꿈 하나에 대항하며
모아놓은 이미지들을 꿈꾸며
꿈에 대항하며 모질게 조각된
이 밤의 허무, 글자글자마다
일어선 맥박을 뽑아버린 순간만이,
한편 바깥에선 시간이 풀려져
내 영혼의 문을 부순다.
- 옥타비오 파스의 시 <태양의 돌> 일부
왜 오늘 매미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을까. 벌써 매미들이 퇴장해야 할 시기일 리 없는데. 누구 오늘 매미 울음소리 들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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