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녀로부터 삶의 의욕을 나눠 받았다.
- 이에 앞서 내 부끄러운 그림 '하비에르 바르뎀'을 올렸다.
몇 분 전 블로그 일기에서의 다짐은 단 몇 초가 되지 않아 지워졌다. 데스크탑 컴퓨터의 모니터를 끄려는 순간 내 눈을 사로잡는 문자가 있었다. 그젯밤 영화 시청 끝에 넷플릭스를 끄지 않았나 보다. 여러 영화 소개판이 보였다. <마우트하우센의 사진사>가 내 시야 안에 쏙 들어왔다. 빈약한 내 정신력은 와르르! 영화를 보기 시작하였다. 내게 해댄 변명은 '오늘, 실내운동을 안 했잖아. 해야지. 저녁 먹은 것을 소화시키기 위해서라도 어서 실내운동을 하자. 그냥 하느니 좋아하는 영화를 보면서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나? 어서 보고 어서 움직이고! 루틴 실행을 철저하게!' 6, 70년대 영화 속에서 볼 수 있는 공산 사회, 자기 책임 선서를 부르짖는 양 다부진 호령을 내게 던지면서 영화 속으로 풍덩 빠져들었다. 일시에 컨디션이 회복되었다. 영화가 나를 살게 하는구나.
인간의 양극을 완전한 직선으로 다녀가는 영화였다. 극을 잇는 최고점과 최저점의 거리가 계산되지 않았다. 수치화가 불가능할 듯보였다. 사람이 얼마든지 서로에게 약이 될 수 있는가 하면 독이 될 수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대체 사람이라는 존재는 뭘까. 아침에서 저녁에 이르도록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 사는 내가 철학자라도 되는 양 우쭐거리자 쓰디쓴 비애가 이내 직선을 젖어들어오고 있었다. 양극을 오가는 직선의, 너무 심한 길이 차는 그 상황을 보는 사람이, 받은 충격 정도를 무마시키느라 정신이 가라앉겠구나 생각되게 하였다. 독일산 'U보트(볼프강 페터젠 감독의 영화 '특전 U보트'를 차용)'는 그야말로 영화였다. 정신을 붙잡아야 했다.
영화의 반 정도를 보다가 멈췄다. 더 이상의 시청은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은 몸을 사각사각 좀 먹게 하고 마침내 무너지게 할 것만 같았다. '함몰'이라는 낱말이 떠올랐다. 영화 양극 중 하나의 극은 상상 이상의 재난이었다. (수없이 많은 공포 영화를 나는 이미 시청한 상태이다. 한때 사람을 미워하지 않기 위해 6개월에 150편 정도의 19금 괴기, 공포, 추리영화를 시청한 적이 있다.) 마저 보게 된다면 '인간 종말'을 읊으면서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응급실 해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결국 잠을 못 잤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수만, 수천만 가지의 생각들이 어두움 속에서도 뇌세포들을 놓아주지 않았다. 눈을 감았는데도 두 눈이 동그란 채 어둠 속 탈출을 위한 구멍을 만들기에 바빴다. '그냥 그렇게', '그렇고 그러하려니'의 생각으로 살아온 나의 생이 부끄러웠다. '극'을 들먹여댔다. '양과 음의 양극'이라고 모아 보자. 지극히 기초적인 수준의 의미를 붙이자. '양'은 긍정, 소위 밝음이라 하고 '음'은 부정, 사람이 결코 해서는 안 될 구렁텅이라고 해 보자. 내 생은 늘 중간이었다. 어중간한 위치에서, 어정쩡하고, 어떨떨하고, 결국 어리숙한 상태에서 45도 각도로 고개를 수그린 자세이다. 지평선 아래 어느 한 점을 흐릿한 눈으로 머뭇거리면서 살아왔다. 경계의 근처에서 어슬렁거렸던 나날이었다. 새벽 네다섯 시가 다 되어 설핏 잠에 들었다가 여섯 시 알람 해제 후 다시 눈을 감았다. 큰 일 났다고 생각하면서 눈을 떠서 확인해 본 시각은 일곱 시를 정확히 표시하고 있었다.
낮을 위해 다행이다 싶었다. 한 시간을 제법 옹골차게 잔 듯싶다. 출근 시각을 알면서도 깨우지 않은 또 한 사람을 향해 서너 번을 징징거렸다. 이어 일체 겉돌기가 없는 준비를 하니 양치질부터 딱 삼십 분을 지나 집을 나설 수 있었다. 밤새 온갖 생각에 시달린 것에 비하면 뭉텅한 채 길을 걷는 육체를 이끄는 영혼의 상태는 제법 말끔한 편이었다. 이번 주는 여름옷 차림 그대로 괜찮을 것을 어제 확인하였다. 검은색 십자가를 목에 걸었던 의상이었다. 이틀 착용한 것도 습관이라고, 십자가가 없이 텅 빈, 거울 속 가늘고 희디흰 목이 허전하였다. 가는 줄의 목걸이를 걸었다. 검은 머플러를 오른팔에 돌돌 말아 출렁이게 하던 아침이었다. 오늘은 빠른 길이었다.
공원 벤치에 앉아 무턱대고 가는 세월을 붙잡을 힘이 없어 차라리 침묵하시는 어느 할아버지에게 마음의 인사를 드렸다. '오늘 하루도 부디 안녕하시기를!' 일터 가까이 와서는 내 일년생 화초들의 상태도 점검하였다. 내 나쁜 시력에는 어제와 크게 다른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밤새 찬바람에 흩어지고 떨어지고 무너졌을 것이다. 단순히 사라지기도 하고, 자기 몸을 지탱할 힘을 모두 쏟아 내버린 나머지 한 점 바람에 쓰러지기도 했으리라. 온 정성을 알알이 담아 후손의 번식을 위해 지신의 힘에 자기 전부를 의지하기도 했으리. 어떤 방법으로든지 살아남을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검은색 통 유리문이 있는, 가끔 곁눈질로 불룩 나오기 시작한 내 아랫배의 정도를 살피곤 하는 건축사무소 건물 앞을 몇 걸음 앞둔 지점이었다.
어떤 사물을 가져와서 비유할 수 있을까. 생각이 날 듯 말 듯 어떤 물체의 형체를 닮은 보통 키의 소녀가 눈앞에 보였다. 왼 어깨에서 오른쪽 엉덩이를 향해 사선으로 걸린 크로스백은 그녀의 몸무게를 훨씬 넘어선 채 온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상의를 재빨리 확인하니 제복이었다. 가까운 곳에 있는 중학교였다. 그곳 최고의 학년인 듯싶은 묵직한 걸음이었다. 대여섯 걸음 정도 앞서가던 소녀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더니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너무 갑작스러워 하체에 비해 한참 가벼워 보이는 상체가 앞으로 몇 번 흔들렸다.
가슴의 중앙쯤에서 굳게 잡은 크로스백이 잡아준 몸의 중심을 확인한 후 소녀가 왼편으로 몸을 돌렸다. 바로 뒤에 서 있는 나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할 만큼 무엇인가에 집중하였다. 검은색 통 유리였다. 전신이 한눈에 보이는 거울이었다. 검은 거울이라는 말이 어쩌면 맞을 수도 있겠다. 검은색이지만 외부에서 쏟아지는 빛을 소화해내면서 유리는 은빛 투명거울보다 훨씬 물체를 잘 보여줬다. 거울 속 사람의 모습은 절대로 평면이 아니었다. 지나친 것 같지만 3D나 4D를 들먹일 만큼 육신의 덩어리를 실감 나게 형상화 시켰다. 내가 하곤 하던 일을 소녀는 제법 긴 시간 들여 해냈다. 자기 모습을 감상하고 점검하고는 본체에서 발견되는 오류를 검증하여 수정하고 보완해나갔다.
크로스백을 움직여 뒤쪽에 치우친 가방을 앞쪽으로 몇 센티 이동시켰다. 앞모습만을 확인하고 보니 앞모습 중심의 수정과 보완이겠다. 상의 교복을 위에서 아래로 쭉 잡아당겼다. 웃옷의 가로획을 반듯하게 맞췄다. 마치 횡경막의 근전도(근육의 움직임에 따라 발생하는 전류의 변화를 기록하는 그래프.) 확인을 위한 기준선을 긋는 듯싶었다. 바지 허리 부분을 여러 번 좌우로 움직이더니 두 손을 엉덩이 쪽으로 옮겼다. 바지 엉덩이 부분을 움켜잡아 역시 좌우로 움직이고는 두 손을 목 부분으로 가져갔다.
이어 두 손을 얼굴로 가져갔다. 정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입으로 원운동을 시도하고 있었다. 얼굴 근육의 긴장도를 풀어주려는 의도라 여겨졌다. 다음은 양쪽 머리카락의 앞머리를 몇 번 손놀림으로 고정하였다. 이리저리 원하는 모양새가 되었나 보다. 마지막으로 정리 정돈한 것은 얼굴이었다. 손바닥을 두세 번 마주쳐서 박수 소리가 나게 하더니 입술을 툭 튀어나오게 하여 훅훅 불었다. 그리고는 이마 두 눈, 양쪽 볼과 턱의 순서로 가볍게 두들겼다. 손바닥과 얼굴 부딪히는 소리가 맑고 선명했다. 만족을 체감한 듯하였다. 우향우를 다소곳하게 이었다. 패션모델의 워킹 비슷한 투 스텝 걸음걸이가 야무지게 땅의 근육을 짓밟았다. 오늘 하루도 더 멋지게 살겠다는 자기 다짐이었다.
점차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다양하게 직선 운동을 펼쳤다. 활동사진을 슬로우 리듬으로 작동시키는 듯 사람들이 느릿느릿 덜 풀린 잠을 길 위에 뿌렸다. 풀린 잠들 속 숨 쉬던 호흡들은 곧바로 증발하였다. 소녀는 두세 번 우향우를 반복하였다.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소녀에게 오늘 하루는 얼마나 의욕 충만한 하루이겠는가. 그녀의 삶에 대한 의욕이 바라보는 내게도 조금은 전달되었으리라. 나는 그녀가 보내준 삶에의 의욕을 기꺼이 받아 접수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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